조병수 목사 인터뷰

 

l 주나그네 목사
조 ㅣ 조병수 목사

 : 오늘 SDG 개혁신앙연구회 특별대담 인터뷰에서는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총장이신 조병수 목사님 뵙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 SDG 인터뷰 대담을 할 때마다 여쭙는 질문인데요. 목사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조: 우리 집은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어요. 신앙은 큰 누님부터 시작해서 형제들이 한 명, 두 명 가지기 시작 했고, 저도 가지게 되었죠. 서울교외에 살았는데, 동네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아주 일찍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내내 꾸준히 계단공과를 배웠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내가 봐도 상당히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성경이외에 신앙서적을 본 것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 교회에서 졸업 선물로 준 책이 처음이었어요.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신앙서적을 대하거나 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12월 마지막 주일날 선물로 받았는데 당시에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느라 그 책을 볼 시간이 없었어요.

: 무슨 책이었는데요?

조: 지금 기억에 ‘믿음의 여인들’인가 하는 제목의 책인데, 당시 우리 교회 중학교 부장 장로님이 그 책을 선물로 주셨어요. 항공사 기장 출신이셨는데 영어를 무척 잘하셨어요. 그래서 그 책을 직접 번역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셨어요. 중학교 입시가 끝나고는 일주일 동안 죽 읽었는데, 너무 감동스러웠어요. 그때 마음속에 ‘나도 언젠가 어른이 되면 이런 책 하나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그렇게 좋았어요. 그리고는 이제 중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녔으니깐 성경도 많이 배우고 신앙생활도 꾸준히 했죠. 특히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좋은 성경교사들을 많이 만나서 성경을 많이 배우고 그랬어요.

: 아주 바람직한 청소년 시기를 보내셨군요.(웃음)

조: 고등학교 때 약간 흐지부지한 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지만 전반적으로 신앙생황을 꾸준히 했던 것 같아요.

: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명도 청소년 시기에 가지셨나요?

조: 예. 목회에 대한 소명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졌어요.

: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조: 글쎄요. 우리 교회 고등부 부장 집사님이 학교 영어선생님이었어요. 그분이 주일 고등부 예배를 마치고 나면 고등부 임원들을 데리고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정도 성경공부를 시켰습니다. 일종의 특수 훈련이었죠. 영어를 워낙 잘하는 분이라 영어성경과 매튜 헨리 주석 원서를 읽었어요. 당시에는 번역이 안 됐을 때니깐.

: 고등부 학생을 대상으로 말이지요?

조: 예. 그것을 읽어주시기도 하고 번역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때 그 선생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우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것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미술학도가 되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중,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내내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미대 대신에 신학교를 가게 된 거죠.

: 그러셨군요. 미술에 관심을 가지셨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입니다.(웃음)

조: 미대에 갔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웃음)

: 지금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리세요.(웃음)

조: 지금도 그림에 대한 관심은 조금 남아있어요.

: 미대 대신 신학교를 가시겠다고 하니 주변분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조: 부모님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반대는 안 하셨어요.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의 집안이었죠.

: 신학을 공부하면서 잘 한 선택이라는 것을 느끼셨나요?

조: 그렇죠. 일단은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거니까요. 그런데 대학 들어가서는 신학보다는 역사에 관심이 더 많아졌어요. 물론 신학공부도 했죠.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한 덕에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바르트나 불트만을 읽기 시작했어요. 불트만은 워낙 독일어가 쉬운 독일어라 잘 읽혀졌고, 바르트는 조금 어려운 독일어라 쉽게 읽혀지진 않았어요. 이렇게 신학공부도 했지만, 당시 철학은 손봉호 박사가, 역사는 홍치모 교수가 강의를 했는데, 그분들이 워낙 진지하게 강의를 하시다 보니까 자연스레 신학과목보다 철학과 역사에 관심을 더 갖게 되었죠. 대학 3, 4학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 읽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역사와 철학이 부딪히는 르네상스 공부에 몰두하였어요.

: 그러한 관심이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봐야 할까요?

조: 그렇죠. 손 박사님과 홍 교수님하고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특히 홍 교수님은 종교개혁사 전공 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아주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셨어요. 본인 대학 동창들 가운데 르네상스를 공부한 교수들에게 저를 소개해 주시기도 하셔서 그분들을 직접 찾아가 공부도 해보고 그랬습니다. 아무튼 홍 교수님은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려면 르네상스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제 의견에 박수를 쳐 주셨어요. 홍 교수님의 격려가 르네상스를 공부하는데 굉장히 힘이 되었죠. 그래서 대학 다니는 동안 2, 3년은 르네상스 공부에만 몰두했던 것 같아요.

: 그래도 신학교 커리큘럼 안에서 전공과 조금 동떨어진 철학이나 역사를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조: 글쎄요. 그 당시 총신대학 분위기는 일반대학의 역사학과라도 그렇게 공부했을까 할 정도로 철학과 역사 공부에 관심이 지대했어요. 기독교 철학이나 역사학은 학생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죠. 화란어, 독일어를 잘 하는 학생들도 상당수였고요. 대표적으로 당시 김영규 박사는 라틴어도 잘 했어요. 같은 학번에서 뿐 아니라 학년 간에도 학문적으로 경쟁하는 분위기였어요. 우리 학번 동기 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30명 중에 절반이 넘을 정도였으니까요.

: 학문적, 지적 경쟁의 결과였네요.

조: 예, 당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상당한 도전을 주었어요. 어쩌면 그분들 편에서 학생들이 경쟁하는 것을 즐겼는지도 모릅니다.(웃음) 아무튼 그러다 보니까 학생들이 언어, 사상, 역사 등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대학 1학년 때, 벌써 원서로 그런 내용들을 읽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콜링우드, 헤겔의 역사철학 서적 등을 탐독했어요. 그러면서 더욱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전국대학생 논문 발표회에 작품을 내서 입상을 하기도 했죠. 신플라톤주의에 관한 논문이었어요.

: 말씀을 들어보니까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목사님의 대학 생활과 요즘 대학생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조: 70년대 후반의 사회적 분위기는 암울했어요. 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대학마다 연일 데모가 진행되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신학대학은 폭풍의 눈처럼 조용했죠. 다른 대학에서는 공부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지만 제가 다니던 (총신)대학은 오히려 공부를 더 많이 하는 분위기였어요. 규모도 작고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어서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만난 어느 교수님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교수 월급은 어느 대학에서 받고 가르치는 일은 총신에서 했다“고 말씀할 정도로 총신에서는 한번 제대로 공부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었죠. 학생들이 유별나게 교수들에게 달라붙어서 공부를 하고자 했으니까요. 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도서관을 거의 24시간 개방해 줄 정도로 배려가 많았어요.

: 그래도 한국 사회가 혼돈과 굴국의 역사적 정점에 있던 상황에서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궁금하군요.

조: 역사적 현장이 역사와 철학의 문제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 그런데 목사님의 전공은 신약학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학문적 관심들이 목사님의 전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흥미롭습니다.

조: 르네상스를 공부하다 보니 결국 이것은 고전에 대한 공부였고, 텍스트(문서)에 대한 공부였어요. 문서를 바라보는 관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인본주의자들이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을 살폈던 것처럼 우리는 그러한 것들과 함께 성경을 볼 수밖에 없잖아요. 그들은 고대 인문주의의 텍스트에 천착했다면 우리의 대상은 성경이었던 거죠. 인문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전어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어요. 칼빈같은 종교개혁자들도 고전어를 강조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리도 그 강조점을 받아들이게 된 거죠. 성경을 원전으로 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그래서 대학 다닐 때, 라틴어, 헬라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히브리어는 대학 과목에 없어서 신학부에서 도강을 해 기초를 닦았어요. 덕분에 대학졸업 할 즈음에는 어느 정도 고전어의 기초를 가지고 있었어요.

: 요즘도 학생들에게 이 부분을 강조하십니까?

조: 하지만 잘 안 듣죠. 공부를 안 하려고 해요.(웃음)

: 그렇습니까?(웃음)

목사님의 유학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독일로 유학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조: 첫째 이유는 독일신학과 직접 부딪혀보려는 마음에서였어요. 당시 영미권에서 나온 신학서적들은 대부분 독일신학과의 싸움이었어요. 성경신학이든지, 조직신학이든지 불트만이나 바르트와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으로 가서 번역된 자료를 볼 것 없이 직접 원전을 읽고, 직접 그 (독일 신학의 영향권에 있는)사람들과 의견을 나눠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둘째는 경제적인 이유였어요. 아무래도 영미권으로 유학을 가려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이 되었어요. 반면에 독일은 부담이 덜 됐어요. 독일은 학비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셋째 이유는 공부하는 분위기에 있어서 독일이 저의 취향에 맞았어요. 대개 영미권 신학교들은 커리큘럼 중심인데, 독일은 자기 연구 중심이었어요. 대학 다닐 때에도 그렇게 공부했으니까 독일식의 공부 방식이 저랑 잘 맞았어요. 내가 주제로 잡은 것을 깊이 공부할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독일이 저에게 맞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독일을 택했죠.

: 그래도 신학적으로는 적과의 대면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직접 가 보시니까 어떠셨어요?

조: 굉장히 힘들었죠. 우선 교수를 찾을 수 없었어요. 미리 알아둔 교수들이 있어서 편지를 보냈지만 다 다 거절당했어요.

: 이유가 뭐였죠?

조: 그들이 볼 때 내 신학이 너무 보수적이었어요. 내 입장에서는 이 분 정도면 동의해 주겠다 싶어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데리고 공부할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너무 보수적이니까.

: 안타까우셨겠습니다. 독일 신학이 학생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 주지 못할 만큼 학문적으로 그렇게 경직된 분위기였나요?

조: 그렇진 않아요. 그분들을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안 받아들인 거죠. 교수를 만나지 못한 3, 4년 동안 할 수 없이 고전어를 더 열심히 했죠. 그리고 내가 공부하고자 했던 분야의 책들을 많이 읽었죠. 그러다가, 85년에 유학을 갔는데, 89년에 비로소 지도교수를 만났어요. 그동안은 강의를 들으면서 논문 준비를 한 셈이었어요.

: 지도교수는 어느 정도 잘 맞으셨나요?

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전공한 분이셨어요. 신학적으로는 불트만보다 더 양식비평을 먼저 시도했던 디벨리우스의 계보에 속한 분이었어요. 디벨리우스의 제자의 제자셨죠. 엄격히 말하면,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면 빨갛죠. 빨간 자유주의자죠. 그런데 이 분을 만나게 된 동기가 있어요. 첫째로 표준 독일어를 구사해서 알아듣기가 쉬웠어요. 목소리도 아주 낭랑했고요. 언어 구사력은 굉장히 복잡해도 표준 독일이라서 잘 알아들을 수가 있었어요. 강의 때 노트를 거의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잘 들렸어요. 둘째로 한국 사람한테 호감을 갖고 계셨어요. 셋째로는 그분이 필 하우어, 디벨리우스의 제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적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랬잖아요? 기왕이면 분명한 오리지널을 만나고 싶었는데 잘 되었던 거죠. 마침 같은 대학 내에서 만날 수 있는 교수여서 멀리 갈 필요도 없었어요. 당시 저는 복음서와 세례요한 공부를 통해서 양식사를 비판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분도 내 연구과 자신의 관심사가 같은 분야여서 서로 좋았던 거죠. 첫 번째 헬라어 테스트에서 제가 합격점수를 받았어요. 그분이 볼 때 제가 헬라어를 잘한다고 느껴진 것이 호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그 당시 독일에서는 신학논문을 쓰면 절반이 배경사이고, 나머지 절반은 성경해석이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님은 배경사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학교에 있는 리텐베르거라는 분에게 저를 소개해 주었어요. 이분은 당시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마틴 헹엘이 총애하던 제자였어요. 이 분이 대학의 유대학 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는데, 교수님의 소개로 저를 맡아주었어요. 그때 이미 이분의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안면이 있어서 일이 쉽게 진행되었죠. 논문은 리텐베르거 교수가 상당히 만족할 만큼 진척이 빨랐어요. 배경사 공부는 한 일년 만에 마치고 성경본문으로 들어갔는데, 첫타임부터 부딪치기 시작했어요.(웃음) 결국 논문을 끝내는 날까지 싸워야 했어요. 한 2년 8개월 정도를요.

: 독일에서는 신학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조: 독일에서 신학은 학문이죠. 학문 자체입니다. 마치 플라톤의 텍스트를 비평하듯이, 성경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합니다. 왜냐하면 학문의 대상으로서 성경일 뿐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 교수라고해도 반드시 신자이거나 기독교 신앙을 가질 이유는 없어요. 그저 학문을 위한 일이니까요. 물론 개중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가문에서 자란 경건한 신앙인들도 있지만, 철학과 교수가 플라톤 연구한다고 플라톤을 숭배하지 않듯이 신학과 교수가 예수를 연구한다고 해서 예수를 경배할 필요는 없다고 보죠. 성경과 예수는 철저하게 학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니까요. 그냥 대학 신학이죠. ‘유니버서티 띠알라지’(University Theology)라고 부르죠.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신학과에 들어와서 비판적이 돼서 도리어 신앙을 망치는 경우가 있죠.

: 그런 일이 신학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 사람에게도 종종 나타나나요?

조: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보수주의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변하죠. 독일 신학에는 로직(logic)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빨려 들어가면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특히 과거에 감성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로직에 의해서 삼켜지면 거기서 못 벗어나죠. 한국에 있을 때 좋은 보수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 독일 신학을 만나서 그 로직에 함몰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습니다.

: 혹시 목사님에게는 그런 위험이나 위협은 없었나요?

조: 못 느꼈어요. 합신(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가리킴, 이하 합신으로 표기함)에 다닐 때, 이만열 교수님과 같이 공부하였어요. 당시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교수 해직 당해 일이 없던 중에 합신에 입학하셨어요. 입학동기로 3년간 같이 공부하였는데, 이분이 3년 정도 매달 100불씩 후원금을 보내 주셨어요. 당시로는 굉장히 큰돈이었지요. 그러면서 편지교환을 자주하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교수님에게 ‘나는 이미 독일신학에 의해서 세뇌 당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같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독일에 가기 전에 이미 독일 신학을 알고 있었고, 선생님들이 독일 신학을 잘 비판해 주어서 그 정체와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협이나 도전 같은 것은 없었어요.

: 독일에 유학을 떠나시기 전부터 독일 신학을 극복할 수 방안을 가지고 있었던 거군요.

조: 그런 셈이죠. 독일 신학에는 장점이 있어요. 로직이 강하다는 것과 자료가 많다는 점이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서를 관리하는 사람은 죽어도 고문서는 잃어버리지 않는다’라고 할 만큼 고문서를 잘 보관했어요. 이것은 공부하는 사람한테는 아주 큰 매력이죠. 다시 말해, 원 자료를 볼 수 있다거나, 무엇이든 논쟁을 해 볼 수 있고, 논쟁을 통해 내가 갖고 있는 실력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점은 독일 신학이 갖는 장점이죠. 그러한 점은 우리도 배우고 활용하면 좋은데, 문제는 신학이 너무 자유화되어 있어서 이제는 바뀌기가 어려워요. 또 신학에 있어서도 뭐랄까 허술함이나 문제점 같은 것들이 많이 발견되는데도 로직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이런 것들은 이제 동양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는 서양 사람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지요. 그래서 독일에 있을 때 논쟁을 많이 하게 되었죠. 선생님들과도요.

: 독일 유학을 다녀오신 이후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조: 사실 합신에 계신 교수님들은 제가 독일로 공부하러 간다고 했을 때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변질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셨고, 한편으로는 독일신학에 선한 것이 있겠느냐는 생각도 하신 것 같아요. 특히 대학교수님들은 아주 극렬하게 반대를 하셨죠. 선생님들은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제가 고집해서 독일로 갔어요. 그리고는 유학을 마쳤을 때, 학교로 들어왔으면 하고 바라셨는데, 여러 사정이 겹쳐서 들어오자마자 자의 반, 타의 반 목회를 하게 되었어요. 학교 강의는 그 다음 봄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죠.

: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담임 목회를 하셨다니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이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조: 제가 목회한 교회는 한국의 전통적인 장로교회였어요. 아마 이 목회 경험이 없었다면 탁상공론식 신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개척도 아니고 전통교회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한국교회 성도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뭐랄까 한국 교회의 체제적 문제는 무엇인지, 노회로부터 시작해서 총회 조직의 전반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신학을 보완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봐요. 사실 유학하는 동안 배운 신학은 굉장히 어려운 신학이었거든요. 배경사와 함께 해석학에 몰두해 있는 신학이었으니까요. 그런 신학을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성도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는 끝도 없이 낮아져야 하는 작업이 필요했죠. 독일에서 유학한 다음에 목회했을 때는 강의나 설교도 그렇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목회를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니까 아주 낮아진 설교와 성경공부를 해야 됐는데 그것이 오히려 저에게 발전을 가져온 것이죠. 우선 제 자신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도 됐고요. 일반 신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어요. 또 성경을 신학자의 시각이 아니라 목회자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어요. 저로서는 많은 소득이 있는 경험이었죠.

: 독일에서의 목회와 한국에서의 목회가 많이 달랐나 봅니다. 어떤 차이인지 좀 더 말씀해 주세요.

조: 독일교회는 이민자와 유학생 중심의 목회였어요. 좀 특수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목회였어요. 장로와 당회가 있고, 선교회나 전도회가 조직되어 있고, 주일학교도 있는 한 5,600명 정도의 신자들이 모인 교회였어요. 그것이 저에겐 충격이었죠. 보통 말하는 평범한 사람부터 특별한 사람까지 다 모여 있는 교회에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굉장히 새로웠죠.

: 그렇다면 목회에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나 시행착오도 있었을법한데요. 외국에 계신 동안 한국교회에 대한 상황 인식이 좀 덜 철저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조: 그렇죠. 이전에 한국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10년 동안 한국 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올림픽도 있었고 경제도 부흥했고요. 제가 떠날 때와 돌아왔을 때 상당한 변화가 있었어요. 목회도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담임목사로 처음 설교를 할 때, 나도 상대방도 깜짝 놀랐죠. 당시에 어느 분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로 마칠 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벽돌 하나가 빠져서 집이 무너지지는 것 같아서 마치 무슨 결투에 나간 사람이 칼을 움켜쥐고 있듯이 앉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설교를 했죠. 그런데 갈수록 깨달았어요. ‘아, 이런 설교는 아니다. 설교를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요. 이후에 신학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언어나 표현 방식에서는 아주 많이 달라졌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 자신과 교회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된 것은 물론이고, 성경을 보는 시각에도 굉장한 변화를 가져왔죠.

: 성경을 보는 시각이라, 어떤 의미이지요?

조: 저는 성경을 보면 먼저 배경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나오면 우선 그에 관한 자료를 많이 구하고 또 그와 비슷한 사건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를 찾아보려는 의지가 강했죠. 그것을 배경적으로 이해하는 거죠. 하지만 그러한 것을 설교 시간에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성도들에게는 필요가 없었죠. 그 충격을 받고 난 후에는 성경 본문이 신자들의 생활에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게 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어요. 신학자체의 변화는 없었지만 성경을 보는 시각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 거죠. 그래도 개인적으로 배경사 공부가 목회에 별로 써먹을 데가 없어도 계속했던 것 같아요.

: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목사님께서 어느 곳에서 언급하신 신학의 대중화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데…. 맞나요?

조: 그렇죠. 목회할 때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신학의 대중화라는 것은 근래에 개념화되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항상 생각 속에 ‘성경을 쉽게 가르쳐야 된다’는 인식이 계속 작용하고 있었어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글을 부탁하면 반드시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어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어찌하든지 ‘평신도들에게 쉽게 전달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에요. 최근 들어서 그 생각이 점점 개념화되면서 어떻게 신학을 대중화시킬 것인가가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화두예요. 제가 ’팝 띠알라지‘(Pop Theology)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런 맥락이에요. 실질적으로 구체화된 것들이 많진 않지만, 일단 일반 신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강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에요. 그래서 신문에도 글을 계속 쓰고 강연도 많이 하죠. 사경회같은 것도 부탁을 받으면 의지적으로 하려고 노력해요. 왜냐하면 내가 알지 못 하는 교회 신자들과 자꾸 만나서 그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성경이해와 또 신학을 쉽게 전달해야 되겠다 생각해서에요. 그 다음에는 방송에서 출연요청을 해도 되도록 나가려고 해요. 그런 미디어를 통해서도 내가 낮아져서 일반 신자들과 호흡할 수 있는 하나의 일환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 신학의 전문 분야를 연구하는 동시에 이것을 좀 더 쉽게 대중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시대를 사는 신학자로서의 고뇌인 것 같습니다.

조: 앞서 선도했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도 낮아지는 일을 했어요. 독일 신학자들을 보니까 어려운 책만 쓰는 게 아니라 신문에 기고도 하고 방송에도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아, 이게 신학자들이 일반 사회에 쉬운 말로 신학을 번역해주는 일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죠. 그때는 완전히 개념화되진 않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해 보고 싶었던 거죠.

: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Pop Theology라는 개념이 신학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나 더 여쭙자면,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나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한국교회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조: 오해하면 안 되는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대중화란 신학 자체가 낮아짐의 아니라 표현의 낮아짐을 의미해요. 신학자체가 낮아질 순 없어요.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낮아질 수가 있어요. 신학자와 목회자가 얼마만큼 표현하는 것을 낮출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노력해야 할 일이에요.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 개혁신학, 개혁파, 개혁주의를 말하는 분들은 아직도 너무 높아요. 너무 높고 현학적이에요.

: 표현에 있어서 말이지요?

조: 그렇죠. 가끔 책이나 인터넷상에서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사상은 좋은데 표현은 아주 서툴러요. 그것은 마치 밥을 차려 놓고 밥 차려 놓은 방을 열쇠로 잠그는 것과 같아요. 한 마디로 못 먹는 거죠. 음식에 비유하면 음식 값이 너무 비싸서 사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음식 값을 떨어드려야 돼요. 그렇다고 해서 음식의 맛을 떨어뜨리는 건 아니에요. 가능하면 말도 단문으로 쓰고, 언어도 개념화된 언어보다는 쉬운 표현을 쓰려고 노력해야 해요. 예를 들 수 있으면 많이 들어야 해요. 그런데 오늘날 개혁파, 개혁주의를 말하는 분들의 언어는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구경만 할 뿐 먹을 수 없어요. 그것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어요. 개혁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교회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게임이에요. 그들만의 논리 가운데 들어 있는 거지요. 다른 사람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려고 해서는 안돼요. 더 낮아져야 해요. 그러려면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 해요. 자신만을 위해 하이컬러티(high quality) 입맛을 추구하는 것을 자꾸 지적해 줘야 돼요.

: 신학 자체가 낮아져서는 안 되지만 신학에 대한 표현은 낮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매우 의미 있게 들리네요.

조: 기독교 역사상 낮아지려고 노력했던 유명한 신학자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어거스틴이 그랬어요. 그의 고백록은 낮아지려고 쓴 거예요. 자신이 가진 삼위일체, 예정론, 시간에 대한 개념들을 자신에 관한 삶에 관한 어떤 이야기로 풀어낸 거예요.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개념적으로는 지금도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데 그걸 초등학생들이 그냥 읽어요. 초등학생은 개념 없이 읽으니까 이해가 되고, 신학자인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로만 보지 않고 개념으로 이해하니까 은혜가 되는 거예요. 일종의 양수작전이지요. 누가 읽어도 도움이 돼요. 이렇게 고백록은 낮아짐의 한 표상이었어요.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마찬가지에요. 황제에게 헌정한 글이지만 그가 평신도였기 때문에 신학을 낮춰서 쓴 거예요. 초판은 그래요. 나중에 판을 거듭하면서 많은 개념이 추가되어서 좀 어려워지긴 하였지만 칼빈이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어 쓴 낮아짐의 표현이었어요. 또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도 일반 청년들을 위해서 쓴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너무 퇴보해서 어렵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 당시 청년들에게 쓴 책이에요. 어거스틴과 칼빈과 바빙크는 대중과 호흡하기 위해서 모두 낮아짐의 글을 썼어요. 그래서 그들의 신학이 우리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음식을 차려놓고 방을 열쇠로 잠그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거죠. 자신의 언어의 유희 속에 갇혀있어요. 내가 굉장히 신학을 잘 한다고 폼(모양새)을 잡으려 해요. 그것은 좋은 신학이 아니에요. 신학은 자신을 뽐내지 않아요.

: 신학은 사변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화된 내용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자와 목회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조: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오해를 가져요. 신학 자체가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학에 대한 표현이 쉬워지는 것인데 이것을 가벼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개그나 코미디처럼 성도를 웃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해예요.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가 쉬워진다는 말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심각한 수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반면에 신학자들은 쉬워지면 마치 신학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 가운데 있어요. 그것은 기독교를 수도원으로 몰고 가는 거 밖에 안 돼요. 세상과 만날 수가 없어요.

: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신학의 대중화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될 내용인 것 같습니다.

이제 화제를 좀 돌려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최근에 목사님에 관한 가장 큰 이슈 중의 하나라면 총장의 자리를 맡게 되신 일일텐데요. 이전에도 많은 인터뷰 하셨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바쁘시죠?

조: 네.

: 얼마 되지 않으셨지만 소회를 부탁드립니다.

조: 본래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무척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만나야 할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내가 좋아서 만나는 것과 일로 만나는 것은 좀 다른 것 같아요. 가끔 피곤할 때도 있어요. 시간 소모도 많고요. 읽고 싶은 책을 못보고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어렵다는 것도 병폐죠. 그러니까 저와의 싸움인거죠.

: 그래도 총장직을 맡으셨을 때는 목사님의 많은 생각들이 반영되었을 것 같은데요. 총장으로 재직하시는 동안 꼭 이루고 싶은 구체적인 소망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 둘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과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자는 학교 환경과 시설을 지금보다 좋게 하는 것입니다. 신도시 개발로 학교 택지가 잘려나간 부분도 있고 아직 정리가 안 된 부분도 있어요. 도로 정비와 조경도 필요해요. 학교 건물도 많이 낡았기 때문에 보수해야 하구요.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 등 시설 보수도 해야 해요. 이런 것들은 굉장히 시급한 일들이죠. 얼마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합니다.
또 제가 반드시 하려고 목적하는 것은 신학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한국교회가 기독교를 받아 들인지 한 1세기 이상 지났는데도 여전히 외국신학자들의 책에 의존해서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한국 학자들이 많아졌어요. 우리학교만 해도 발군의 실력을 가진 좋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자기 책을 써서 그 책으로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하고 싶어요. 이것은 제가 취임하면서 계속 강조하는 부분이고, 실제로 교과서 작성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제가 말하는 교과서란 말은 단지 참고서가 아니라, 최소한 10년, 2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신학 교과서예요. 신학분과마다 최소한 3개 정도 교과서를 만들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신약 파트를 말하면 신약총론은 제가 썼으니까 신약신학, 신약배경사, 신약역사와 관련된 책이 나와야 하겠지요. 이 작업은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이고요.
또 하나는 개혁교회의 교과서를 정리하는 일이예요. 16세기로부터 개혁교회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교과서들이 많아요. 대표적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불링거의 하나님의 언약과 같은 책은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과서이에요. 실제로 기독교 교회가 개혁파라는 용어로 시작된 후로 500년 동안 만들어낸 조직신학, 교회사, 또는 성경 주석의 빛나는 교과서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복원해 내는 일이죠. 그 가운데는 신앙고백서, 신학교육서, 주석과 논문, 그리고 역사서도 있어요. 그러한 자료들을 원본(original) 그대로, 그러니까 현대화된 문자가 아니라 그 시대 활자 그대로 편집해 내려 해요. 사상만 오리지널일 뿐만 아니라 품 자체가 오리지널로 가야 된다고 보는 거죠. 거기에 익숙해 져야 원본에 있는 문서들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이 되고, 그래야 그 다음으로 성경의 사본들을 판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교과서 작업의 목적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원본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자는 것이지요. 다시 정리하면, 교과서 작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직 교수들이 자기 시대를 책임질 수 있는 교과서를 써 내야 한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지난 500년 동안 유구한 역사적 산물로 우리에게 전해진 개혁파 교회의 교과서를 복원해 내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일의 목적은 원전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것은 제가 재임하는 동안 계속 강조하고 시행하려는 일입니다.

: 말씀만 들어도 기대가 됩니다. 재임 기간 동안 꼭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신 말씀을 들어 보니, 목사님께서 2010년도에 정암신학강좌에서 발표하신 ‘합신 신학의 재조명과 교회를 위한 합신 신학 선언문’이 기억납니다. 지금 말씀하신 구상이 선언문을 통해 발표된 내용과 많이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조: 그렇습니다. 그때 선언문을 통해서 합신 신학이 가야할 방향을 천명했었지요. 첫째는 원전(original)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였어요. 그것은 곧 고전어를 강조해야 한다는 의미이고요. 따라서 개혁파 교회가 사용했던 언어들, 즉 라틴어, 독일어, 불어 등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죠. 둘째는 통합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은 신약대로, 구약은 구약대로 가르치면 안돼요. 5,6 개의 학과가 통합되어서 함께 가는 신학을 구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학의 총체화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성경을 보면 조직신학과 교회사의 통합적 지식 기반 위에서 실천신학적으로 설교가 되는 선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국 신학생들이 공부할 양이 많아지겠죠? 공부는 적당히 하고 놀거나 운동 등으로 시간을 때우려 한다면 결코 할 수 없을 거예요. 24시간 공부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자기 체력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공부해야 해요.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고 생각될 만큼 말이죠.

: 박윤선 목사님도 신학생이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웃음)

조: 그렇다고 순교는 안 되고요.(웃음)

: 그런데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생깁니다. 목사님과 같은 강조를 한다면 과연 신학교에 올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대로라면 개혁신학을 잘 계승할만한 능력과 열정을 가진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와야 할 텐데, 우리가 직면한 교회현실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합신의 경우만 해도 신학교가 교단 직영도 아니고, 다른 교단에 속한 사람이라도 신학교에 들어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라면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는 현실적으로 좀 괴리가 있지 않을까요?

조: 아…. 오히려 지금보다 괴리감이 더 커야 됩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지원하는 사람이 줄어야 돼요.

: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만약에 목사님께서 총장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신입생들이 줄어든다면 주변에서 압박이 크지 않을까요?

조: 제 말은 신학교에 꼭 와야 할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에요. 신학교에 들어온다고 해도 못 견디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 못하면 처음부터 안 들어오는 게 낫습니다. 옛날에 박윤선 목사님도 졸업사은회 때, 내일이 졸업식인데 우리와 악수하시면서 “지금이라도 하지 않을 수 있으면 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것이 합신의 정신이죠. 입학지원율이 높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에요. 꼭 들어 올 사람이 들어와서 아까 말했듯이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공부해야 해요. 그래야 열명이라도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요.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공부하다가 죽는 것도 순교라는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와야 해요. 그래서 신학교에 가면 어렵다는 얘기를 들어서 ‘아, 나는 합신을 가지 말아야겠다’는 사람이 나와야 해요. 반대로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한번 해봐야겠다’는 사람만 오면 되는 거죠.

: 앞으로 신학 공부할 분들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입니다만, 아주 좋은 생각 같습니다.(웃음)

조: 저는 미안하지 않아요.(웃음)

: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 꽤 많은 신학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합신이 주목 받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 글쎄 정말 주목하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그냥 이야기하면, 학생 수가 좀 적고,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숙제를 많이 내고요. 학생들이 시위하지 않고 얌전하게 공부한다는 정도요. 그런 점들은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 목사님,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대신 질문을 부탁했어요. 좀 불편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합신 출신 목회자 중에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거니와 교회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장로교회와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목사와 교회가 있다는 것이지요. 신학교라면 한 신학 정신 위에서 가르쳐질 텐데, 왜 이렇게 다양하고 다른 목회자들이 배출될 수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하셨어요.

조: 그분은 역사를 잘 모르는 거죠. 종교개혁자 베자 밑에서 알미니우스가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얼마나 훌륭한 신학교였습니까? 그런데 알미니우스가 그 학교 출신이에요. 알미니우스로 인해 온 유럽 교회가 혼비백산할 만큼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도르트 총회가 열렸고요. 교육은 교육현장의 일이고 사역은 사역 현장의 일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육 한다고 해서 사람이 다 변하는 것도 아니에요. 학교는 학교의 기능을 최선을 다 할 뿐이지요. 90명의 학생이 들어오면 90개 색깔이 있는 거예요. 학생들이 다 하나의 색깔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예를 들어 베자 시대에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존 낙스와 올레비아누스와 알미니우스가 배웠어요. 알미니우스는 워낙 달랐다고 치더라도, 낙스와 올레비아누스는 똑같았을까요?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신학의 주역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주역이 되었지만 교회 정치 체제가 달랐어요. 같은 학교에서 배웠다고 해서 색깔이 다 같아질 순 없어요. 물론 큰 맥락에서는 같을 수 있죠. 하지만 그 큰 맥락 가운데서 다른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알미니우스처럼요. 그러니까 90명의 학생이 모두 한 가지 색깔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에요. 단지 색깔들이 큰 범위 내에서 다르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것이 역사 안에서 얻는 배움입니다.

: 이해하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니, 합신 역사와 관련하여 반성적 차원에서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합신 신학 선언문을 보면, “물론 합신이 걸어온 과정에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부족한 면이나 이탈된 면도 없지는 않고 또 그런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공포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어떤 점에서 이런 언급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목사님께서 보시기에 합신의 개혁주의 안에서 부족한 면이나 이탈된 면이란 어떤 부분인가요?

조: 우선 신학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개혁신학에는 아주 스위트한 점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개혁주의는 삼위일체론과 예정론을 바탕으로 한 성경해석이 나와야 해요.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의 직계(?)라고 하는 분들 중에도 삼위일체적 사고가 없고, 기독론이나 성령론쪽으로만 편향적으로 치중해 있는 분들도 있어요. 그뿐 아니라 교회론에 있어서도 아주 왜곡된 견해를 가졌거나 신비주의적 견해를 가졌거나 심각하게 세속화된 위치에 있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교단을 떠나거나 혼란케 하는 일들도 종종 발생합니다. 그것은 개혁파 신학을 주장하는 우리 교단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죠.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외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길도 있어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안 그럴 것인가? 장담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단지 누군가가 조금 그 선을 굵게 하거나, 구불구불한 정도가 조금 덜하게 하여 한동안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여전히 그런 현상들은 여전히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한 과거를 보았으니까 그러한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첨예한 신학과 엄격한 의미의 개혁주의를 강조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고, 개혁파 고전들을 더 많이 읽히고 교과서적인 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럼에도 완벽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따르지 않고 좋은 길을 열어 가면 좋겠다는 것이 선언문의 의미이죠. 그런 점에서 그 선언문은 굉장히 대중신학(Pop Theology)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요. 제가 최종적으로 정리를 했지만 너무 개념화 된 용어들을 많이 뺐고, 또 쉽게 풀어 쓰려고 노력했어요.

: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선언문 같습니다. 그런데 합신이 오롯이 외길로만 걸을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한다면,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견고함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배워서 교회에 적용하는 사람의 연약함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조: 음… 퍼센티지를 따지긴 어렵지만 가르치는 자에게 늘 문제가 더 있죠. 그것은 칼빈이나 불링거도 그렇게 생각했고, 어거스틴도 고백록의 첫 장에서 ‘나는 나에게 문제가 됐다’고 말했으니까, 자신이 스스로에게 문제가 아니었던 적은 없어요.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엄격하게 다스리려 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원죄를 의식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잠깐만 방심해도 원죄가 나타나요.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죠. 예를 들어 제 자신을 놓고 봐도 10년 전에 가르쳤을 때와 지금은 다르거든요. 발전해 가면서 과거에 가르쳤던 것 가운데 오류가 있던 것을 발견해 내게 돼요. 그런데 오류가 있었을 때 배웠던 학생들은 그 오류들을 갖고 나갈 수밖에 없어요. 가르치는 자가 오류를 좀 더 없애면 학생들도 오류를 덜 범하게 되는 거지요. 가르치는 자의 문제는 늘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배우는 사람도 문제를 안고 있어요. 자기의 인품이나 이해 수준, 자기가 받은 교육 상황 등이 교수에게서 듣고 배우는 것을 막고 있을 수 있어요. 자신의 정도가 작은 그릇이면 작게 받고, 큰 그릇이면 크게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교사에 의해서 배워도 수준 차이가 나는 거예요.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학생이 완전하지 못한 교수에게 배울 때 교육효과는 그만큼 반감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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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한 것을 꿈꾸기 보다는 보다 나은 것을 소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의미의 말씀 같습니다.

조: 예. 그렇죠.

: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볼 때, 교회와 신학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요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도 여러 종류의 다양성이 내포되어 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교와 교단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말씀해 주세요.

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관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가장 비켜나가는 것이 성경관이에요. 잘못된 성경관때문에 교리와 윤리가 망가지거든요. 성경에 대한 바른 권위와 그 권위에 대한 굴복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합신이 앞으로 계속 강조해야 할 것도 바로 성경관입니다. 성경에 바로 기초해 있지 않고 어떤 철학적 사유나 역사적 자료에 의해 동원된 설교는 결국 기독교를 더 파괴할 뿐입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합신이 지금까지 건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관에서 바른 위치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강조해야 하고, 계속 성경을 가르쳐야 돼요. 그리고 우리는 계속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교회가 꿈꿔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가야 될 일이라고 봅니다.

: 말씀하신대로 성경관은 신학의 주춧돌이지요. 그런 까닭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성경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목사님께서 강조하신대로 가장 좋은 원전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조: 성경관을 놓고 과거를 보면 원전으로 가는 것이고, 미래를 보면 교회 현장으로 가는 겁니다.

: 당분간 학교를 이끄셔야 하는데, 혹시 모델로 삼고 있는 학교가 있나요?

조: 현재는 없고요. 과거의 모델로는 제네바 아카데미죠.

: 학생들이 너무 어려워하지 않을까요?(웃음)

조: 제네바 아카데미는 시대의 산물이니까 그 시대의 물을 뺀 의미의 아카데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시대의 물을 빼면 우리도 적응할 수 있으니까요. 칼빈이 베자와 함께 제네바 아카데미를 만들었을 때, 사실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던 마틴 부처의 학교와 베른에 있던 오이콜람파디우스의 학교를 벤치마킹을 한 겁니다. 그리고 칼빈은 당시 중세 교회의 이분법화된 인문학 개념을 신학으로 통합시켜 버렸어요. 당시 문학, 의학, 법학 수학 등과 같은 인문학이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였어요. 그래서 신학생들에게 당시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와 같은 이들의 인문학적 자료들을 열심히 읽도록 하였어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완벽하게 주지는 않음에도 하나님의 지식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신학으로 가는 모든 길을 예비할 수 있도록 한 거죠. 수사학을 이용하여 말(웅변)을 잘 하도록 하교요. 사물의 판단을 위해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게 하였어요. 그것이 칼빈의 인문학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 들어온 학생들은 인문학적 배경이 없어요. 인문학은 무슨 마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에요. 신학생이라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해요. 제가 경험해 본 바, 역사철학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신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아주 큰 도움이 돼요. 확신컨대 합신이 더 좋은 학교가 되려면 언어학을 강조해야 돼요. 성경 언어뿐만 아니라, 현대어 중에서도 중요한 언어들을 가르쳐야 해요. 이것들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시키지 말아야 돼요. 미안한 말이지만. 몇 년 동안도 졸업시키지 말아야 돼요. 그리고 인문학 서적도 많이 읽혀야 해요. 성경이나 세계사에 나온 유명한 고전뿐만 아니라 공자, 맹자, 노자, 장자의 동양고전도 많이 읽어야 해요. 그래야 글을 잘 쓰고, 논리를 가질 수 있고, 성경을 잘 표현할 수 있어요. 오늘날 설교자들은 세 가지 큰 문제가 있어요. 첫째, 사상이 없어요. 대신 농담만 해요. 둘째, 논리도 부족해요. 그러니 재미만 추구하는 거예요. 셋째, 글을 쓸 줄 몰라요. 그러니 행동과 음악이 동원되는 거예요. 칼빈의 시각에서 보면, 다 망한 거예요. 합신이 그런 길을 가면 되겠어요? 과거를 본다면 제네바 아카데미의 이상을 가져 오는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신학교의 방향성에 대해서 깊은 고민이 묻어나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방향성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요즘 합신과 고신의 교단적 통합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인데, 교단의 방향성을 가늠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조: 형과 아우가 한 30년 동안 떨어져 있다가 이제 와서 같이 살려면 쉬운 게 아니죠. 형제가 다 자기 집에서 숟가락을 가져 왔는데, 형 숟가락은 금 숟가락이고 동생 숟가락은 은 숟가락이에요. 그럴 때 형과 동생이 자기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고 남의 숟가락만 가지고 싶어 한다면 어떻겠어요?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기 전까지는 한 집에서 살기 어려운 것이죠. 언젠가 세월이 지나서 서로의 숟가락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된 거예요. 합신과 고신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냥 한 지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죠. 하지만 내 숟가락, 네 숟가락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고 한 밥상에서 마주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그런 다음에야 통합의 길을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겠죠.

: 예, 보여주는 식의 어떤 제도적이거나 물리적인 통합만으로는 어렵다, 그러니까 내면적으로 하나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인내가 요구된다는 교훈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조: 때로는 형 집 따로 있고, 동생 집 따로 있는 게 좋을 수도 있죠. 왜냐하면 만약 우리 아버지 이름 갖고 장난치는 놈이 있으면, 형과 아우가 하나가 되어서 싸울 수 있잖아요. 그런 경우에는 둘이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할 수 있어요.(웃음)

: 재밌는 비유입니다.(웃음)

목사님의 인터뷰를 기대하는 분들 중에 목회자나 목회자 후보생이 많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추천해 주실 만한 신학자가 있다면요?

조: 저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까 존경한 분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어요. 살아있는데 존경할만한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고요. 대부분 과거 인물들이에요. 학자는 책이 스승이기 때문에 일생동안 살면서 우리가 만난 성경 교사들은 다 좋은 선생님들이지만, 오히려 책을 통해서 만난 분들이 저에겐 더 큰 스승들이죠. 그런 분들의 이름을 다 말하기는 어렵죠. 너무 많죠.

: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꼭 추천하고픈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 여쭙고 싶네요.

조: 저는 누구한테나 헤르만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Magnalia Dei)’을 꼭 읽으라고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보다 더 추천하고 싶어요. 기독교 강요의 체계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잘 안 맞아요. 좀 산만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로마 카톨릭 정신과의 싸움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까 좀 복잡하고 어렵기도 해요. 하지만 바빙크의 책은 정리가 잘 되어 있어요. 물론 바빙크도 쉽지 않아요. 내용(섹션)을 구분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읽는 이가 내용을 구분하여 나누면서 읽어야 해요. 아무튼 바빙크를 읽으라고 얘기하죠.

: 최근에 개혁주의에 대한 관심이 저변 확대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서 개혁신앙을 나누는 자발적인 모임도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조: 일단 개혁주의나 개혁파라는 개념에 있어서 범위가 너무 넓어요. 다 같이 개혁주의를 말하지만 개혁주의의 중심에 가까운 분들도 있고요. 먼 개혁주의를 말하는 분들도 많아요. 그러나 먼 개혁주의가 사람들에게 빨리 와 닿아요. 감정적으로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개혁주의는 아니에요. 개혁주의를 하려면 중심으로 들어 와야 해요. 하지만 중심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좀 복잡해요. 무조건 칼빈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보다 좀 더 과거적으로 가야 해요. 칼빈을 넘어선 과거로. 거기에는 루터도 있고, 그 옆에는 쯔빙글리도 있고, 또 그 옆에는 불링거도 있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아퀴나스도 있고, 더 가면 어거스틴도 있고, 성경이 있어요. 칼빈이라는 원통을 통해서 과거로 내려가지만 그 주변에 있는 다양한 신학자들을 만나야 해요. 루터와 불링거와 하이델베르크 신학자들과 화란의 신학자들과 스코틀랜드 신학자들과 토마스 아퀴나스와 어거스틴과 교부들을 알아야 해요. 개혁주의 중심에서 뻗은 원통에서 그들을 살펴야 해요. 그래야 개혁주의 중심으로 갈 수 있어요. 불행하게도 바빙크 직전에 개혁주의의 큰 유산은 끝났어요. 바빙크와 헤페 같은 이들이 이전의 개혁주의 역사를 정리해 주기는 했지만, 개혁주의의 큰 별들은 바빙크 이전에 다 지고 말았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변방의 신학자들을 얘기하고 있어요. 그것은 개혁주의 중심을 모르는 거예요. 원통으로 된 기둥이 기름을 찾아내듯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개혁주의 사상을 뽑아 올려야 해요.

: 말씀하신 개혁주의 중심을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제네바 아카데미 같은 곳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 그럼요. 제네바 아카데미가 있어야죠. 그런데 제네바 아카데미가 있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좋은 학자들이 있어야 해요. 칼빈은 이 일을 위해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걸하듯 자금을 모았어요. 좋은 학자들을 모으기 위해 시민들을 설득했어요. 그래서 엄청난 학자들이 모여들었죠. 그 결과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나 앞으로 그런 의미에서의 제네바 아카데미 없을 거예요. 왜냐면 우리 시대는 그런 일을 위해서 돈 내놓을 사람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위해 자신을 양보할 학자가 없어요. 주님 오실 때까지 없을 겁니다.

: 그렇다면 그 시대의 제네바 아카데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라고 보아야겠군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 더욱 특별한 의미로 남는 것 같습니다.

조: 그렇죠. 우리에게 하나의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죠.

: 그리고 또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조: 그렇죠.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역사의 지향점일 때는 이상이죠. 오늘날 우리가 조금 맛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시대에는 칼빈과 베자가 없다는 거예요. 물론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내신 특수한 사람들이니까 지금 없는 거죠. 그러나 이 시대에 그들과 버금과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칼빈과 베자는 없어요. 왜냐하면 시대가 칼빈과 베자를 안 만들어 주죠. 그러니까 없는 거죠. 불행하지만.

: 사람도 있고 환경도 맞아야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향점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조: 그런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 이루기는 힘들죠.

: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지적이십니다.

조: 우리 현실은 언제나 비극이에요. 그 가운데 남은 자처럼 주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것이 교회와 성도이지요.

: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요. 앞으로 목사로서 혹은 신학자로서의 개인적인 기대와 소망에 관한 일을 전해 듣고 싶습니다.

조: 우선 총장 역임동안 동안에도 제가 원하는 주제에 대해서 글은 쓰려고 합니다. 주경야독이 되겠지요.(웃음) 학생들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지평을 넓히려고 애쓰거든요. 아무튼 계속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려고 해요. 물론 천부적인 재능이 없거나 관심이 없어서 못하는 일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재능과 관심이 있는 일에 한해서는 탐구해 보려고 해요. 학교는 학교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잖아요. 현재로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다 할 수가 없지만, 과거에 준비해 놨던 글이나 발표하지 못한 글들을 좀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가고 있어요. 그것은 새로운 작업이 아니라서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방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강해 나가는 방식df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총장직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구상하고 있어요. 책을 쓰는 일 외에 아직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단계는 아닙니다만 앞서 이야기한 Pop Theology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 목사님에게 개혁신앙의 대중화라는 이슈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 예,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이슈에요.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신학자들에게 계속 강조해요. 일반 성도와 밥상을 나누듯이 말을 하고 글을 쓰라고 주문해요. 이것은 신학자들이 싸워야 할 싸움이고, 감당해야 할 사명이지요.

: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매우 유익하고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인터뷰를 나누는 분들도 같은 마음일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총장으로서의 공직뿐 아니라 목사님의 개인적인 사역을 통해서 나타날 많은 열매들이 기대됩니다. 많이 배우고 기도로 돕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조: 감사합니다.

2013.8.6.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총장실에서

※ 인터뷰 녹음 파일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 본 인터뷰의 권리는 SDG개혁신앙연구회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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