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순길 목사 인터뷰

 

ㅣ 주나그네 목사
허 ㅣ 허순길 목사

: 오늘은 우리 SDG개혁신앙연구회 특별 인터뷰 대담 시간으로 허순길 목사님을 뵙는 기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허 목사님은 한국 개혁교회의 원로로서 그동안 한국 교회에 개혁신앙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오늘 귀한 목사님과 뵙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건강하시죠?

허: 예. 멀리 이렇게 오셔서 감사합니다.

: 멀긴 멀었습니다.(웃음) 김해가 이렇게 먼 곳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인터뷰 요청 연락을 드릴 때만 해도 고려신학대학원이 있는 천안에서 한번 뵐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직접 사시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네요. 고신대학원을 떠나신 지가 얼마나 되었지요?

허: 벌써 14년 되네요.

: 그러세요?

허: 고맙게도 그 학교에서 제 이름으로 된 연구실을 지금도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같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래를 하였는데 지금은 다니기도 어렵고해서 특별히 일이 없으면 안 찾아갑니다.

: 덕분에 댁에서 뵙게 되니 마음이 편합니다. 여러 가지 여쭙고 싶고요. 목사님과 나눈 말씀을 다른 분들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목사님께서 신앙생활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개혁신앙에 입문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허: 저희 가정은 완고한 유교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다음 해인, 1946년도 봄에 이웃에 사는 한 경건한 할머니의 소개로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시기 시작하셨어요. 당시 저는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일본 시대 교육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막내둥이인 저에게 교회에 나가 보니 사람이 바르게 살아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처음엔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 땐 여름성경학교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도 참석하면서 교회 다니는 일에 취미가 붙었어요. 차츰차츰 신앙이 귀중하단 걸 알게 된 거죠. 그렇게 해서 인자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 유교 집안이라고 하셨는데 어려움은 없으셨어요?

허: 아버지가 2대 독자이신데다 강한 유교 집안이다 보니 제사가 좀 많았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제사 때문에 아버지와 상당한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나중에는 어머니가 이겼죠. 그 덕분에 제가 신앙생활을 좀 편하게 하게 됐죠.

: 대단한 어머니셨네요(웃음). 잠깐 목사님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목사님의 유년 시절과 청소년, 청년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운 때를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어요?

허: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서북지방에 있는 함양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산골인 지곡면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때는 일제시대였지요. 지금 사람들은 아마 잘 이해 못할 겁니다. 그 어려움이라는 거. 가난이라는 거. 모든 걸 일본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죠. 우리는 정말 초근목피로 살았어요. 그러다가 해방이 돼서 딴 세상을 맞이하는가 싶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6·25가 발발했어요. 참 비참한 모양을 많이 봤어요. 그때 겪은 어려움이란 다 얘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 그런 어려움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습니까?

허: 중학교 3학년 때면 보통 진로를 생각하잖아요. 당시에는 보통고시, 고등고시라는게 있었고 그걸 공부하기 위해 강의록이 있었어요. ‘내가 이걸 공부해서 고시를 해야 하겠구나.’ 생각하고는 강의록을 사서 열심히 읽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고시를 봐서 ‘법대를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공부했죠. 그렇게 공부를 해 오다가 고등학교 2학년쯤에 생각이 변하게 되었어요. 일제시대와 6·25 사변을 겪으면서 값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제가 살던 산골 마을 교회에 부임해 오신 한 목사님을 만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51년도에 지곡면에 개평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박태순 목사님이라는 분이 고신대를 졸업하고 바로 이곳으로 오셨어요. 처음에는 전도사로 오셨죠. 그분의 진지한 설교와 경건한 생활에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정말 목자다운 분이셨어요. 그분을 보면서 ‘내가 법을 공부해 가지고 정말 내가 평생동안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 ‘나도 저 분처럼 평생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진로가 바뀌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는 신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 제가 다니던 함양고등학교 주변에 고신파 교회가 하나 생겼어요. 당시 총회파로부터 나온 교회였는데, 이 곳에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어요. 우리집에서 함양읍까지 20리가 넘어서 다니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아시고 그분이 저에게 본인 집에 와서 지내면서 교회를 좀 도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 3학년 때 전도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주일학교를 인도하게 되었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54년도에 신학교 예과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 박태순 목사님과 또 다른 한 분 전도사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신 거군요.

허: 그분은 임명섭 목사님이신데, 그분도 박태순 목사님과 같이 졸업을 하신 분이예요. 지금은 두 분 다 작고하셨어요.

: 두 분이 모두 고려신학교를 나오신 분들이다 보니, 목사님도 자연스럽게 같은 학교에 들어가게 되셨군요.

허: 그렇죠. 그때 거창, 함양, 합천 지역에는 주남선 목사님의 영향이 강했어요. 일제때 옥고도 치르시고 고려신학교 설립자 중 한 분이시기도 한데, 이분이 거창교회에 계셨거든요. ‘죽도록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주 목사님의 가르침이 그 지역 교회들에 아주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게 또 많은 영향을 주었죠.

: 목사님의 어린 시절을 짧게 말씀하셨지만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학 공부 과정은 어떠하셨는지 좀 이야기 해 주세요.

허: 예. 제가 고려신학교 예과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1년제였어요. 그런데 다음 해에 신학교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해서 4년제 대학이 되었어요. 그때 학교 이름이 칼빈 학원이었어요. 지금 고신대의 전신이죠. 그렇게 이 학원에서 4년간 예과 과정을 밟은 후에 신학교에 올라가게 됐죠.

: 목사님의 신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 박윤선 목사님과의 만남을 빠트릴 수 없는데, 칼빈 학원에서 처음 만나셨던 건가요?

허: 예과에 있을 때 박 목사님(허 목사님은 박 목사님을 가리켜 박 교장님이라는 호칭을 혼용하여 사용하심)과 함께 늘 채플에 참석하였지만 개인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어요. 예과는 신학 준비 과목을 공부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제가 대학교 4학년 때에 경제적으로 좀 어려운 일이 있었어요. 저희 형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를 도와줄 형편이 안 되어지고 하니까 학교를 어떻게 졸업할까 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 박 목사님 댁에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의 가정교사를 구하였어요. 처음에는 그 소식을 몰랐죠. 그런데 박 목사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가정교사로 좋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제가 추천을 받게 되었어요.

: 본인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요?(웃음)

허: 예. 얼마 후에 박 교장님이 부르셔서 찾아갔죠. 그 때가 4학년 둘째 학기인데 저를 보시고는 “앞으로 낮엔 집에 와서 지내면서 딸의 공부를 좀 가르쳐 주고, 밤에는 교장실에 침대가 있으니 거기서 지내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저로선 굉장히 좋은 기회를 얻은 거죠. 그래서 박 목사님과 가까이에서 지내게 되었죠. 전에는 좀 뻘줌한 사이였는데 이제는 가족처럼 지내게 된 거예요. 다음 해에, 박 목사님이 딸이 중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박 목사님이 계속 곁에 있으면서 비서로 일을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러는 바람에 신학교 3년 동안 낮에는 강의를 듣고, 남은 시간에는 박 목사님 일을 도와 드리고, 저녁에는 교장실에서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 주로 박 목사님의 어떤 일을 도우시게 되었나요?

허: 당시 박 목사님께서 성경 주석을 쓰고 계셨는데,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주석이었어요. 그 주석들은 거의 제 손을 거쳐서 나왔어요. 그 때는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쓴 다음에 인쇄소에서 전부 활자를 박았아요.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가 복사해서 다시 교정을 봐야 했어요. 교정만 네 다섯 번 본 후에야 인쇄를 할 수 있었죠. 그러니까 굉장히 일이 많았어요. 여간해선 책을 내기 힘든 시절이었죠. 특히 돈 없는 사람은 말이에요. 누군가 배후에서 자금을 대어줘야 책을 낼 수 있었어요.

: 박윤선 목사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 자연스럽게 3년 동안 박윤선 목사님 곁에 계시면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셨겠죠?

허: 그렇죠. 제가 참 많은 영향을 받게 된 분이 박윤선 목사님이죠.
혹시 박윤선 목사님을 뵈었습니까?

: 아니요. 88년도에 작고하셨으니까요. 저는 90년 중반에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허: 제가 생각하기에는 과장이 아니라 박 목사님은 한국에 있어서 가장 깊은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봅니다. 사실 그 자신은 개혁교회의 내부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화란에 가서 공부를 하셨거든요. 1953년도에 박사학위를 목표로 가셨는데 갑작스레 부인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한 반년밖에 못 계시다 돌아왔죠. 짧은 기간이었지만 박 목사님에게는 아주 커다란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박 목사님의 자서전을 보면 그 때 화란에 가서 연구를 안 했더라면 많이 부족하였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 불과 몇 개월밖에 안 되었는데도 말인가요?

허: 예. 박 목사님은 한국에서는 화란어를 제일 처음에 숙달한 분일 거예요. 1930년대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갔을 때, 메이천(J. Gresham Machen) 박사에게서 사사를 받고, 그 다음에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박사에게서 배웠는데 이분이 화란 사람입니다. 신약은 메이천에게서, 변증학은 반틸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 칼빈주의 3대 학자로 불린 분들이 B.B. 워필드(B. B. Warfield),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세 사람인데 ‘바른 개혁신학을 알려면 아무래도 이분들 책을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시고는 독학으로 그분들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 독일에 가서 독일어도 마스터했고요. 그러니까 일어, 한문, 화란어, 독일어까지 다 석권을 했던 거죠. 이렇게 박 목사님은 처음으로 화란 신학을 알고 매력을 느끼고 한국 교회에 소개한 분입니다.

: 그러니까 박 목사님을 통해서 목사님께서도 화란 신학에 영향을 받게 되신 거군요.

허: 그럼요. 그때 바빙크나 카이퍼 책이나 화란 성경 주석이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었거든요. 그것들을 즐겨 보다 보니까 우리도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죠. 정말 개혁신학을 알려면 화란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언어에 관심도 가지고 그런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 화란에 유학을 가시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군요.

허: 예. 동경을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서 가게 됐죠.

: 화란 유학을 결정하시던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연구 주제나 관심사를 포함해서요.

DSC01453.JPG

허: 박윤선 목사님은 저를 보고 허선생이라고 불렀죠. “허선생. 주경신학자가 돼.”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 박 목사님의 대를 이으라는 말씀이셨군요(웃음).

허: 한때 그런 생각도 있었지만 그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우선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유학을 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대구에 있는 서문교회에 전도사로 가서 강도사와 군목사를 거쳐 담임 목사가 되었어요. 그때 생각으로는 ‘목회에 충실해야겠다. 외국에 갈 것 없이 한국에서 학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당시 계명대학교 교육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한 후에 경북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다녔어요. 그러는 중에 유학 길이 열렸어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근삼 박사라고 있어요. 지금은 작고하셨는데. 그분이 50년 초반에 미국을 거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아마 한국 사람으로는 첫 번째 화란 유학생이었을 거예요.

: 이근삼 목사님도 훌륭한 개혁신학자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허: 그렇죠. 이 목사님이 50년대 후반에 거기 가서 한 10년 동안 공부했어요. 그분이 화란에서 지내는 가운데 우리에게 31조파라고 알려진 화란 개혁교회의 어느 목사님과 교제를 하였어요. 그렇게 교제하는 가운데 자신이 속해 있는 고신파와 화란 개혁교회의 공통점을 발견해 냅니다. 그 교파는 1944년도에 총회 교권에 의해서 단죄당한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1951년에 고신도 총회 교권에 의해서 축출당했거든요. 그리고 화란은 세계2차 대전 당시였고 한국도 전쟁중이었어요. 그런 중에도 양 교단이 다같이 개혁신학을 강조하는 것이 특이하고 유사하다고 해서 이근삼 목사님이 캄펜에 있는 31조파 교단 신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좀 받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모색해 달라는 부탁을 했어요. 결국 그 일은 이 목사님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성사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대구에서 목회를 있을 때, 이근삼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지금 화란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떤 교회가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갈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그 연락으로 제 마음이 바뀌게 되었지요. 그래 가지고 1966년에 화란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겁니다.

: 이근삼 목사님의 역할이 크셨군요.

허: 네. 저를 잘 아시는 분이라서…

: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다른 나라도 아니고 화란에 유학을 간다는 건 상당히 어려웠던 시대가 아닙니까?

허: 어려웠죠. 그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아주 가난했죠. 일반인이 외국에 나가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외국에서 비행기 값에다가 생활보장까지 후원해 주어야 내보내 주었어요. 더구나 당시에는 6·25 사변 이후라 외국에 나가는 사람은 친척이나 주변 사람이 공산주의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확실한 신분보장이 되어야만 여권을 신청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해외에 나갈 엄두조차 못냈죠. 신원조회에만 한 3개월에서 6개월가량 걸렸어요.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는 비행기도 없었고, 김포비행장이라고 있었지만 그건 군용으로 사용했어요. 군용 비행기나 미국, 일본 비행기만 떴었죠.

: 그렇습니까? 지금에 와서는 참 생각하기 쉽지 않은 시대 같습니다. 그럼 화란에 가셔서 바로 캄펜 신학교로 가신 건가요?

허: 아니요. 화란 북쪽에 있는 흐로닝엔(Groningenen)이라는 도시를 찾았어요. 왜냐하면 저를 후원해 줄 교회가 그곳에 있었거든요.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당시에는 화란개혁교회가 대교회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한 지역에 여러 교회가 있어도 당회는 하나였어요. 저를 후원해 준 그 교회도 굉장히 대교회였죠. 삼천명에서 삼천오백명 정도 모인 교회였는데 교회당이 여러개였고 목사는 네 사람이 있었어요. 우선 그곳에서 어학을 익히고 일년 후에 캄펜 신학교로 갔죠.

: 캄펜 신학교에서는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

허: 그때 요청받은 게 교회사였어요. 캄펜 신학교에 캄파이스(J. Kamphuis)라는 교수님이 있었는데 교회를 굉장히 사랑하는 분이었어요. 당시 화란 개혁교회에 ‘레포르마치(Reformatie)라는 잡지에 항상 글을 쓰면서 교회에 주도적인 영향을 끼치는 분이었죠. 이분이 저에게 ’교회사를 전공하면 좋겠다.’고 해서 교회사를 하게 되었어요.

: 그러셨군요. 화란에서는 몇 년간 유학 생활을 하셨는지요? 가족도 함께 하셨나요?

허: 66년에 들어가서 독트란두스(Drs.) 학위를 69년도에 마쳤어요. 한 3년만이죠? 그런데 가족을 데려갈 수 없었어요. 그때 우리 아이가 넷이었는데, 아내가 한국에 남아서 고생을 많이 하였지요. 그리고 당시 화란에서는 석사 학위 과정을 마치고 나면 주임교수가 박사학위를 계속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데 만약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집(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해요.(웃음) 그런데 다행히 나의 석사학위 논문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마침내 박사 공부 과정이 허락되자, 후원교회에서 한국 집에 다녀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어요. 덕분에 한 4, 5개월 동안 한국에 나와서 지내게 되었어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71년도 봄에 다시 화란으로 돌아갔죠. 그런데 화란으로 바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가는 길에 한달 동안 캐나다를 방문하였어요. 온타리오주 해밀톤(Hamilton)이란 도시에 ‘캐나디안 개혁교회‘(CANRC(Canadia Reformed Churches) 신학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장 사역을 하던 분이 내 친구였어요. 나보다 바로 앞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었어요. 그분과 교제를 하면서 온타리오 뿐만 아니라 밴쿠버 등지에 있는 개혁교회들을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논문 자료를 좀 더 구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갔죠. 그때 웨스트민스터에 반틸, 폴 울리(Paul Woolley) 교수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6개월 동안 있으면서 논문 자료를 수집했어요. 그리고 화란으로 돌아가서 71년도에 박사 논문을 끝냈죠.

: 혹시 박사 논문 주제나 제목을 여쭤봐도 됩니까?

허: 그것은 교회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직분론에 관한 내용이었어요.유럽에서는 교회법이나 교회 직분론은 교회사를 아는 사람이 다루지요. 왜냐하면 교회 직분이라는 것이 역사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죠. 제가 화란에 갔을 때,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이 교회 직분에 대한 것이었어요. 저를 후원하던 교회에 한달 정도 있으니까 교회에서 당회에 참석해 보라고 권하더군요. 이 교회는 미국인 동사(同事) 목사님까지 포함해서 세 분의 목사가 있었고 당회는 한 백명쯤 모였는데 이 세 분 목사님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한국 같으면 담임목사, 부목사 하는데 화란 개혁교회는 어딜 가도 그런 제도가 없어요. 세 분 목사가 늘 돌아가면서 사회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당회에 참여하니까 저도 목사라고 그분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한 달 후쯤에 교회 장로들이 저를 심방하기를 원한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때 교인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목사가 아니고 장로 두 분이 심방을 와서 제형편과 어려움 등을 묻고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가는 거예요. 제가 그 일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한국에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화란 친구 목사가 목사의 동등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것을 좀 알아야겠다고 해서 좀 더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죠.

: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직분론을 학위 논문 주제로 잡게 되셨군요.

허: 사실 저의 관심사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관련 책들을 탐독하면서 19세기 중반에 미국 장로교회 안에서 직분론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미국 북부의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와 남부의 유니온 신학교의 제임스 헨리 손웰(James Henley Thornwell)이라는 두 거두(巨頭) 간에 목사 직분관에 대해서 뜨거운 논쟁이 있었어요. 그 내용이 프린스턴 저널(Presbyterian Review)에 연재되었죠.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회의 전통을 가져 온 것이니까 이것을 살펴서 화란 개혁교회와 어떤 연관성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칼빈의 직분관도 연구하고, 이렇게 개혁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 논문은 장로에 관한 것이었어요. 이걸 가지고 박사 논문을 쓰게 됐죠.

: 말씀을 들어 보니 아마도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직분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분이 아닌가 싶은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장로교회와 화란 개혁교회의 직분론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허: 글쎄요. 사실은 원리적으로 같다고 봐야죠. 우리가 알다시피, 1541년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 질서를 말하면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네 직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원리적으로 출발한 것 밖에 없거든요.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로마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한 혐오감이라든가 반동이 컸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이며 왕이신 주님 이외에 다른 교권도 지배할 수 없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였죠. 그래서 개혁교회의 핵심 되는 교회법의 원리가 무엇인고 하니,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지배할 수 없으며 어느 직분도 다른 직분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헌법 1조에 있어요. 지금은 이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이 원리가 교회 질서의 바탕에 깔려 있어요. 하지만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약간 달라졌죠. 예를 들어, 아까 말한 쏜웰과 논쟁을 주도하였던 찰스 핫지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50년 동안 교수로 있었거든요. 그런 분이다 보니 미국 교회에 굉장한 영향력을 끼쳤어요. 그런데 찰스 핫지는 장로교회를 교구감독체제(parochial episcopacy)로 보았어요. 말하자면 지역교회의 목사를 감독으로 봄으로써 목사의 위상을 높이는 대신 다스리는 장로의 위상을 낮게 본거죠. 당시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그의 영향력을 거의 절대적이었어요. 나중에 한국 선교 초기에 파송된 미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쏜웰은 핫지의 견해에 반대하여 ’목사와 장로는 평등하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감독과 장로는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였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쏜웰의 주장이 유럽 개혁교회와 가깝죠. 이런 면에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를 비교하여 보았던 겁니다.

: 그렇다면 찰스 핫지의 직분론이 한국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말씀인가요?

허: 그렇죠. 한국 선교 초기에 미국에서 온 선교사 중에는 남북 장로교 출신이 다 있었지만, 북장로교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거든요.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한 분들도 90%가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분들의 영향이 한국 장로교회에 그대로 정착을 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죠.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내적으로 교권적인 체제가 이루어진 채 오늘날까지 교회문화의 형태로 정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아스핀월 핫지(J. Aspinwll Hodge)가 쓰고 곽안련(C. Allen Clark) 선교사가 번역한 ‘교회정치조례문답’(Whar is Presbyterial Law?)이라는 책이 한국 초기 장로교회 헌법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 핫지는 치리장로는 교인의 대표자로서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직분으로 설명하고 있던데요. 이 부분도 지적하신 북장로교회의 직분론 성격이 잘 드러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허: 예. ‘교인의 대표’라는 말은 원래 미국 교회 헌법과 정치에는 안 나옵니다. 미국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미국적인 민주주의 개념이 반영된 단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적 의미에서 교인의 대표라는 것이 우리나라 들어와서 그대로 반영된 것이에요. 우리 헌법에 보면 ‘장로는 두 종류가 있는데, 목사와 교회의 대표인 장로니라.’ 이래 해 놨거든요. 그게 아주 잘못 된 거죠. 어떤 면에서 목사와 장로를 대립적인 관계로 세워 놔 버린 거에요. 목사는 공인이고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서 있는 체제로 정착시켜 놓았어요.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에요.

: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선교 단계부터 교회 정치와 직분론에 있어서 단추를 조금 잘못 끼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허: 그렇죠. 그것이 한국에 완전히 자리를 잡아 버렸거든요. 그래서 인자 오늘날까지 달리 어떻게 고칠 수 없는 형태로 정착이 되어 버렸죠. 화란에서 교회를 직접 경험하고 논문을 쓰면서 ‘내가 그동안 생각하지 못한 세계다.’ 하는 걸 생각했고, 그것을 연구하면서 ‘이것이 성경적이다.’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거죠. 그러나 저도 박사 논문을 쓰기 전까지는 화란에 있으면서도 피상적으로 알았어요.

: 어떤 면에서요?

허: 실제로 교회 속으로 들어가서 그와 같은 행정을 제대로 운용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실제로 목회를 하게 되면서 그 심층 세계를 체험하고 배우게 되었죠. 이후에 10년 동안 한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였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이것이 교회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 우리 현실 교회를 볼 때 참 안타깝고 미안한 말입니다만.

: 호주개혁교회에서 목회하신 경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허: 예.

: 화란에서 유학을 마치신 과정까지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호주에 가셔서 목회를 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허: 72년에 화란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일을 했거든요. 그런데 76년에 호주에 있는 자유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에서 초청이 왔어요. 처음에는 한번 다녀가라는 것이었어요. 이 교회를 이룬 분들은 50년대에 화란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캐나다와 호주 같은 새로운 세계로 떠나 온 개혁교회 성도들이었어요. 화란에서 떠나왔지만은 한국사람과는 좀 달랐아요. 한국 사람은 이민을 가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이분들은 다른 나라에 와서도 본국에서 가졌던 교회 생활이나 신앙 전통을 상실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어요. 이민을 해도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잘 지킬 수 있는 곳으로 가요. 내가 그 교회를 방문할 때가 78년도였으니까 이분들이 화란에서 떠나온 지 2, 30년이 됐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화란에서 발간하는 교회 일간지를 구독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멀리 떠나 있어도 자국 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흐름이 어떠한가를 훤히 꿰고 있었어요. 그 신문을 통해서 내가 화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알게 되었어요.그러면서 나름대로 ‘이 사람은 정말 개혁교회 목사다.’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호주에 있는 그 교회에서 나에게 자신의 교회를 한번 방문해 달라고 초청한 거예요. 76년도 여름에 가서 몇 달 간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그 교회에서 나를 목사로 부르는 청빙서가 날아왔어요.

: 한국에 귀국하시자마자요?(웃음)

허: 예. 사실 그곳에 있으면서 눈치를 좀 챘어요. 퍼스(Perth)라는 곳에 있는 교회에서 나를 청빙하였는데, 그 교회엔 20년 동안 목회하시던 목사님이 계셨어요. 제가 호주에 있는 동안 그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주일 설교도 하고 화란 노인분들이 한달에 한번 모이는 모임에 가서 화란어 설교도 했는데 이 사람들이 저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나봐요. 내가 거기를 떠나올 즈음에 그 목사님이 “교회가 너무 커서 둘로 나누려 하는데 당신이 나와 함께 동역하면 어떻겠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 내가 웃으면서 ”생각은 고맙지만 교수로 있는 사람이 할 수 있겠느냐. 생각만은 고맙다.“며 답했지요. 그리고 돌아왔는데, 그 교회에서 공동의회를 해서 나에 대한 목사 청빙건이 통과되었다고 하면서 공식 편지가 온 거에요. 뭐 참 놀랬죠. 하지만 당장 그 사실을 학교에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어요.당시에는 신학대학원도 별로 없는데다 유학파 교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우리 신학교 경우에는 이근삼 목사님이 돌아오신 후에 10년 만에 제가 온 거라 학교 이사들이 찾아와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일 년 간 고민했어요. 그 교회에서는 결정이 끝났으니 4개월 안에 제가 답장을 해줘야 했었는데 그럴만한 형편이 안 되어서 호주 교회 당회에 몇 달 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였죠. 결국 ‘여러 가지 형편상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가 보다. 정말 가서 개혁교회 목사직을 배운 후에 한국에 나와서 목회를 해 봐야겠다. 개혁주의적인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용단을 내렸어요.

: 한국에 다시 오실 생각을 가지고 나가신 거군요.

허: 그렇죠. 처음부터 거기에 그대로 주저않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한국에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그곳에서 10년간 지냈죠. 호주에 들어가서 2년간 있다가 교회와 교구를 완전히 나눴어요. 지역에 따라 이쪽에는 이 교회, 저쪽에는 저 교회로 구분했어요. 천명 교인 중에 반반씩 나누어서 우리는 새 건물을 지어서 나왔어요. 그렇게 10년 동안 호주개혁교회에서 목회하다가 학교측에서 교수로 꼭 와야 되겠다고 해서 87년도에 고신대로 다시 돌아 왔어요.

: 10년이면 상당히 긴 시간인데요. 그곳에서 어떻게 목회하셨는지 궁금하네요.

허: 제 동역자인 목사에게서 많은 도움을 얻었어요. 예를 들면 목사 취임을 하고 당회를 모였는데 첫 번째 의제가 당회 사회권을 몇 달마다 바꾸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겁이 나더라고요. 또 화란어는 좀 쓰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라 부담이 컸어요. 그래서 동역자인 목사님에게 6개월 동안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곳 생활에 정착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6개월 후부터는 매월 서로 바꿔서 진행했죠. 그렇게 그 교회에서 2년간 지내다가 말씀드린대로 완전히 교회 분립을 하게 되었죠.

: 호주개혁교회를 10년간 목회하시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오셔서 교회들을 보신 느낌이 어떠하셨나요?

허: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서 제가 경험한 것들을 정리해서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이라는 조그만 책자를 내었어요. 한국에 와서 그 내용들을 신문에 연재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봤어요. 그리고는 총회 출판부에서 제안이 들어와 책을 냈죠. 그런데 그 책이 지금까지 상당히 많이 보급 됐다고 해요.

: 저도 읽었습니다. 오늘 제가 목사님을 뵈러 오면서 ‘개혁해 가는 교회’라는 책을 읽으면서 왔는데, 이 책도 호주에서의 목회 경험이 많이 녹아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 예. 한국에 돌아와서 개혁교회와 관련하여 쓴 글들을 모아서 발행한 것이지요.

: 많은 분들이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개혁교회를 경험하는 좋은 유익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한국에 교수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았을 때, 한국 교회를 향한 굉장히 큰 사명감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허: 나로서는 사명감을 가지고 왔죠. 사실 한국에는 한국적인 교회 문화가 완전히 정착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 상황에서 서구의 개혁교회와 똑같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까진 개혁을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신학대학원 원장을 맡으면서 교회체제 문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공감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학생들은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신학교를 다니지, 정말로 어떤 ‘내가 이런 사명을 가지고 교회를 섬겨야겠다.’는 의식이 희박했어요. 신학교 안에서는 내가 기대하는 반응을 보이다가도 학교를 나서면 실질적인 환경에 그만 다 휩싸여 버려요. 하지만 그 중에도 얼마는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힘쓰는 분들도 상당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감사하죠. 지금도 그런 분들이 모일 때 제 이야기를 들으려고 나를 초청하기도 해요.

: 저희도 그런 마음으로 찾아뵙지 않습니까?(웃음) 목사님께서 뿌려 놓은 씨앗의 하나의 작은 열매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잠깐 언급하셨지만 한국 초대교회 역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책, ‘개혁해 가는 교회’ 에 실린 논설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었지만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 (중략) ….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귀중히 여기고 정체성 있는 장로교회를 세우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곧 저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터로 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고자 힘쓴 분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목사님의 평가에 공감합니다만, 이런 평가는 기존의 일반적인 한국 장로교회의 입장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의 말씀을 좀 더 듣고 싶네요.

허: 할 말이 많은데요. 한국 장로교회는 이름만 장로교회지 장로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다른 교단 교회들도 다 마찬가지에요. 예를 들면, 원래 감리교회나 순복음교회는 장로가 없는 체제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도 장로가 있어야 되겠다.’고 해서 전부 다 장로를 세웠거든요. 아주 실용주의적인 면을 생각해서요. 장로교회는 어떻습니까? 장로교회는 정체성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이름밖에 없어요. 장로교라는 정체성을 가지려면 정치도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교리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실하게 받고 따라야 해요. 목사뿐만 아니라 교인 모두가요. 그래서 자신이 장로교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누군가 “왜 당신은 감리교회에 나가지 않고 장로교회를 다니는가?”라고 물으면 장로교회는 이러이러한 점에서 다르다는 것과 장로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가장 올바로 서 있는 바른 교회라는 것을 이야기 해 줄 수 있어야 해요. 이것이 장로교인으로서의 자긍심인데, 이게 하나도 없어요. 한국의 교회는 전부 뭐인고 하니, 정체성이 없는 교회들이 다 되어 버렸어요. 장로교회 다니는 사람도 가족이 나가니까 하고 습관적으로 다녀요. 무엇이 좋아서 나가는 게 아니에요.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이것이 바르다.’고 해서 나가야 하는데 이런 것이 없어요. 이게 큰 문제죠. 그런데 이것은 한국 교회 선교 초기부터 이미 내재된 문제였어요. 박윤선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칼빈주의라는 말을 교수들한테도 들어보질 못했다.” 하거든요. 그분의 증언이에요. 그분의 자서전에 보면 당시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그냥 개혁주의인 줄 알고 따라갔어요. 그 사실은 신학지남을 봐도 알 수 있어요. 당시 개혁주의에 관한 글(아티클)이 몇 편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평양신학교가 한국 장로교회 전통의 본산이었지만 그곳에서 교수로 가르친 분들은 대부분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입장에 있었어요.

: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허: 예를 들어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는 아주 광범한 복음주의자였어요. 원래 이분은 화란 계통의 개혁교회 신학교를 나왔어요. 그런데 그분이 장로교회 한국 선교사 모집에 응모했을 때 선교사 총무인 엘링우드(Ellingwood)에게 한국에 복음전하는 자로 보내면 가고,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해 보내면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것이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장로교 선교사의 입장이었던 거예요. 이런 정신에 동조하는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서, 1905년에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 혹은 예수 교회’를 세우자고 했던 거지요. 이런 하나의 교회운동은 곧 같은 때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일치운동의 소식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어요. 그 운동의 결실로 1925년에 ‘캐나다 연합교회’(Canadian Uniting Church in Canada)가 탄생되었죠. 당시 한국 교회지도자들도 교회 연합 운동에 참여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하지만 1907년에 한국 장로교회 독노회가 조직되었어요. 하지만 독노회는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가 채용한 간단한 소위 ‘12신조’만을 받아들였어요. 이 일을 누가 주도했는가 하면, 장로교 선교사들이었어요. 한국에 장로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준문서를 빼버렸던 거지요.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말은 안 하지만 알미니안주의를 완전히 배격하는 것이거든요. 그걸 그대로 받을 수 없었던 거지요.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어요. 한국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언제 받았는지 아세요?

: 1960년대 아닙니까?

허: 그래요.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총회에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형식적으로만 받았지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신앙고백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있어요? 별로 없어요. 잘못 닦아 놓은 터 위에 잘못된 교회문화가 정착하고 만 거지요. 그 결과 한국에는 처음부터 알미니안적이고 에큐메니칼한 신학의 터가 고착되어 버리고 만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런데 개혁교회에서는 알미니안주의를 이단같이 생각하거든요. 알미니안 주의적 요소를 단번에 가려내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교리적인 정체성이 없다 보니까 모든 것이 평준화되었어요.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나 질이 똑같아요. 미안한 얘기지만 제가 보기엔 한국교회 목사들의 90퍼센트 설교가 알미니안적이에요. 인간이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기복적인 경향이 강해요.

: 현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극복할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개혁교회적 관점에서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요?

허: 교육이 중요해요. 개혁교회에서는 목사는 설교자이고 교사예요. 청소년의 교리 교육은 목사가 완전히 책임져요. 여간해선 다른 사람에게 안 맡겨요. 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이 조금 보조하지만은 교리 교육은 목사의 몫입니다. 예를 들면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반드시 신앙고백서를 가르쳐요. 저도 호주 교회를 섬길 때, 매 주 여섯시간내지 일곱시간을 청소년 교육에 바쳤어요. 왜냐하면 설교와 교육은 목사의 책임이니까요. 그래야만 정체성 있는 신자가 되어져요. 열 일곱, 여덟살이 되면 그때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배운 신앙을 고백하게 돼요. 그런데 우리 장로교회를 보면 입교식을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느냐?”는 정도의 평범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신앙고백을 대신하거든요. 이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개혁교회는 어딜가도 개혁교회인데, 한국 장로교회는 그렇지 않아요.

: 제 생각에는 이것은 장로교회의 원형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에 적당하게 적용하고 있는 교회와 목회자의 안이한 의식과 정통 장로교회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의 부족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는대요.

허: 물론이죠. 처음부터 제대로 된 터 위에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죠. 신학교나 목사나 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을 잘 의식 못해요. 제가 아무리 강조해서 말해도요.

: 애초에 잘못인 것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지적이신가요?

허: 완전히 그런 문화 속에 젖어버렸기 때문에 무엇이 잘 됐다, 잘못 됐다 이런 판단력이 없어요. 말하자면 현실에 안주하는 거죠.

: 가끔 저도 답답한데 목사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웃음) 그런데 오랫동안 일관되게 힘주어 한 목소리를 내고 계신데 여전히 귀담아 듣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를 보면 좀 섭섭하지는 않으세요?

허: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그래요. 개혁주의 세계에서 “신앙은 생활이다.”라고 하면 다들 공감하지만 실제로 우리와 개혁교회가 이해하는 것은 많이 달라요. 신자의 생활은 원리를 따라 정착이 되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주권을 매우 강조하였어요.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좋지 못한 점도 있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31개조파 교회가 카이퍼의 아이디어를 반대해서 갈려 나왔거든요. 아무튼 이분이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의 단 1평방 센티미터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난 부분은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한국에 다시 나왔을 때, 고신대학에 폭력 사태가 일어나고 야단이었어요. 한국의 교회에 영역주권이라는 아이디어가 도무지 없는 것 같았어요. 개혁교회에는 각 영역에 고유한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무엇이 교회의 영역인지, 신학교의 영역인지 하는 부분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어요. 교회가 학교를 세우고, 교회 치리회가 이것을 운영하고, 심지어 총회가 어떤 사업을 직영하는 일등은 개혁교회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뜻있는 신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연합체를 결성해서 학교를 세울 수는 있어도 교회가 공적으로 그러한 일에 관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이런 일에 결부되면 속화 돼 버려요. 당시 고신대학 안에 신학교가 속해 있었어요. 그런데 신학교 안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니까 교인들이 신학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충격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고신교회가 신학교와 대학을 직영하였거든요. 그러니 성도들이 혼동한 거지요. 그래서 제가 와서 영역주권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는 학교를 직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학교는 교회 안에 있는 뜻 있는 분들에게 넘겨야 하며, 대학과 신학교는 완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교회는 꼭 해야 할 사명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신학교는 말씀의 사역자를 양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가 간여할 수 있지만, 교회가 대학을 직영하는 일은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는 거지요. 교회는 자기의 주권영역으로 돌아와 교회 자체의 권리와 의무에만 성실하도록 해야 해요.

: ‘신앙은 생활이다’는 교훈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소속 교단에서 불거진 안타까운 일까지 언급해 주셨는데요. 고신교단에 대한 애정과 아픔이 교차하는 현실이 가득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좀 바꿔서 긍정적으로 볼만한 현상에 대해서 의견 여쭙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 전체로 본다면 아직 미약한 점이 있습니다만, 최근 들어 개혁신앙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목사님 같은 분을 인터뷰 하기 위해 찾아뵌 것도 이런 긍정적인 현상 가운데 한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 글쎄요. 개혁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나오는 분이 많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겠지요. 그리고 요즘은 리폼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상당히 고무적이긴 하면서도 교회 건설에 나설 때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지고 나와야 하는가, 어떤 실천을 하는가 이게 문제에요. 예를 들어 최근에 호남 지역에 있는 개혁장로교회 모임에 초청받아 가 보았는데 설교를 비롯해서 몇 가지 점에서 다른 교회와 달리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요. 하지만 무엇을 가지고 개혁장로교회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장로교회라면 장로가 있어야 하는데 장로를 안 세운다는 거예요. 원리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교회는 옳은 일부 내용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거든요. 또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느 신학교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50주년 기념대회를 하는데 대단히 고무적이었어요. 그런데 과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며, 그것을 교회 생활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 것이고,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가느냐에 대해 보다 신중한 이해와 실천이 필요해요. 행사로서는 고무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문을 다 해소할 수 없었어요.

: 그럼에도 개혁신앙에 관심을 갖고서 이 정신에 따라서 교회를 제대로 세워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에게 실제로 이 부분은 꼭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요?

허: 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원리를 가지고, 어떻게 그 원리를 담력있게 추진해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거 같아요. 개혁교회는 성경적인 원리가 교회와 생활 속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화란이나 남아프리카의 개혁교회에 가서 수련하고 온 분들도 돌아와서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하거든요. 개혁교회에서 목사의 평등권이나 동사 목회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면서도 한국에 와서는 일반 목사와 다르지 않은 행동을 해요. 한국 신앙문화에 젖은 사람이 된단 말이에요. 말로는 개혁, 개혁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가지고 저렇게 말하는 가에 대해서 항상 물음표가 달리거든요. 예를 들어, 근래 한국 교회에 장로문제가 굉장히 큰 문제가 되어 있잖아요. 한국 교회에서 장로는 거의 종신직인데 개혁교회에서는 3년이나 4년씩 나누어서 하는 완전한 임기제거든요. 임기가 다 되면 물러날 줄 알고, 오히려 1, 2년 쉬는 걸 감사할 줄 알고 다시 뽑히면 또 봉사하고 이게 완전히 체질에 젖어 있거든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에요. 성경에 종신제다, 임기제다 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거든요. 하지만 칼빈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임기제로 운영하였어요. 유럽 교회는 그 본을 따르고 있어요. 저도 10년동안 그리했는데 조금의 불만도 없었어요. 임기제는 목회에도 굉장히 유익하고 좋은 거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목사뿐만 아니라 성도도 이것을 생각하는가 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우선 교회에서는 장로교 표준문서에 의한, 교리 표준에 의한 교육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이러한 구체적인 이해 없이 말로만 개혁을 말한다면 어떻겠어요? 교회를 개척하는 분은 어느 정도 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것을 잘 적용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현 체제속에서는 불가능해요. 노회에 속해있고 당회가 문제가 있고 하면 불가능 하거든. 그 범위 안에서 해야 하는데, 이제 그게 쉽지 않으니까 아예 새로운 교단을 만들려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 현 체제에서 쉽지 않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원리란 항상 개혁되어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내부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람된 질문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 화란 개혁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전통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폄하하거나 몰이해하는 경향도 보이는데요. 개인적으로 매우 우려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목사님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허: 그 점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해요.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개혁교회의 일치신조(Three Forms of Unity)는 국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인정을 받은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하지만 두 가지 전통의 신앙고백에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ICRC(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일치신조의 두 전통을 가진 세계 교회의 모임인데 거기에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함께 나란히 자매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캐나디안 개혁교회(Canadian Reformed Churches)‘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자매관계를 맺고 있어요. 우리 (고신) 교단도 이 두 교단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어요. 총회는 이런 기반 위에서 나아가야 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좀 뭐랄까 지나친 열심 때문에 두 전통이 아주 상이한 것처럼 인상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주의해야 되죠.

: 말씀하신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전통과 유럽 개혁교회의 일치신조의 전통을 서로 존중하면서 그것을 함께 계승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볼 수 있겠죠?

허: 그렇습니다. 두 가지 전통의 원리를 잘 이해하며 서로 존중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 장로교회 체제 안에서 개혁할 수 있는 것들을 개혁하면서 한다면 그것도 큰 진전이 아니겠습니까?

: 교단적인 이슈에 대해서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합신과 고신 사이에 교단 통합이 논의 중인데요. 목사님의 평가와 전망을 듣고 싶습니다.

허: 글쎄요. 말은 들어서 아는데, 저는 현실 교회의 흐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지금은 총회도 잘 참석하지 않고요. 그럼에도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양 교단이 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문서로 가지고 있고 또 같은 교회 정치원리에 따라서 나아간다고 한다면 통합이나 합동을 추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두 교단이 갑자기 합병하려고 하는가 할 때, 두어가지 공통 분모가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하나는 양 교단에게 보수적인 신학이 있고, 또 하나는 박윤선 신학의 영향이라는 공통 분모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통합을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다만 마음에 좀 걸리는 부분은 제 생각에 사실 박윤선의 신학적 영향이라는 것은 지나간 지 오래됐어요. 고신쪽에서는 제가 박윤선 목사님의 마지막 제자였거든요. 60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할 때, 마지막으로 박윤선 목사님이 졸업식장에 오셨어요.

: 그렇군요. 1960년 9월에 고려파를 떠나셨으니까 박 목사님께서 고려신학교에서 참석한 마지막 졸업식이었겠군요.

허: 예. 그 당시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을 직접 받은 분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요. 남은 분들도 거의 다 은퇴를 해서 지금 현장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박 목사님이 잊혀진 지 오래죠. 그런데 몇 해 전에 합신 정암세미나에 가 보니까, 5, 60대 분들이 다 박 목사님의 제자들인기라. 박윤선에 대한 사모함이 아주 충만하더라고요. ‘참 다른 세계다.‘라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어쨌든 이러한 두 공통분모 아래서 통합이 진행되지 않느냐 생각하는데, 2년전부터인가 고신에서 합동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진행하는 것은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60년에 승동측과 연동측이 나눠졌을 때 승동측하고 고신이 전격적으로 통합을 했거든요. 9월 총회에 추진위원회 내걸고 12월에 합동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주 졸속한 합동이었거든요. 2년 지나고 나서 결렬 되버렸어요. 그때 저는 파수꾼이라는 교단 잡지 편집을 맡아서 합동 총회를 따라 다녔는데, 정리가 안 되는거예요.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그런 부끄러운 역사가 있는 만큼 합동 논의는 좀 더 신중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어느 모임에 가서 “일단 교리위원회라든가 이런 모임을 통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하고 상호간에 협의를 하는 것은 좋지만 합동위원회를 만들어서 바로 합동 논의로 들어가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교단 합동이란 쉬운 게 아니에요. 어느 정도까지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오랫동안 나뉘어져서 각자의 전통과 자기 것을 형성해 왔기 때문에 쉬운 건 아니죠. 그러기 때문에 아까 말한 캐나다 연합교회 연합도 25년 이상 걸렸고요. 캐나다 개혁교회와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es)도 합동을 위해서 15년 이상 교류하면서 찬송가와 같이 우선적으로 서로 쉬운 것부터 맞춰 나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런데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있어서 무엇이든 전격적으로 하려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중요한 문제를 놓칠 수있어요. 합신의 경우 합동신학대학원은 사립 신학교이고 고신의 고려신학대학원은 직영신학교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 외에도 많은 현안들이 산적해 있어요. 그런데 신학과 관련된 본질적인 사안들은 어렵다고 다 뒤로 밀어놓고 “무조건 통합부터 합시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잘못하면 오히려 큰 시험에 들수 있어요. 또 하나로 합했다가 더 많은 분열을 가져올 수도 있어요. 요즘 어떤 목사들은 “사도신경만 고백하면 우리는 연합도 할 수 있고 뭐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젊은 목회자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아요. 그런 식의 합동이라면 무슨 의의가 있겠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요.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교회 저 교회 초청받아 가 보지만 예배에서의 통일성을 찾아볼 수 없어요. 예배는 교회의 얼굴인데도요. 전부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별거 다 해요. 현재 교회들이 이런 판국에 제대로 된 연합을 이룰 수 있겠어요? 좀 극단적인 말인 것 같지만 헤쳐 모여야 되지 준비가 안 된 통합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이제 저는 양 교단의 합동 논의를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 무슨 말씀이신지, 어떤 염려이신지 충분히 공감하고요. 교단과 교회간의 합동 논의는 매우 신중하고 질서있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또 한 가지 배우게 되는 것이 이러한 논의를 하는 데는 교회사적 통찰이 요구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잘 살펴보면, 그 속에서 혜안과 해답을 찾을 수 있는데 대체로 합동 논의를 할 때, 이런 점을 염두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허: 맞습니다. 한국교회는 교리도 그렇지만 교회사를 너무 등한시합니다. 교회사가 중요한데 교회사 교육이 하나도 없어요. 목사도 잘 몰라요. 요즘 뉴스를 보니까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안 가르쳐서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잘 모른다.’고 하던데 문제입니다. 수능시험 여부에 따라서 역사를 배우고 안 배우고를 결정한다니 그런 말을 들을 때 ‘아하. 이거 큰 위기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교회도 똑같아요. 개혁교회에서는 교회사를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쳐요. 제가 있던 교회도 유치원에서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 가르쳤거든요. 성경과 교회사는 교회 교육부(Educational Association)에서 지정한 필수과목이에요. 그 다음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목사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쳐요. 자기 교회 역사를 알기 때문에 자기 교회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 교회 목사들은 이 면에서 있어서 정말 생각을 좀 깊이 해야 되요. 그래서 사실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 세계교회 역사를 정리하고 있어요.

: 그러세요?

허: 아무래도 몇 사람만 읽더라도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금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 진심으로 기대됩니다. 목사님 소망대로 책이 잘 발행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앞으로 주님 앞에 가시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허: 뭐… 팔십이 넘은 사람에게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방향을 잃은 한국 교회 실정에서 다만 몇 교회라도 바른 개혁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 저의 마지막 바람입니다. 그 마음밖에 다른 게 없어요. 제가 사는 이곳 주변에 고신 교회들이 많습니다. 거의 다가 제 제자들이죠. 그런데 다녀볼 때마다 내가 실망을 하거든(웃음). ‘이래 되겠나.’ 하는 마음이지만 말은 못하고. 어디든지 좀 참되고 바른, 명실공히 개혁교회다운 교회가 서면 좋겠다는 바람밖에 없어요.

: 너무 귀한 소망이십니다. 이제 저희가 목사님의 소망을 이뤄가는 데 진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허: 노력을 많이 하십시오.(웃음)

: 예.(웃음)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목사님의 인터뷰를 함께 나누게 될 여러 성도님들을 위해서 권면을 부탁드립니다.

허: 어쨌든 한국교회에 변화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변화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른 개혁주의 교회 노선을 향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서 정말 개혁교회다운 교회를 이뤄갔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한국 장로교단의 수가 백여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예요. 미국같은 나라에도 이름 있는 장로교회가 한 너다섯개 밖에 없어요. 사오백년의 기독교 전통을 가진 화란에도 몇몇 교단밖에 없고요. 그런데 이제 고작 선교 백년의 역사를 조금 넘긴 한국교회에 장로교단만 백여개가 넘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분열이 신학이나 교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교회 내 교권주의와 지역패권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지요. 주류, 비주를 따지는 것도 신학이나 교리 문제가 아니라 정치싸움의 결과이거든요.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제는 좀 바른 정체성을 가진 장로교인과 목사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왜 자신이 장로교인이어야 하는가를 아는 성도들과 교권중심에서 벗어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끄는 목사들이 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 목사님의 귀한 권면을 마음으로 새기겠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 속에 그동안 쌓아두셨던 지혜와 명철과 교훈이 저희에게 잘 전달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교회를 위해서 항상 올곧은 말씀을 전해 주시고요. 지금처럼 한결같은 모습으로 항상 같은 자리에 계셨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준비하시는 책도 잘 정리되어서 우리가 다같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가족과 건강과 남은 사역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13.6.24. 허순길 목사님 자택에서

※ 인터뷰 녹음 파일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 본 인터뷰의 권리는 SDG개혁신앙연구회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15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