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서평

제목분열된 복음주의를 읽고 by DeiGratia2018-07-04 14: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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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DG회원님들!


저는 Pie Jesu??  아니죠~~ Dei Gratia(데이 그라치아) 인사드립니다 ^^


제 닉이 몇가지 오해를 일으킬 수 있고, 불편함을 드릴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래서 주나그네님께서 멋진 닉을 여러가지 추천해주셨습니다.




다 좋아서 한번씩 번갈아 가면서 쓰고 싶은데, 그럼 회원님들께서 헷갈려하실 것같습니다ㅎ


Dei Gratia :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 한글로도 라틴어로도 너무 멋집니다


저는 하나님 은혜없이 살수도 없고 여기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제게 딱! 어울릴 닉이지 않습니까? ^^ 주나그네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 Dei Gratia로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아래 글은, 제가 속한 교회의 연합, 하나됨에 대해 '무엇으로, 어떻게?'를 고민하던중 읽게된 '분열된 복음주의'에 대한 후기입니다. 실은 후기라기보다는, 방어논리를 살펴보며 글을 요약 정리하다가, 닉변경도 알리고 책도 추천할겸 (이미 추천도서목록에 있더군요 ^^) 후기형식으로 바꿔서 올립니다. 교회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방향의 교회 연합을 바라보면서


분열된 복음주의를 읽고 (이안 머리, 부흥과 개혁사 출판)


 


우리는 연합을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입장과 사랑을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쉽게 떠올린다.


- 나는 신학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신학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한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바른 신학이나 어느 그룹에 속했는지는 하나님 입장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함, 열린 마음, 진리를 찾으려는 진지함 같은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차지한 교단 지위, 영적 경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움직일 분은 아니다. 천국 문을 지키고 있는 베드로가 우리를 만나 던질 질문은, 어느 교단에 속했는지도, 처녀 탄생을 믿는지도 아니다. ‘복음주의’라는 표현조차 대화에 낄 자리가 없을 것이다. -


 


지난 세기 동안 교회 연합 운동(에큐 메니컬)에 찬성했던 데이브는 위와 같이 자신의 논리를 밝혔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고 교회연합을 포용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연합의 과정중 복음주의자들이 타 교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성경적 진리를 강조하지 않게 되면서, 복음적 진리가 흐려지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복음주의의 특징을 지키고 강조하려는 어떤 시도가 있으면, 포용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내외부로부터 분파주의를 조장하는 행위로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 재임스 패커이다.


그는 선교적인 연합을 위해 복음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의 연합운동 ECT(Evangelicals and Catholic Together)을 지지하였다. ECT 선언문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구가 등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게 됐다는 진리를 같이 확인한다...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다-


 


위의 공동 선언문은 곧 ‘복음주의자와 카톨릭 신자는 한 형제, 자매다’ 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패커는 “구원론과 교회론의 이견이 복음주의자와 로마 카톨릭이 함께 행동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신앙의 근본을 지키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지만 말이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교회를 엄청난 혼란과 분열로 인도할 수도 있다. 신학자 스프라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패커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 칭의 혹은 교회에 대한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떤 개혁주의자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이신칭의 신학을 통해서라고 주장했는가? 우리가 언제 신학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가르치고 다닌 적이 있는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철저히 부정하는 -오직 믿음으로-의 메시지는 하나뿐이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인지 신학인지가 아니다. 문제는 사역을 같이 하는 기반인 복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이다.’


 


ECT선언서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저 서로가 ‘믿는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 들였다. 이렇게 될 경우 점점 선교라는 목적 하에 복음의 핵심은 묻혀 지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신학의 문제가 아님을 나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학문적인 논쟁이 아니라 사도들이 수호해왔던 진리의 핵심이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거듭나게 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서로가 믿는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이들의 사고 속에는 관용과 포용이라는 현대의 세상 가치관이 숨어 있는 듯하다. 이것을 당연한 가치인양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가는 것은 비 진리와 진리가 함께 하는 오류를 낳을 수 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었다.


 


1980년대 복음주의를 연구한 마이클 사워드는 말하길 ‘60년대와 70년대 유산은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이를 통해 기타반주, 찬양, 가정토론모임과 함께 자라난 세대가 등장했다. 나도 여기 속하지만, 이들은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도록 훈련되지 않았다. 우리 시대는 말보다는 인상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였다. 이들은 신학보다 ’나눔‘을 강조하도록 훈련되었다. 열정을 가지고 서로 섬기는 세대였지만, 무엇을 정확하게 정의하거나 분명한 입장을 들어내면 의심스런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신학적인 내용과 씨름하기 싫어할 때가 많았고, 그렇게 할 능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종교 음악, 드라마, 예능 면을 발휘하는 데는 뛰어났다. 그러나 설교하고 신앙을 제대로 가르쳐야할 자리에서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라며 위와 같은 발언에 담긴 배경을 설명한다.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연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연합주의자들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신학적 견해 차이가 아니다, 신학은 교회의 연합을 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주장을 보면서 믿음이 어떻게 들어나는가? 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음은 바로 바로 신학이라는 체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들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신학은 책상 위의 학문이 아니라 교회가 가진 신앙고백으로 들어나는 믿음이자 정신이다. 이슬람교의 믿음과 힌두교의 믿음과 기독교의 믿음은 다르다. 이것은 각각의 정신인 신학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들어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와 믿음을 함께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는 저주가 임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확인없이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 불결한 영적 간음이 될 수 있다. 교세 확장과 후원세력을 얻기 위해 진리를 비진리와 섞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의 진리보다 부수적인 것이 강조되면 진리를 타협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ECT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반대자들은 공개적으로 거듭났다고 확인될 수 있는 사람만 교회 구성원으로 취급하고 있다”며, ‘완벽주의적 교회관’을 가졌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마13:30절 ‘둘 (알곡과 쭉정이)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는 말씀으로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절뿐만 아니라 성경의 어떤 구절도 교회가 ‘순수한 교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은 진정한 신자들이었고, 세상과 구별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순수성을 말씀하시며 세상의 소금(마5:13)이 되라고 하셨다. 세상적인 사람이나 불신자를 성도로 여기도록 허락하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성경은 불신자들을 상대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가는 교회의 일원이 아님이 당연하다. 나는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어설픈 논리로 그리스도께서도 선언하지 않은 말씀을 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신학이 다른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이안 머리의 주장처럼 ‘진리를 사랑으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앙을 수호하라는 성경적 명령이 무시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모든 관점을 열린 자세로 듣도록 장려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존재하기 때문에 (딤전4:1) 반대로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하라’고 가르쳤다.(요일4:1) 이들의 교묘한 거짓 가르침은 누룩처럼 퍼진다. 성경 말씀과는 달리 모든 관점을 열린 자세로 포용하려는 오늘날의 가치관에 물든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말씀보다 자신의 사고를 먼저 내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롬12:2),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라 (고후10:5)는 말씀이 분별없는 신자들에게 경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안 머리는 말한다. 교회가 연합하고 신자를 받아들일 때 성경을 따르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다고,


결국 교회 안에 비 그리스도인의 수가 늘게 되고, 양이 질을 밀어 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주목을 받기 원하고 사람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는 교회의 자격이 없으며 이런 교회는 ‘성령이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는 말씀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종교 개혁자 존 폭스의 입을 빌려서 말하길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세상의 인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적 교회보다는 세상의 회당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밝힌다.


 


로마 카톨릭은 눈으로 보이는 외적 요소와 내적 상태의 차이를 구분짓지 않는다.


로마교의 교인이 된 것과 구원의 자격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로마교는 그리스도가 세우고 영원히 지킨다고 약속한 교회라고 스스로 자부하기에, 자신들이 믿음을 왜곡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성례를 책임진 교회가 타락한다면, 구원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다르다.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교회나 교단에도 영원한 보장을 하신 적이 없으며, 모든 교회의 생명력은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존재 여부와 믿음의 복종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라) 따라서 복음주의자는 복음을 기초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겉만 보거나 소속만 보고 교회라든지 성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이 선포되고 신앙의 내용이 있는 곳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딴 공동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이것을 잘 지적했다. ‘사람들은 성전과 제사장들과 여러 가지 보기 좋은 쇼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도리어 일반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텅빈 껍데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안 머리가 지적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진리보다 교단간의 교류와 연합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교단들이 자기끼리만 교제하고, 진정한 교회는 자신뿐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교회에도 이점을 강요했다면 비난받아야 한다. 지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본질적인 진리의 일치없이 외적 연합을 우선시하는 것 역시 합당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환영하고 있을 때 필립 휴즈 박사는 ‘교회 안에서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그 영향력의 급격한 확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보는 관점, 신학을 따지는 것을 거부하는 흐름, 세속주의, 상대주의, 은혜를 공짜로 보는 사상들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가서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교회가 조직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의 우려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이안 머리가 말한 ‘교회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연합하고 서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연합을 거부하거나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내 마음의 지경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책은 조금의 신학내용이나 교회사에 관심이 없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풍부한 자료와 지난 세기의 넓고도 세세한 교회사의 흐름과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함께 소개하는 이 책을 꼭 추천해고 싶다. 특별히 교회의 연합과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더불어 포용과 진리의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말이다. 근자에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만든 이런 책은 없었다. 이 책을 읽게될 누군가의 마음에도 모임과 연합에 대한 성경적인 고민과 함께 공동체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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