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서평

제목소경의 나라를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바치는 글 - '개혁신앙과 현대사상'을 읽고 by charis2018-07-04 14:51:22
작성자


  개혁신앙을 알기 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몇가지 증명법을 읽고 놀라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만물이 가진 질서와 목적을 따라, 또는 인간안에 자리잡은 이상적인 도덕을 향한 추구로부터 신존재를 증명하는 변증법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신앙과 실천간의 괴리에 고통하던 저는 신앙의 근거가 견고해지는 것이 신앙과 실천이 합일한 삶으로 저를 이끌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갈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조에 대한 증거들도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선생들처럼 보였습니다. 인간이 찾아내고, 증명하고, 설명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없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찾아낸 것들이 저를 즐겁게 하였지요. 그것들이 아직 성경적인 삶으로 저를 충분히 이끌지 못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저를 지적도취에 빠지게 하였던 것들로부터 나오게 한 것은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어디에서 언제 왔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제 손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철학자들처럼 현학적인 말을 쓰지도, 소설가들처럼 흥미로운 재간을 부리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거부할 수 없이 달콤한 자학의 시간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제가 지은 죄를 끝없이 상기하고, 제가 받아 마땅할 벌을 상상하는 것이 절 기쁘게 했습니다. 이것 또한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악을 선으로 바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고행이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어느 중세의 수도승과 같은 심정이었나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어디까지 와있나 생각해봅니다. 제 손을 거쳐가는 성령의 사람들은 점차 더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책상을 내리치며 말합니다. 가슴이 철렁하며 저는 이제 그들에게 달음질합니다. 당신들이 맞습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언제부터 알았느냐가 아니라 이제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저와 같은 길을 걸어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여기 또 한번 제게 호통치는 한 선생을 만났습니다. 지금껏 만난 어떤 선생들보다 가장 어렵게 말하는 선생입니다. '본질과 실재', '단일론과 단의론', '존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 '합리주의적 비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적 합리주의'. 그는 철학도를 위해 쓴 책이 아니라고 서언에 밝힌 자신의 말을 깜빡한 것 같습니다. 물론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이 덤빈 저를 먼저 탓해야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리송하다가도, 곧바로 아이에게 하듯이 단숨에 한마디로 쉽게 요약해 주는 친절함에 그의 책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수 세기 동안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전통적인 변증의 방법은 로마카톨릭과 알미니안의 방법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 신학과 철학의 대변자들을 통해서 오늘도 분명하고 신실하게 나에게 호소한다 해도, 나는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로 돌아갈 수 없다."


"현대주의 개신교(Modern Protetantism)는 현대인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복음의 내용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개신교 사상 자체 내의 분열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저도 언제부터인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볼때나, 교회를 볼때나, 신앙 서적을 볼때도, 나사로와 부자를 갈라놓은 것 같은 거대한 구렁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화해할 수 없는 극단의 대립. 사랑과 포용만으로는 그들과 우리가 한목소리를 내기에 역부족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끄럽게도 이제서야, 그 이유를 제게 설명해주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린 한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제 믿음으로 담대히 몽학선생들로부터 벗어나라고 충고합니다. 절대와 상대의 개념을 처음 나누기 시작한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헬라철학자의 어리숙한 사변을 저리 치우라고 합니다. 변화와 합리성을 존재의 유비를 사용해 억지로 이어보려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패한 시도로부터 탈출하라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본질의 세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냈다고 자처하는 칸트로부터 구원받으라고 합니다. 이들의 초등학문을 구걸하며, 하나님께 떼를 쓰는 로마 카톨릭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신개신교 사상가들에게 빌붙지말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들 모두는 '자존적인 추상적 논리원칙'이라는 모래에 집을 짓고 있다고 목메어 증언합니다. 기면 상태의 환자처럼 신기루같은 세상철학과 이에 근거한 변증법과 기독교 사상들을 현실이라고 착각했던 저에게 그의 호통소리는 청명합니다. 


   소경의 나라에서 소경들은 자신들이 실제 태양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말을 이리저리 바꿉니다. 저마다 옆의 소경의 주장과 달리 자신의 주장은 더 합리적이라고 다른 이들을 설득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태양에 대해 더 어렵고 그럴싸하게 말할수록 더 많은 추종자들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전 세대의 영예로웠던 자의 주장을 밟고 일어서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그 나라에 잠시 머무는 앞을 볼 수 있는 나그네가 자신은 태양을 직접 보았기에 추론할 필요가 없고 사실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주장때문에 소경들은 기득권을 잃을 처지에 놓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버립니다. 그들은 그의 주장을 배제하고 그를 모욕하기 위해 그를 향한 적대적 연대를 도모합니다. '비성경적 배타주의'의 본심을 숨기고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 앞에 '비성경적 포괄주의'라는 모습으로 거대한 연합을 시도하고 있는 현대주의 개신교의 에큐메니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이처럼 소경들의 처지를 바로 이해하였을 때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총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이해의 전기를, 제가 읽은 옛 스승의 책 '개혁신앙과 현대사상'을 통해 여러분들도 마련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자의 말처럼 '저들'과 같이 '거짓말'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