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서평

제목「진보 보수 기독교인」서평 - 나그네인가, 시민인가? by chairs2018-07-04 16: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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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연평도에서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2013년 3월 초순 무렵이었습니다. 냉풍 속에 살며시 스며든 훈풍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이른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뭍을 다녀오기 위해 하루 한 번 오가는 여객선 시간에 맞춰 아들이 있는 어린이집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어린이집에 들어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들이 타기 전 차를 조금이라도 더 덥혀놓기 위해 온풍기의 강도를 높이던 찰나였습니다.


 


“애앵~ 실제상황입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적이 포격을 하고 있습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대피소로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지난 10개월간 훈련을 위한 방송은 들어봤어도 실제상황이라고 말하는 방송은 처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200여미터 떨어진 같은 관사에 거주하는 어머니들이 방송이 나온 지 채 몇분이 안 지나 어린이집으로 뛰어옵니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모두 공포에 떨고 있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급히 대피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말과 함께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차에 탑니다. 방송 내용과는 달리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착장으로 빠르게 차를 몰아갔습니다.


 


‘차위로 포탄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배는 선착장에 있을까, 아니면 회항했을까? 선착장에는 대피소가 어디 있더라? 하나님, 이 종과 종의 가족을 지켜주세요.’


 


  짧은 찰나에 많은 생각과 짧은 기도가 스쳐갔습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1km 남짓 떨어진 선착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잠시 주변을 살핍니다. 예상과는 달리 휴가를 나가는 장병들과 섬주민들은 별 일 없다는 듯이 배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군 내부적으로 행하려던 시험방송이 마을 스피커로 잘못 전송된 해프닝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선착장은 방송이 마을보다 작게 들렸거나 안 들렸던 것 같습니다. 후일담에 의하면 당시 관사 일부 주민들은 너무 놀라 속옷 차림으로 대피한 분도 있었다고 하니 상황이 꽤 심각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를 향해 위협 수위를 높여가던 북한이 정부/정당/단체 특별성명을 통해 ’전시상황‘ 까지 선언했다. 또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선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을 병진시키는 새로운 전략적 노선까지 채택했다. 전형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지만 일각에선 북한이 사실상 준전시 상태까지 이른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2013년 3월 말, 북한의 위협수위가 한창 높아지던 시기에 실린 신문기사입니다. 저녁이 되면 적막한 밤바다에 고립된 섬에서 가족과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여러 뉴스와 신문의 기자들은 연일 섬을 방문하며 북한의 심상치 않은 행동의 심각성을 실감케 했습니다. 언제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두달 여의 시간동안 제 자신과 가족을 소리없이 감싸오는 죽음의 위협앞에서도 의연했다고 한다면 위선일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어린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의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하여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때에서야 알았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2012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전 우파 후보인 박근혜씨에게 표를 던졌고,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을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가족과 우리 사화를 위한 (특별히 안보에 있어) 믿을만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조금 더 고백한다면 박근혜씨 이외의 후보는 안보 문제에 있어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북한의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 제 마음 속에 진지한 물음 한 가지가 생겼습니다.


 


‘나와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북한 정권에 (적어도 제 입장에선) 호의적인 정당과 후보를 지지한 자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도 내 형제와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무슨 어리석은 물음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요 자매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요 자매가 아니라면 저와 같은 정당과 후보를 지지한 자들이 형제이자 자매가 되는 것입니까? 눈 앞에 닥친 죽음의 위협은 이 세상과 세상의 정치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생생하고 절실하며 급박한 문제로 저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몰아세워 결국 해서는 안 될 물음에까지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정치가 신앙을 어떻게 훼손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신이 죽음의 공포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제 마음 속에 이미 임한 줄 알았던 하나님 나라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물론 (지금 제가 그러하듯이) 직접적인 위협을 느낄 수 없는 대도시 사람들의 생각처럼 제 가족의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고, 저희는 벚꽃이 만개할 무렵 육지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지금도 제 영혼 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함께 했던 가족. 절박한 심정으로 드렸던 기도와 예배들.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대한 깨달음. 경험하지 못하면 깨닫지 못하는 지성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안락한 의자에서 입을 열기란 쉬운 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깊은 소외감에서 나온 정치적 이방인, 아웃사이더, 대서양의 이쪽 편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더 나은 도성에 대한 진리를 사모하는 고독한 사상가의 관점에서 진술된 비판을 만납니다. 그의 전방위적인 통렬한 비판은 우리의 정치 지형을 지배하고 있는 소중한 정치적 우상들을 풍자합니다.’


 


  칼 트루먼 교수의 ‘진보 보수 기독교인(Confessions of a Liberal Conservative)’의 추천사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의 글이자 보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마지못해 추천한다는 극보수주의자 피터 릴백 교수의 추천사는 다른 책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재미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 책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쓴 정치칼럼이 아닌 고독한 그리스도인 사상가의 정치 풍자라는 점을 따뜻이 이해해 준 피터 릴백 교수는 칼 트루먼(Carl Trueman)이라는 이름을 칼 마르크스먼(Karl Marxman)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장난기 어린 농담을 던지며 정치적인 이야기라면 잔뜩 긴장한 채 듣게되는 이들의 마음을 가볍게 풀어줍니다. 그리고 독자는 놀이공원 속 미로에 들어가 듯 긴장감과 설레임이 공존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펼치게 됩니다.


  자신의 입장이 중도라고 생각했던 영국 신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인을 데리고 낯선 미국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미국에서는 좌파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잘못 낸 시험문제처럼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미국의 정치문제 가운데에서 오답을 정답이라고 우기는 자신의 형제자매들은 이러한 당혹감을 더 크게 만듭니다. 가장 정답에 가까운 오답을 찾아야 하는 말도 안되는 시험문제앞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길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책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정치적 입장이 신앙적 입장과 동일시 될 때의 위험성을 간파하는 것은 시대의 한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진보’ 가 무엇인지를 근대화 과정과 결부시켜 간단명료하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솜씨가 감탑스럽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다는 바램이 꽤 강하게 든 것도 저자의 글솜씨 덕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좌파’의 실패가 ‘진보’의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그 변화가 낳은 ‘신좌파’의 실체가 무엇인지 막힘없이 내용을 전개시켜 나갑니다. 경제적인 압제가 심리적인 압제의 개념으로 변화되고, 인간의 참된 모습은 ‘신좌파’의 주동적 인물들이 결정하는 심리적 압제의 주체들에 반대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변했다는 저자의 설명은 제가 ‘진보인사’들에게 느꼈던 불편감의 원인을 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무엇이든 좌파 지성인들이 반대하는 대상이 곧 반대할만한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어떠한 대상을 반대해야 할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좌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책의 후반부를 채우고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 타락, 위선의 폭로는 1년전 제 마음에 떠올랐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물음의 근원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세속주의는 봉건주의나 사회주의 속에서보다 인권과 자유를 외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두드러집니다. 왕과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한명의 우상만이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개인 자신의 우상이 됩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많은 예를 들지만 특별히 마음을 울린 한 가지 예는 교회의 회원권과 관련한 짧은 언급이었습니다.


 


‘“당신은 주 안에서 이 교회의 치리에 순복하고, 생활의 가르침에 태만한 점이 발견되었을 때 교회의 권징을 받아들일 것을 동의합니까?”


  이 서약의 전제들은 명확합니다. 기독교는 나, 그리고 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훨씬 더 큰 집단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종, 즉 서약에 따르는 순종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개인의 권리들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2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개인의 권리에 대한 집착은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까지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살지 안 살지를 결정함으로써 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세상에서, 그리고 천박한 개인주의가 그 문화의 중심에 깊이 뿌리박힌 세상에서, 교회의 권징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나를 징계하면 다음 주에는 다른 교회(가게)를 나의 (영적인) 사업의 대상으로 삼으면 됩니다. 그것이 소비주의(세속) 윤리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책 전체게 걸쳐 이렇게 두 번 언급되는 지역교회의 회원으로서 하는 순종의 서약에 대한 언급에서 저는 다시한번 1년전 제 마음속에 들었던 물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 자신과 가족이 너무 소중하고, 저의 권리가 중요했기에 저와 정치적입장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정치적 입장이 국가안보에 더 충실한가 하는 논의는 차치하고) 그들의 정치적입장이 사소한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저와 가족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제 생각과 행동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형제와 자매를 위해,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생명보다 더 귀한 보석을 소유한 자들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전 교회보다 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더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듯한 심정으로 섬을 나오면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나와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도,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인 입장이 설령 나와 가족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형제와 자매를 배척하거나 미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기도하고, 힘쓰자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이 다짐은 아직도 완성될 기약이 없는 미완의 대작과 같습니다.


  제가 속한 교회를 생각할 때면 탄식이 나지막히 섞여 들어간 기도가 나오곤 합니다. 이제 막 태어나 미약한 몸짓으로 우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기쁨과 걱정이 교차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이겨내고 견뎌내야 할 숱한 시험과 고난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솔리데오글로리아 교회 정회원 가입을 위해 존귀하고 엄위하신 우리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손을 들어 서약합니다.’


 


  이 얼마나 눈물나도록 숭고한 서약입니까? 우리 주 하나님의 이름은 만유위에 뛰어나신 이름이 아닙니까? 정치도, 재물도, 내 생명과 권리도 그 앞에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함께하는 교회와 그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거룩한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도가 어찌 하나님이 명하신 것 이상을 주장하며, 서약을 어기며, 교회를 자신이 고르는 상품의 하나로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바른 교회를 찾는다는 미명하에 교회를 쇼핑하고, 성경을 벗어난 자신만의 기준으로 교회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까, 시민입니까? 우리는 혹시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복종하며 책임을 다하는 시민의 자세를 강조하다가 이제 곧 이 땅을 떠나 하나님 곁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 시민의 책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세상의 변화‘와 같은 주제들이 우리의 마음을 너무 사로잡은 나머지 왜 성경의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들을 나그네라고 불렀는지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교회를 돌아보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언급하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이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치적 이상이나 경제적 번영이나 자신의 생명과 권리의 증진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와 그 앞에서 행한 자신의 서약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과연 자신이 교회에서 설 자리가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그 이전에 겪었던 작은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입니다.


  제 부끄러운 고백을 어거스틴의 '신국론(하나님의 도성)'의 한 구절로 끝맺고자 합니다.




'지상 도성은 최후 형벌이 정해지면 도성이라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영원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 자체의 선한 점이 있으며,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즐긴다. 하지만 그 선한 것이 시민들의 모든 곤란을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지상 도성은 다툼과 전쟁과 분쟁으로 분열되며, 승리를 얻는다고 해도 많은 생명이 죽으며 오래 가지도 못한다......그런데 비교적 정당한 주장을 한 쪽이 승리할 경우, 그 승리자를 축하하며 그 평화를 환영하기를 누가 머뭇거리겠는가? 이것은 선한 일들이며,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이 천상 도성의 더 좋은 일들, 이를테면 영원한 승리와 영원무궁한 평화로 얻는 선들을 소홀히 하며, 지금 이 세상의 선을 오로지 하나뿐인 선으로 믿어서 지나치게 탐내거나 더 좋다고 믿는 선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 때에는 반드시 불행이 따르며 더욱더 심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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