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Q&A

제목김병혁 목사의 예전 질문과 답 모음(ctrl+f 로 찾으세요)2018-06-15 10: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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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 monergism은 칼빈주의가 맞나요?


'mornergism'은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사상을 나타내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우리 말로 '단독사역'이라는 말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말씀하신대로 이 개념은 칼빈주의 신학(특히 칼빈주의 5대 교리 중에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칼빈주의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할 알미니안(Arminianism)과 로마 카톨릭은 'monergism'에 반대하여, 인간의 노력과 협력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synergism'을 따르고 있습니다. 





2문. 교회정치와 독립교단의 상관성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독립교단의 위험성과 이유에 대해 물으셨는데요, '교단의 형성과정과 그 역사'라는 강의를 통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더라면 좋을뻔 했습니다. 좋은 질문이지만 한번에 'yes' or 'no'로 답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몇 가지 부연 설명을 드리고나서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 (제가 이해한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교단(파) 형성 배경과 이해 

지상에는 기독교라는 큰 우산아래 있으면서도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크게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로 나눌 수 있고,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후,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워진 서방 교회적 전통의 카톨릭 교회와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에 세워진 개신교(Protestant)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요, 우리의 관심사는 개신교인데, 문제는 종교개혁이래 개신교 안에 수많은 형태의 교파(교단)들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믿으면서 동시에 다양한 교파(단)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성경에 대한 교리적, 신학적 해석의 차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견해 차이는 다양한 신학 사상과 교회 정치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첫째, 한가지 성경을 믿는다고 해도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의견 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둘째, 성도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가장 성경적이고 바른 교회와 신앙을 추구해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리와 신학의 차이 혹은 교단간의 견해 차이는 성경과 신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따라서 신학과 교단이 나누어진 현상 자체를 비난하기 보다는 다양한 신학과 교파중에서 성경 내용과 종교개혁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내용과 대상이 무엇인지를 구별하여 성경 말씀에 따라 참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는데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2. 교회정치와 교단(파)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교단(파)의 차이는 교회 정치 형태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 정치(혹은 '정부'라고도 부름)는 신학적 전제와 교리적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로마 카톨릭의 교황정치, 감리교나 영국 국교회의 감독정치, 침례교회나 회중교회의 회중정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장로정치 제도입니다. 이중에서 저는 장로정치 제도가 가장 성경적인 교회 정치라고 확신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개혁교회의 이해> 코너에 <장로교회>라는 글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3. 독립 교단의 특징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는 독립 교단이라는 말이 용인되지 않습니다. 이 두가지 교회 정치는 교회를 계급적인 구조로 이해하기 때문에 상회와 하회의 구분이 뚜렷하고 성직자간에 차별이 존재하며, 지역 교회(지교회)의 평등권과 자율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두 교회 정치 체제에서는 '독립'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립 교단은 회중교회나 장로교회적 정치 체제의 교회들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회중교회는 교회 원리적으로 독립 교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회중 정치의 교회와 교회사이,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고 신앙적 계층 구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교황 정치와 감독 정치와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교회의 자율권 강조를 통한 독립적 교회 운영과 실질적인 교회 연합에 대한 반대한다는 면에서 장로 정치와 구별됩니다. 


4. 독립 교단의 장단점

독립 교단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자간의 평등 사상과 계급주의 신앙을 반대하는 부분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또한 회중들의 적극적 참여와 지교회 중심의 일체감 극대화를 통해 교회 성장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이 단점을 커버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나치게 지교회의 자율권을 강조하다보면, 지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지교회 중심이다보니 개인 목회자의 성향과 영향에 따라 교회가 좌우될 확률이 높습니다. 회중과 목회자의 선택과 결탁에 의해 교회 행정이 변질될 우려도 큽니다. 또한 장로교회처럼노회나 총회같은 상회 기관이 없다보니(다른 이름으로 있어도 기능상 협력과 이해의 기구이지 치리나 감독 기관이 아님) 교회의 독단화, 주관화, 이단화 경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독립 교회라는 말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신앙과 고백에 있어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교회는 자체 밖에서 신앙고백이 같은 다른 지교회들과의 연합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5.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과 독립 교단(회)화에 대한 대처

장로교회 목사로서 님께서 독립교단의 위험성의 근거로 제시한 노회의 견제로부터 이탈 현상에 대해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현대 교회의 병리적 현상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한국의 많은 장로교단들과 교회들이 실제로 성경적인 장로정치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음에서 오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장로정치의 핵심은 노회에 있습니다. ‘장로회’라는 말은 ‘장로들의 단체’를 의미하는 ‘프레스뷰테리온’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것만 보아도 ‘장로들의 모임’으로서의 '노회'가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지 알 수있습니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핵심적 특징은 노회 운영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보우만(H. Bouwman)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노회의 필요성에 관해 다음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통일을 위하여. 둘째, 많은 교회들의 합심 협력에 의한 교회의 지속적인 발전 및 신앙과 행위의 순결을 위하여. 셋째, 많은 교회들의 협력에 의한 회중의 자유 수호를 위하여(교권주의자들의 활동을 막음으로). 넷째,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의 모든 일이 유지되고 규율과 권징이 실되기 위하여.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장로교단들은 이러한 성경적인 노회의 성격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회는 성경적 권위로 지교회를 시찰, 치리, 교훈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장로교단의 노회는 지교회의 행정 문서를 처리하는 기관이나 목회자들의 친목, 협력 단체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일이 지속된다면 장로교회로부터 독립 교회의 이탈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지로 많은 교회들이 명목상 장로교회라고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전혀 장로교회적이지 않는 교회 운영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장로교회의 독립 교단(회)화를 막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장로 정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성경적인 교회 건설에 대한 확고한 사명과 노력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3문. 과연 목사는 사도와 선지자의 권위를 대신할 수 있나요?


1. 사도와 목사와의 함수 관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 28:18-20)을 온전하게 수행하도록 자신의 몸된 교회 가운데 여러 가지 직분(offices)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직분들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비록 육신으로는 신자 곁을 떠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 우편에 좌정해 계시지만, 아버지와 그의 영(성령)으로 구원의 경륜을 이루실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통해 그의 택한 백성들과 ‘임마누엘’로서 함께 하시기로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하사하신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머리요 왕이신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서 그의 교회를 친히 다스리시는 존귀한 수단(mean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다고 하여 권위와 질서없이 아무렇게나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분의 의도대로 교회를 이끄시는데, 가장 적합한 도구의 성격으로 사용되는 것이 교회의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허락하신 직분들은 매우 귀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교회의 직원으로서 선지자, 사도, 목사(장로)-목사란 목회 성격상의 명칭이고, 본 직명은 장로입니다(딤전 5:17)-와 집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선지자직과 사도직을 가리켜 교회의 기초 혹은 임시 직원라고 부릅니다. 이 직분들은 교회의 창설과 관련하여 일정 기간동안 특별한 목적과 사명가운데 주어진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이들의 가르침과 복음전파로 인해 교회의 초석을 놓으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비범하고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었으며, 기독 교회의 기초가 성립된 이후에는 이들의 직분과 능력과 은사는 더 이상 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계승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어느 목사에게 사도권이 계승되었다든지, 사도적능력과 은사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든가, 목사와 사도를 구별없이 칭하는 일은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기본적인 규정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소행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장로교단의 헌법에도 이 부분이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직과 사도직에 비해 목사와 장로와 (안수)집사라는 직분은 평범하면서도 항존적인 직원을 가리킵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선지자와 사도의 독특한 부르심과 사역과 관련한 의미이며, ‘항존적이다’는 말은 선지자직과 사도직에 비해 교회의 직분으로서 영속적인 성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시대 이후 교회의 모든 직분은 평범한 사람 중에 소명을 따라 주어질 것이며, 주님 오시기까지 교회를 세우는 역할로서 연속될 것입니다. 


2. 과연 목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권위를 대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동시에 ‘예’와 ‘아니다’라는 답변이 다 가능합니다. 먼저 선지자와 사도들과 목사들간의 권위가 차별없이 똑같다는 관점에서 묻는 질문이라면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같이 선지자와 사도는 주님의 교회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한 방식과 목적에서 비범한 능력과 은사를 허락하신 직원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직분의 성격상 목사직과 구별되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이 점을 잘못 이해하면 선지자와 사도는 곧 목사 혹은 사제(교황)과 같다는 단순무식한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사도적 계승권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나 선지자와 사도들의 능력과 은사가 목사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선전하는 신사도적 교회나 오순절 교회(일부 복음주의 교회)의 주장은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선지지와 사도들의 권위가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을 맡은 목사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위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언급한 말씀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일에 수종든다는 의미에서 목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르심의 방식과 사역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났을 뿐이지, 부르심과 사역의 목적은 다를 수 없다는 차원에서 선지자와 사도와 목사가 지향하는 영적 권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목사가 계승해야 할 선지자와 사도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이 추구한 말씀의 권위입니다. 따라서 목사로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지자와 사도가 전한 말씀을 바르고 정확한 의미를 되살려서 그 내용으로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금은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지금은 더 이상 성경에 기록된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치 않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주신 적절한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교회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은혜의 수단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게 하실 목적으로 교회가운데 목사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주님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시는 방식으로서 말씀 선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를 통해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서 증거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선지자와 사도에게 주셨던 은혜를 재현하시며, 그들이 증거한 말씀의 권위를 유지해 가십니다. 고로 오늘날 사도나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까지 상실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3. 노회의 의미와 역할

님께서는 사도의 역할을 감당하는 곳이 노회가 아니겠는가 하시면서 노회의 기능과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듯 보이는 여러 가지 교회 현상에 대해 지적하였습니다. 이해와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여전히 장로교 정치 제도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노회를 언급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사항만 언급하겠습니다. 노회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노회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장로들의 모임’ 혹은 ‘장로들의 회’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노회는 교회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성경적인 교회 기관입니다. 지교회들의 대표자로 선임된 목사, 장로들이 한데 모여 지교회에서 당회의 규칙대로 제출한 여러 가지 의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결을 위해 말씀대로 권징을 성실히 시행해야 합니다. 장립, 고시, 안수등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관할하는 영적 사업을 수행합니다. 또한 지교회간의 성경적, 신앙고백적 일치를 통해 교회적 연합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모든 노회의 기능은 성경에서 근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노회의 성경적인 직능과 적용은 곧 성경적인 지교회를 세워가는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의 많은 장로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건전하고 성경적인 노회 중심의 장로교 정치를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배격하기까지 합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적인 교회 정치에 대해 정직하게 소개할리 만무합니다. 교회 정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은 곧 교회의 본질과 능력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열악한 영적 현실의 실상을 깨달은 자라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진리로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4문. 세계 개혁교회 분포와 카나다 한인 개혁교회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프레이즈 님께서 카나다의 개혁 교회의 분포 현황에 대해 궁금해 하셨는데, 사실 카나다 지역만 한정해서 말씀드리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첫째는, 앞선 말씀드린 것 같이 적어도 저의 경험상(제가 방문해 본 카나다 서부 지역에 한해서) 한인 교회중에서 소신있게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교회를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동부에 있는 토론토 성약 교회에 대해서는 문서를 통해 소개받은 바가 있지만 직접 방문해 보지 못한터라 현재로선 뭐라 확신있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둘째로는, 카나다 안에 개혁교회를 추구하는 몇 몇 교단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주무대는 미국이고, 좀 더 넓게 본다면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장로교회나 개혁교회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지교회를 거명하기 보다는 신학적, 신앙적, 교리적인 면에서 개혁주의를 추구하고 내용면에서 충분히 교류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교단을 소개해 드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먼저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두 개의 큰 모임과 참여하는 교단(회)들을 소개해 드리지요. 이 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는 교단들은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추구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교단에 속해 있는 모든 교회가 개혁교회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 모임에 소속되어 있는 두 개의 한국 장로교회 교단과 총회만 보더라도 교단적으로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모임에 가입하고 있는 것과 실제적으로 지교회로서 개혁교회를 이루어가는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의 이름만 보고 지교회도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소개해 드리는 두 모임에 속한 교단(회)들은 교회 헌법과 규정상 전통적인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분별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1. 세계개혁교회협의회, ICRC(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http://www.icrconline.com

바른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세계 개혁 교회들의 연합체로서, 1982년 네델란드에서 첫 회합을 가진 이후로 매년 4년마다 대륙별로 모임을 갖습니다. 1997년 한국에서도 개최된 바 있으며, 최근에 남아프리카에서 개최된 후(2005), 2009년에는 뉴질랜드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가입 교단(회)들

개혁장로교회(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캐나디안 개혁교회(Canadian Reformed Churches) 

네델란드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콩고 고백개혁교회(Confessing Reformed Church in Congo)

영국, 웨일즈 복음 장로교회(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in England and Wales) 

아일랜드 복음 장로교회(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Ireland)

인디아 장로교회(Presbyterian Free Church of India)

스코트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남아프리카 자유 교회(Free Church in Southern Africa)

북미 자유 개혁 교회(Free Reformed Churches of North America)

남아프리카 자유 개혁 교회(Free Reformed Churches in South Africa) 

인도네시아 개혁교회(Gereja-Gereja Reformasi di Indonesia)

정통 장로 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동호주 장로 교회(Presbyterian Church of Eastern Australia)

한국 고신(측) 교회(Presbyterian Church in Korea (Koshin) 

미국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네데란드 개혁 교회(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스페인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of Spain)

뉴질랜드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of New Zealand)

남아프리카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of South Africa)

아일랜드 개혁 장로 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Ireland)

북미 개혁 장로 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북동 인디아 개혁 장로 총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North-East India Synod) 

북미 연합 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2. 북미장로개혁교회협의회(The 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http://www.naparc.org


이 단체는 북미주에 있는 보수적인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들로 구성된 연합체입니다. 이 단체에 소속하는 교단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3대 개혁신조(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신앙고백,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고백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유수한 몇몇 장로교단과 개혁교단은 불참하거나 거절당한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북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국연합장로교(PCUSA)는 그들의 자유주의적 신학 성향 때문에 거절되었고, 네 번째로 큰 복음장로교회(EPC)는 여성안수 문제로 거절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교단 중 하나인 북미주 기독교개혁교회(CRCNA)는 최근 여성 안수를 허용한 이후 이 모임으로부터 출당 조치를 받았습니다. 이 중 몇 교단은 세계개혁교회협의회와 이 곳에 중복으로 가입되어 있습니다.


▶ 가입 교단(회)들

개혁장로교회(The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북미자유개혁교회(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North America) 

화란개혁교회(The 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s) 

미주한인 예수교장로교총회(The Korean American Presbyterian Church)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미국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케백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of Quebec (ERQ) 

북미개혁장로교회(Th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북미연합개혁교회(The United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궁금하신 점은 협의회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고요, 두 단체에 소속된 개별 교단(회)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원하시면 영어 이름을 카피해서 구글이나 http://www.answers.com 의 검색창을 활용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쓰고 보니, 질문하신 내용에 흡족한 답변이 아닐 것 같아서, 제가 카나다에서 경험한 몇몇 개혁교회를 소개해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캐나디안 개혁교회(Canadian Reformed Churches) 

북미주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개신개혁교회(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America) 

정통개혁교회(Orthodox Reformed Churches) 

언약개혁장로교회(The Albany Covenanted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이중에서 언약개혁장로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교회들은 북미주 기독교개혁교회에서 파생되어 나왔거나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북미주 기독교개혁교회는 미국 미시건 주의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칼빈 신학교로 유명한 교단인데요, 역사적으로나 외형적으로 북미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개혁교회임에는 틀림없지만, 해가 갈수록 전통적인 개혁교회로부터 탈피 혹은 탈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에 비해 캐나디안 개혁교회, 개신개혁교회, 정통개혁교회는 나름대로 전통과 보수를 잘 유지하고 있는 개혁교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단 분리의 이유가 되었던 첨예한 신학적 논쟁점을 제외하고는, 현상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중에서 캐나디안 개혁교회는 고신 교단과 독립 교단을 통해 한국에 많이 소개되었습니다만 개신개혁교회와 정통개혁교회는 상대적으로 낯설어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배움과 도전을 얻은 개혁교단들입니다. 언약개혁장로교회는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정신을 그대로 받고 있는데, '엄숙동맹'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문자적으로 이해할만큼 엄밀함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있지만, 칼빈 후기 종교개혁자들(특히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에 대해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교회입니다. 카나다에 있는 개혁교단(회)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지역, 위치등)도 위에 말씀드린 방식으로 인터넷을 활용하시면 간편하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불꽃같은 개혁신앙으로 늘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카페지기 주나그네





5문. 교회절기에 관한 답변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그 부활이 우리의 소망인데..아니면 기존 교회에서 지키는 그런 방식의 부활절을 지키지 말라는 것인가요..? 


답변드립니다.


교회 절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물음은 비단 우리 시대의 교회만의 고민이 아니라 교회 역사속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주제였습니다 교단과 신학과 전통에 따라 교회 절기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지만, 교회사 속에 나타난 절기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과 교회 전통에 따라 모든 절기를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견해, 둘째,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기와 그렇지 않은 절기를 절충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견해, 셋째, 주일을 제외한 일체의 교회 절기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고 바람직합니다. 성경과 종교개혁자들이 이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실증해 드리기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1. 성경에서 말하는 절기에 대한 의미

성경에는 많은 절기와 예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의식법에 해당하는 내용들입니다. 즉 예수님과 관련된 진리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제공되었던 도구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이후에는 구약적 절기와 예전들은 더 이상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진리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 성도들은 더 이상 진리의 그림자와 같았던 절기와 예전들을 지키거나 집착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은 매우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8-12)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 4:8-11)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위에 기록된 말씀들은 이미 초대 교회 때에 절기 성수에 관하여 논쟁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볼 때에, 이 문제는 교회나 성도 개인의 판단에 맡겨둘 일이 아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절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 주었던 것입니다.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도들의 동일한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실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2. 장로교회, 개혁교회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절기의 의미

대부분의 장로교회,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은 앞서 말씀 드린 절기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구약적 절기나 임의로 만든 절기를 성수하는 것을 비성경적, 비신앙적 태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5절, 6절

5. 이 언약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에 각기 다르게 집행되었다. 언약이 율법 하에서는 약속들, 예언들, 제물들, 할례, 유월절 양, 그리고 유대 백성들에게 전해진 다른 모형들과 의식들에 의하여 집행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였다(히8-10장; 롬4:11; 골2:11,12; 고전5:7).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약속된 메시야(고전10:1-4; 히11:13; 요8:56)를 믿는 신앙으로 선택자들을 교훈하며 세우는 데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그 메시야로 말미암아 그들은 완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는데 이를 “구약”이라고 부른다(갈3:7-9,14).


6. 복음 하에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골2:17) 나타나시게 되자, 이 언약은 말씀 선포와, 세례와, 주의 만찬인 성례 의식으로 집행되었다(마28:19,20; 고전11:23-25). 이 의식들은, 수적으로는 몇 안 되어 단조롭고, 그리고 외적인 화려함도 없이 집행되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그 언약이 모든 민족들(마28:19; 엡2:15-19),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더욱 충분하고, 확실하고, 영적인 효과를 가지고, 제시되고 있다(히12:22-27; 렘31:33,34). 이를 “신약”이라고 부른다(눅22:20).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갈3:14,16; 행15:11; 롬3:21-23,30; 시32:1; 롬4:3,6,16,17,23,24; 히13: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장 3절

3. 일반적으로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율법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미숙한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식법(儀式法)을 주셨다. 거기에는 몇 가지 모형적인 의식(儀式)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예배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베풀어질 은혜를, 그가 행하실 일들, 그가 받을 고난들, 그리고 그의 공로로 주어질 유익들을 예표(豫表)하고 있으며(히9; 10:1; 갈4:1-3; 골2:17), 또한 부분적으로는 도덕적인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이 제시되어 있다(고전5:7; 고후6:17; 유23). 그런데 이 모든 의식법들은 지금 신약 시대에는 폐기되었다(골2:14,16,17; 단9:27; 엡2:15,16).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09문

109 제 이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 이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三位)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든 것(그림, 조각상, 영상화)이며, 이 형상이나 혹은 이 형상 안에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일이며,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속한 것을 섬기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고 취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명목으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케하는 미신적 고안,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 방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24장(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주일

고대 교회는 교회의 집회를 위하여 주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 이래 주일이 교회의 집회일로 확정되었으니, 이 주일은 거룩한 안식을 위한 것으로 예배와 사랑을 위하여 오늘날까지 옳게 보존된 교회의 실천적 관습이다. 


사순절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단편집) 3, Ⅰ, 824이하>.


프랑스 신앙고백서 제24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변호자이시며, 또 그가 자기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기도하도록 명령하시므로,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범과 일치되는 기도가 아니면 올바른 것이 못되기 때문에 죽은 신도들을 대신하여 드리는 기도에 관한 착상은 불합리하며 예배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유도하는 사단의 생각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모든 다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을 해치는 것이므로 배격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연옥이 동일한 출처에서 나온 착각으로 생각하며, 거기에서 또한 수도원의 서약, 성지순례, 성직자의 결혼금지, 육식금지, 특정 제일(祭日)들(성일<聖日>들=부활절 및 성탄절 등)을 지키는 의식들, 고백제도, 면죄부 그리고 사죄와 구원을 얻는 공적을 세우려는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생겼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배격하는 까닭은 그것들에 부착되어 있는 공로사상만이 아니고 그것들이 사람들의 양심에다가 멍에를 메우는 인간의 발명이기 때문이다. 


3. 종교개혁자들의 절기에 대한 이해

쯔빙글리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쯔빙글리의 67개 조항,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 중에서)


칼빈 

“그러므로 특정한 날들의 미신적 준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 밖에 없다”(제네바 1차 교리 교육서 4계명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무한히 귀중한 피의 값으로 교회의 자유를 사셨건만 그 교회가 잔인한 압제에 눌리며 산더미 같은 전통에 거의 압도(각종 의식과 절기들)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 (중략) …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고안한 가장된 예배 행동을 아무리 우리가 기뻐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곧 판단할 수 있다. 또 확실히 주께서는 친히 여러 구절에서 그런 행동들을 명백하게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심히 미워하셨다.”(기독교강요 4.13.1 중에서)


존 녹스

“금식일의 미신적 준수, 성탄절, 주현절 등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율법, 회의, 율령으로써 사람들의 양심에 부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전적으로 몰아내야 한다고 판단하며 더 나아가, 그러한 가증스러운 것들의 준수를 고집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세속 행정 장관의 처벌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한다”(제자도 제 1권 중에서)


4. 청교도들의 절기에 대한 이해

17세기 초반, 영국 칼빈주의적 청교도들의 신앙을 핍박하고 해제시키기 위해, 법정과 주교들에 의해 결정되어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 조항』을 목회자들에게 강요한 사건이 있었다. 이 5개 조항의 항목 중에 교회 절기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승천절등을 지킬 것” 이같은 조치에 대해 장로교인들은 주일 이외에 부활절, 성탄절 등의 절기들은 지키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부활절은 Eostre라는 이방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한 것이며, 성탄절은 로마의 신 Satum을 기념하녀 제정된 축제임을 강조하였다.


결 론

오늘날 교회 절기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인본적으로 변질되어가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입니다. 교회 절기에 관한 잘못된 이해와 변질은 성경과 교회 역사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고 참된 성경 이해와 교회 역사는 교회 절기를 (율법적, 의식적으로) 지키는 일이 하나님앞에 얼마나 불경스러운 행위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는 교회 절기에 관한한 너무나 무지하고도 안일하게 대처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이 큰 부담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예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성도의 삶이라면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바르지 못한 습성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주일과 성례-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절기와 의식이 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아나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참된 자유를 만끽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카페지기 주나그네 


추가 덧글 : 부활절, 성탄절등 교회 절기를 아무런 비판적 성찰없이 답습하고 있는 한국 교회 형편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저뿐 아니라 저희 모임의 성도님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피해가고 싶은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고집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통해 옳다고 증명된 일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정직하게 적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따라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여하튼 교회 절기에 대해 보다 진실하고 진지한 논의가 요청되는 때입니다.




6문. WCC란 정확히 무엇이며 이것이 한국 기독교 장로교 교단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나요?


'에큐메니칼' 용어 정리 

WCC(세계교회협의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단체의 신학적 기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 교회 연합 운동의 실체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에큐메니칼’ 혹은 ‘에큐메니즘’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눅 2:1; 마 24:14)에 서 직접 사용된 표현인데, ‘거주한다’는 뜻의 ‘오이케오’(oikeo)와 ‘집’ 또는 ‘거처’를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 혹은 ‘사람들이 거처하는 전 세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만 초대 교회 이후로, 이 말은 ‘복음으로 접촉된 세계와 전 세계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운집된 교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오이쿠메네’라는 단어가 ‘전 세계 교회의 연합’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로 확장된 데에는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공헌이 컸습니다. 서머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오이쿠메네’와 ‘교회’ 개념을 연결시켰으며, 오리겐은 ‘오이쿠메네’를 ‘교회’와 동일시한 최초의 교부였습니다. 그래서 정통 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콘스탄티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후에 개최된 초대교회의 회의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령 325년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정죄하였던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회의라는 식으로 말이죠. 당시의 교회 회의들이 교회 전체를 위한 보편타당한 신학과 교리를 정초하였다는 점에서 ‘오이쿠메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에큐메니칼’ 성격을 잘 드러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의 '에큐메니칼' 신학과 변질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오랜 세월 집권하면서 ‘에큐메니칼’이라는 개념은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적어도 16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식의 전통적인 교회관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 말에 이르러 스콜라 주의의 발흥과 인문주의의 도전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래의 입장을 수정, 변경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트렌트(Trent) 공의회(1545-1563)인데요, 이 시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오히려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인해 잃어버린 진리의 초석된 사상(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들을 온전하게 회복하는데 관심을 가졌던데 반해, 로마 카톨릭은 이 회의를 통해 다른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이 극단적인 배타성이 있다고 판단하고서, 타 종교에 대해 더 이상 기독교 진리의 유일성을 강조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세기가 흐른 1960년대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진리관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라는 방식으로서 로마 카톨릭의 생존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로마 카톨릭은 지금까지 세계 종교들 사이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범세계적 일치운동’(ecumenical ecumenism)을 주도하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이론을 정립했다고 평가받는 파니카라는 사제는 다른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보편적 교회의 신앙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정상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든 길들이 사라진다면 정상 자체도 사라질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로서 자신과 로마 가톨릭의 종교다원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대변했습니다. 이처럼 1960년대를 분기점으로 하여 로마 가돌릭에서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곧 종교다원주의 운동과 맥을 같이 하였습니다. 


W.C.C(세계 교회 협의회)와 개신교의 부정한 만남

그런데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개신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W.C.C를 교회간의 연합을 도모하는 협의체 정도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기독교적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요체입니다. 19세기에 들어서 산업혁명으로 인해 세계간의 거리가 좁아졌고, 세계 교회들은 국제적 연합과 일치의 충동을 받게 됩니다. 19세기 중반부터 기독교적 동맹과 연합을 목적으로 한 국제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기독교 국제 단체들의 결성은 기독교의 보편적인 진리를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기독교 사상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의 한계점과 몰락과 함께 20세기 이전의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과 궤를 같이 했던 기독교 선교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반성과 대안을 찾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유일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반기독교적 사상이 확산되어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세계 대전을 전후로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식민지들이 독립하자, 정복주의 선교 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선교지 최일선에서 활동하던 많은 선교사들은 좀 더 현실적인 선교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타 종교, 문화, 사회와의 대립과 갈등 보다는 상생과 공존을 모색하는 선교적 개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번째 W.C.C 총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교단과 교파간의 신학적, 교리적 차이를 접어둔 채, 외형적인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한 W.C.C 는 ‘초교파적 만인구원론의 선교신학’을 배태할 수 밖에 없었으며, 급기야 ‘초종교적 만유구원사상으로, 즉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W.C.C에 공(功)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의 관심사를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분야로 확대함으로써 교회의 사회 참여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W.C.C 의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 논리는 되려 교회의 속성과 본질을 호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영혼 구원을 사회 문제로부터의 구원으로 변질시켰으며,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조건으로 격하시키고 말았습니다. 


특히 1961년 뉴델리 총회부터 타종교와의 대화가 본격적인 의제로 다루어지면서 W.C.C는 로마 가톨릭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서는 영성 신학을 주제로 삼으면서 극단적인 성령 운동과 동양의 신비주의 운동등 다양한 이교도적 종교 영성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혼합종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신학적으로는 성경 비평을 일삼는 자유주의 신학을 영입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며, 절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절충한 제3의 신학이라는 애매모호한 신학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W.C.C와 한국 기독교 장로교회와의 역사적 연관성과 반성

장로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W.C.C와의 결합점은 어떠한 형태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불행하게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W.C.C가 깊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에큐메니칼 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8.15 해방이후의 일입니다. 1960년 이전에 한국 장로교회는 세차례의 분열을 맞게 됩니다. 첫 번째가 신사 참배 문제로 인한 고려파 교단의 분열입니다. 두 번째는 김재준 목사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기동으로 인한 기장측의 분열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큰 분열 사건으로 기억되는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리입니다. 그런데 이 분열은 W.C.C 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비롯되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기장측은 W.C.C의 기독교 연합 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윤선 박사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장로교회 인사들은 W.C.C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이들은 신학적 좌경화의 물꼬를 튼 W.C.C보다는 보다 보수적인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와 연관을 맺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1954년 W.C.C에 총회파 인사 몇 사람이 참석한 이후, 총회파 안에서 W.C.C에 찬성하는 측(통합측)과 반대하는 측(합동측)이 형성되면서, 양 그룹이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힘겨루기를 하던 중에 통합측이 별도의 총회 모임을 가짐으로써, 결국 장로교 총회파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1962). 


이후 통합측은 기장측과 함께 W.C.C 에 적극 가담하고 있습니다. 합동측은 W.C.C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분열된 두 교단과 더불어 한국 교회의 연합 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73년부터 교단별 통합행사로 시행되고 있는 부활절 연합 집회와 1970년 후반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 엑스폴로 대회,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의 대규모 대형집회들입니다. 작금에는 이러한 초교파적 대중 집회들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 교단들이 참여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중에서도 한국 장로교회가 과거의 분열의 아픔 역사를 되새기지 않고, 오늘날 교세를 이용하여 한국 교회의 일치와 연합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한국 장로교 총연합회라는 특별기구를 만들어서 타교단를 넘어 가톨릭과의 연합을 꾀하려는 모습은 심히 완악하고 부패한 교회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적 교회 연합과 일치

사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개념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반드시 성경적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성경적 조건은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참된 앎과 고백과 실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와 고백이 하나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한가지 진리를 말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4장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해 가장 중요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묵상해 보십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행 4:1-15) 


밑줄 친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다. 참된 신앙은 하나이지, 둘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 분의 부르심과 소망이 하나이며, 믿음(신앙)과 세례(성례)와 주(고백)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위에서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가능합니다. 이 거룩한 교회의 사명을 위해 더욱 오직 진리가운데 착념하시기 바랍니다. 




7문. 개혁주의 입장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아는분 계십니까?

예를 들어 전 계시록에 나온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 전부를 가르키는 표현으로 봅니다. 하지만 세대주의 종말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실제로 144,00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와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에스겔 11:17; 28:25 를 인용하며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걸 예언의 성취로 봅니다. 말고도 겔 36:34 미가 4:6 을 인용.

또한 겔 38:1,5,15 를 인용하면서 조만간 러시아가 리더가 되어 5개의 회교국가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침략할 거라고 해석.

그리고 계 13:13 에 나오는 666을 RFID 칩으로 해석.

등등 참 많은데 이 부분들이 성경적으로 어떻게 비판받아야 하는지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의 일들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unshakbale 님의 질문에 관한 답변입니다. 


unshakbale 님은 세대주의적 종말론 입장에서 주장하는 몇 가지 예를 열거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대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간략하게나마 세대주의 종말론의 역사적 배경과 강조점과 기독교에 미친 영향력과 파장에 대해 기술한 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의 비평을 시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대주의’와 ‘세대’라는 용어

'세대'라는 말의 헬라어 ‘오이코노메오’는 ‘청지기 사무를 보다’라는 뜻으로, 명사형인 ‘오이코노모스’는 우리말로 ‘청지기’라는 말로 이외에도 ‘직분’, ‘경영’, ‘경륜’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곤 합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어떤 일정한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는 기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즉 세대주의는 세상을 하나님의 뜻(경륜)이 이루어지는 장(場)으로 간주하고서 시간의 과정 안에서 여러 단계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이 성취되어 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단계마다 확실하게 구분되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세대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주의자들은 단계적 세대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삼았는데, 이 계시는 점진적으로 마침내 완전한 종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이러한 신학 사상을 가리켜 ‘세대주의 종말론’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세대주의 개괄적인 역사와 한국 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

‘세대주의’란 19세기에 출현한 (종말론적) 신학의 경향으로서 흔히 ‘세대주의 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일랜드계 영국인 존 넬슨 다비(J.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그는 변호사였으나 회심이후에 그의 직업을 포기하고 영국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회의 길에 접어든지 일 년 만에 수백 명의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킬 만큼 유능한 목사였으나, 대주교의 교령에 반발하여 국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플리머스 형제단’(Portsmouth Brethren)이라는 신령주의적 성경 연구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신앙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플리머스 교단의 대표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의 예언에 기초한 독창적인 성경해석법을 완성시켜 나가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10세의 어린 성령 운동 지도라는 ‘맥도날드’양의 예언(대환난이 있기 전에 휴거되는 환상)을 전해 듣고서 그녀의 휴거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대주의적 성경해석방식을 구체화하였습니다. 


다비의 대환난 이전의 휴거설과 7년 대환난과 이후에 전개되는 천년왕국 사상이 주장될 때만해도 반대 주장도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의 스코필드(C.I. Scofield) 박사의 손질을 거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무디 성서신학교 출신으로 회중 교회 목사였는데, 다비의 세대주의적 종말 사상에 심취되어 자신의 스코필드 관주성경(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 1917)의 주석에 그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스코필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다비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스코필드의 주석 성경의 유명세와 더불어 삽시간에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어느덧 세대주의 종말론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성경적인 종말론 사상으로 인식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무디 성서학원의 아이언싸이드(Ironside)를 비롯해서 달라스 신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론화 작업과 D.L 무디와 R.A. 토레이같은 유명 기독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19세기 이후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확고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종말론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세계 선교화의 추세에 따라 한국에 들어 온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이 당시 기독교 종말론의 정설로 인식되던 세대주의 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은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깊이 관련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세대주의 종말론 신봉론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요한계시록을 많이 강해하신 길선주 목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초기 신학자들도 세대주의 종말론의 여자적 논리성에 매료되었는데, 한국 정통 보수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 박사와 성서침례신학교 장두만 교수 같은 이는 세대주의 종말론주의에 확신을 가졌던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세대주의 신학(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사상)은 불안한 사회 현실과 맞물리면서 보다 극단적인 종말론 형태로 변형을 거듭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오용과 변질의 중심에서 가장 큰(나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조용기 목사입니다. 조 목사는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기초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기록된 순서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말세에 될 일의 시나리오를 작성하였습니다. 1992년에 한국은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일파의 극단적 종말론 운동은 조 목사의 세대주의적 종말론 해석의 완곡한 적용에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조 목사는 단일교회로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와 산하 집단을 통해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한국적 토착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미선교회의 환상이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의 환상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세대주의 신학의 강조점(특징)

세대주의 신학의 세계화가 있었던 만큼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다비와 스코필드를 이 이론의 창시자로 볼 때, 두 사람이 주장한 범위안에서 세대주의 신학의 포괄적인 신학적, 교리적 요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자적인 구약과 신약 해석에 근거하여 미래를 연속적인 시대의 도식으로 묘사한다.

--> 대개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 4장은 교회의 휴거를 예언하며, 6-10장까지는 전환난 3년 반을, 11-19장은 후환난 3년 반을 예언하다고 주장합니다. 후환난 시대의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도, 그리스도는 지상에 강림(둘째 강림)하여 천 년간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고 천년왕국을 건설합니다. 이 후 사단은 잠시 놓였다가 백보좌 심판이 있으며,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가 건설된다고 합니다. 특히 조 목사는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이러한 계시록의 문자적 성취 과정을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해서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스코필드의 일곱 세대 구분 

① 낙원의 무죄세대 ② 홍수까지의 양심세대 ③ 인류 통치세대 ④ 아브라함의 소명으로 시작하는 약속세대 ⑤ 시내산에서 골고다까지의 율법세대 ⑥ 은혜세대(교회) ⑦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세대 

-->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작용하며, 각 시대는 자연인에 대한 새로운 시험(test) 기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고 주장합니다.


3)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

-->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지연되었기에 하나님이 교회의 우회로를 택했다. 교회세대는 결국 과거의 이스라엘과 미래의 이스라엘 사이에 놓인 중간단계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으로 교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칠년 대환난이 끝난 이후에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7년 대환난 이전에 ‘하늘로 들림’, 즉 ‘휴거’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임하는 7년 대환난을 겪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중재림이다.

--> 세대주의는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 때에 교회와 성도들은 첫 번째 부활을 경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주님의 첫째 재림은 심판의 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재림입니다. 이후에 지상에서의 7년 대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이후에, 주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7년 공중혼인잔치를 마치고 지상 강림하시는데, 이것이 둘째 재림이요, 마지막 ‘지상 재림’인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주님은 모든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두심으로서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천년왕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5) 문자적 해석에 천착한다.

--->세대주의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대부분의 숫자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144,000’이라는 숫자 역시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혼인 잔치를 즐길 때, 지상에 남겨진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숫자로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회개를 하게 된다고 봅니다. 계 20장의 천년왕국도 문자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이후에 땅위에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건설해 직접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도 7년 대환난의 7년과 심지어 계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묘사된 모습마저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4.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세대주의 종말론 비판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몇 편의 논문으로도 모자를만큼 세대주의 신학은 복잡,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특징을 보더라도 세대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신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언급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견지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평가해 보겠습니다. 


1) 세대주의 종말론 해석법의 문제

보통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문자적 해석 방법 ② 영해적(spiritualizing) 방법 ③ 문자적 - 영해적 방법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무조건 적용할 수 없지만, 대체로 개혁주의자들은 세 번째 해석 방법을 존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어떤 문학 형태로 고정할 수 없을 만큼, 저술 원인과 방식에서 그 어느 성경보다도 독특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이 하늘의 환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탁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천상적 경험은 지상의 문자적 형식으로서 기술한 것입니다. 계시록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적 초월성을 함유한 동시에 세상에 내재된 관념으로 실제로 추론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진술을 한쪽 방향에서 고정된 채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 21 장에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소위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내가 본 천국“ 간증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데, 과연 환상가운데 요한에게 보여 진 새 예루살렘이 진귀한 보석으로 치장된 새로운 문명 세계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또한 계시록의 ’144,00‘이라는 숫자는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특정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년’은 과연 인류가 경험한 10세기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 관점에서의 초월성과 상징성과 묵시성을 지극히 인간적인 상식과 이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억지스런 시도가 바로 세대주의 종말론의 특징인 동시에 한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환상과 상징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라는 구도 속에서 성경의 유기적 진술에 근거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2)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 해석하는 문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 관계를 대립 혹은 단절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언약적 통일성 안에서 보는 개혁신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옛 언약(출 20:1-17, 24장)은 이스라엘과만 맺은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언약 역시 교회와만 맺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만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구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히 8:10-11). 새 언약은 또한 옛 언약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옛 언약의 성취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유대인에게, 교회를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만 적용하는 이분법적 도식은 언약의 통일성적 유효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오류인 것입니다. 


3) 이중 재림설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환난을 전후로 있을 그리스도의 이중 예정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그러니까 환난 전에 첫 번째 (공중) 재림이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교회와 성도들이 들림(휴거)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휴거되지 못하고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신 세계의 심판을 위해 대환난을 겪은 후에야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또 한 번 반복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중 재림에 대해 말하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존 T. 샤프트라는 사람은 그의 책 『세상을 진동시키는 종말사건』을 통해 교회와 성도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단 한 구절이라도 찾는 사람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 4만 명의 목회자들에게 통지를 했으나 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단회적 재림은 정통 교부들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칼빈과 루터,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공히 지지받고 있는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적어도 19세기 세대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중 재림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7년 대환난을 전후로 각각의 다른 대상을 전제한 첫 휴거와 재림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의 말씀대로 인격적이며, 육체적이며, 가시적이며, 갑작스러우며, 영광스럽고 승리의 단 한 번의 재림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시기는 하나님외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의 종말, 죽은 자의 육신의 부활, 그리고 모든 악의 세력의 파멸과 마지막 심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4)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 문제

계시록 10:1-3에 나와 있는 ‘천년동안’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셋 또는 네 가지 해석의 경향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이 앞에 오면 전천년설이요, 뒤에 오면 후천년설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천년의 위치는 정반대이지만 천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편 무천년주의는 형식상 후천년설에 속하지만 천년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중 전천년설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지는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입니다. 후자는 전자의 지나친 주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은 재림을 단일 사건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진술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역사적 사건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개의 천년설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다소 견해차가 있습니다. 


기독교 3세기의 이레니우스, 저스틴, 터툴리안, 락탄티우스와 같은 정통 교부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교회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무천년설이 유행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지지가운데 무천년설은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즘,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신령주의적 급진적 개혁세력들에 의해 현세적 천년왕국 사상이 번성하였습니다.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 대부분은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에 머물면서도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인 세력의 전천년주의 운동의 폐해를 지켜보면서 천년왕국설을 개진하는데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청교들의 신대륙 이주 이후 기독교 복음의 번성과 함께 낙관적인 후천년주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프린스톤 3인의 핫지, 댑니, 워필드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신학자들에 의해 후천년설이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와서 프랑스 혁명 시대 이후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전천년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사상과 천국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가 맞물려 예언 집회가 유행하던 때에, 다비와 플리머스 형제단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나타났습니다. 불과 몇 십년만에 이 사상은 20세기의 복음주의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자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천년왕국설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네 가지 입장 모두 나름대로의 성경과 현실에 대한 주장과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배제하고라도 세 가지 주장중에 어느 것 하나가 유일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이전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하게 이루어진 천년왕국에 대한 논의 과정을 지켜볼 때, 문자적-영해적 해석을 근간으로 한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천년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천년이 아니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순서들 역시 문자적인 예언이 역사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천년왕국은 문자적 지상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 상태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시간을 집약적으로 상징화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천년 동안 왕노릇하다’는 계 20:4 말씀 역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의 성도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지상과 하늘에서 메시아 왕권이 발휘되는 이중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상과 천상을 통(通)하는 메시야의 ‘천년왕국’은 사단과 그의 대행자인 악의 세력들이 받을 아마겟돈 최후 전쟁과 더불어 임하게 될 주의 재림과 마지막 대심판으로 끝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 상태가 완성될 것입니다. 


5) 144,000과 짐승의 표(666),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자들은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숫자 ‘144,000’을 민족적,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함께 교회와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 지상의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살아남은 자의 이스라엘(유대인)의 숫자가 144,000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전에 땅 위에 남아 있는 성도들 중에서 구원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요한계시록 말씀을 문자적으로 과도하게 해석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수를 상징화한 숫자입니다. 즉 이 숫자는 12×12×1000으로서 약속의서의 구약의 백성(구약의 12지파)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신약의 12사도)에다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숫자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숫자입니다. 따라서 이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딤후 2:19). 계시록 7장에서는 이들이 마지막 때의 환난과 사단의 시험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14장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받을 최종적인 운명(영벌과 영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세대주의는 이 ‘표’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억지보다 더한 주장입니다.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컴퓨터의 영자 철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하여 합하면, 666이라는 숫자를 얻게 된다고 말하고, 더러는 사품의 통상부호인 바 코드(bar cord)도 666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외에도 666이라는 숫자를 적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언급된 ‘표’는 당시 군인들, 노예들, 신전 봉사자들에게 소유물의 증거로서 낙인을 찍는 통상적인 전통에서 빌려 온 상징어입니다. 즉 ‘표’는 소유, 충성, 보호를 상징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에 적그리스도와 666이라는 숫자가 직접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지로 교회 역사를 보면, 666을 로마의 불신 황제들(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안등)과 관련시키거나 히브리어 원어를 환산하는 방식을 통해 설명하려했던 시도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전부 무익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666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짐승의 수를 판독하는 일보다 짐승의 도덕적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짐승의 머리이고,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입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부정하며, 복음의 본질을 파괴하려 합니다. 집단적 권력의 총체로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가 초대 교회에서는 네로로, 중세시대에는 교황으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바른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시록에 언급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전의 적그리스도 보다 훨씬 더 가공할만한 능력과 속임을 가진 인격체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와 짐승이 언제 어느 때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며 인내와 믿음가운데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계 13:10). 


6) 대환난 이전에 나타날 징조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대환난을 매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7년 대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교회와 성도의 공중 들림(휴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7년 대환난이 다가올 시기와 징조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세대주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한국의 세대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전도자라고 할 수 있는 조용기 목사의 해석을 살펴보기만 해도 얼마나 황당하고, 억지스러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 목사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과 『지금이 말세인가?』, 『다가올 미래』라는 책에서 7년 대환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세계적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EC통합을 로마 제국의 부활로 보면서 다니엘이 예언하고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열 발가락시대, 열 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봅니다. 또 마지막 전쟁을 중동전쟁으로 보고, 19991년 1월의 걸프전을 전주곡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페라스토로이카의 실패로 경제가 위축된 소련이 아랍의 동조를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3차 대전과 같은 전지구적 전쟁이 발생하는데,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으로 패하게 되고, 마침내 승리한 이스라엘이 시온산에 솔로몬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통일 유렵과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7년 대환난 직전에 일어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식의 세계 종말 시나리오는 너무나 많습니다. unshakable 님의 질문중 예를 드신 일부 내용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가상적 답변이지만, 그러나 ‘아님 말고’식의 무책임한 주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아무런 성경적 근거없이 계시록의 진실을 세계사적 사건에 끼워맞추려는 그런 주장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 조악스런 발상들이 세대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한다면, 왜 세대주의 신학(특히 종말론)을 경계해야 하는지 더욱 명백해 진다는 것입니다. 


답변을 마치면서...

오늘날 성경 중에 요한계시록만큼 관심이 많은 반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도 드뭅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계시록 해석과 주해와 설교가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으로 드리운 불안하고 암담한 시대 정서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영혼의 도피처를 찾는 심약한 성도들에게 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호기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를 일 없는 거짓 선생들이 거짓된 가르침과 선동으로 이들을 파멸로 인도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에 성도들에게 진정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과 신앙을 보다 바르고 정밀하게 추구해 가는 일입니다. 이 답변을 통해 성도로서의 이 거룩한 사명을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해석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홍창표, 천년왕국, 합신대학원출판부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교회


계시록에 대한 좋은 통찰과 전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8문. 재림이론에 대한 교파의 주장 대한 답변 


<braunyoo> 님의 질문 

안녕하셔요? 좋은 글을 통해서 도움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현재 중국 광동성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종말론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가 재림론 발전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성결교회는 세대주의 전천년설로 설명을 하고 있고 장로교회는 전천년설로 설명을 해오다가 무천년설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침례교회와 감리교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몇 일간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검색해 보는데 이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에 대한 자료나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하십시오.


반갑습니다. 중국에 거주하시는 분이시군요. 


어떤 일로 중국에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중국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가운데 안타깝고 암울한 내용이 많아 걱정이 앞서는데, 계신 곳은 어떠신지요? 중국 지도를 살펴보니, 광동성은 대륙 남단에 위치해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됩니다만, 이번 쓰촨성 지진 여파로 중국 대륙 전체가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염려되고 마음이 쓰이는군요. 그래도 믿음으로 사시니 위로가 됩니다. 하시는 사역가운데 주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소원합니다. 


주신 질문에 대해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braunyoo 님께서 주신 물음이 몇 일 전에 어느 분께서 궁금해 하셨던 <재세례파 종말론> 문제와 연관된 주제여서 반갑고요. 혹시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을 보고 하시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혹시 아니시라면 꼭 한번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braunyoo 님께서는 성결교회는 세대주의 전천년설, 장로교회는 전천년설에서 무천년설로 정리된 종말론적 입장이라고 보시면서,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의 입장에 대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님의 질문을 종합해 볼 때, 아마도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들의 공식적인 종말론(혹은 ‘천년왕국’ 사상) 사상을 비교, 분석하는 정보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논문 주제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제가 도움을 드리기에는 벅찬 내용인 것 같습니다. 주제의 범위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자면, 종말론이란 것이 어떤 신학이나 교리를 따라 형성되었기보다는 초교파적 혼합 양상을 띠고 있어서, 딱히 ‘어떤 교단의 공식적인 종말론 입장이 이런 것이다’하고 말씀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직까지 전교단적으로 통일된 종말론 사상을 한국 교회앞에 드러낸 교단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성경적 종말론 사상을 정립하는데 한국 교회와 교단들이 얼마나 무관심하며 무지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드리자면,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경우 한국 교단들 중에 이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은 교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1909년에 스코필드관주성경(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이 출간된 이후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은 세계 전도에 불타는 열심을 가진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특히 무디 신학교) 출신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 되었습니다.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으로 무장한 선교사들이 가장 환대를 받았던 곳이 바로 한국입니다. 엄밀하게 본다면, 한국 교회의 초창기 시절에 범교단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종말론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였습니다. 


각 교단별로 신학과 교회 정치는 달랐지만, 적어도 요한계시록 20장을 문자적,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데는 공히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복음주의와 회중주의 그리고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성결교, 침례교, 감리교 뿐만 아니라 성경적 보수주의를 표방한 장로교회 역시 역사적 전천년설을 신봉하였습니다. 적어도 1970년 중반에 조용기 목사에 의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주창되기 전까지만해도 역사적 전천년설은 신학과 교단을 초월한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종말론 사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에 의해 순복음 교회의 삼박자 오중복음이 위세를 떨치면서 서서히 세대주의 천년주의 사상이 한국 교회의 종말론 판도를 바꾸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세대주의 천년설이 빠르게 전파된 데는 임박한 종말과 문자적 천년 왕국의 도래를 강조했던 교회 부흥사들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느덧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세대주의 천년설이 종말론의 정설인 양 믿게 되었고, 급기야 이장림파 같은 극단적인 종말론 이단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단들의 흥망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여전히 세대주의 천년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와 같은 자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있는 이상, 아니 얼토당토아니한 신학으로 교권과 기득권을 유지한 채 한국 교회를 사망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거짓 스승들이 교단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세대주의 천년사상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굳이 교단의 신학적 차이(오늘날 복음주의라는 명제아래 모이는 한국 교회에 신학적 변별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습니다만)를 염두하여, 각 교단의 종말론 입장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결교와 침례교와 감리교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입장에서 세대주의 천년설을 혼용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결교의 경우, 교회 신조를 통해 전천년설 입장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인정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 사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침례교와 감리교회는 전통적으로 문자적 성경 해석을 강조하는 그들의 신학 전통으로 볼 때, 전천년주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두 교단이 취하고 있는 공식적인 종말론 사상이 역사적 전천년설인가 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인가를 확인할 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어라 답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제 서재에 교단별 교리를 적힌 책이 있어서 살펴보았는데, 양 교단의 종말론이 전천년주의 입장은 분명하지만, 어떤 형태의 천년설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로교회의 종말론에 대해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braunyoo 님의 생각에 따르면, 장로교회 종말론 사상은 전천년설에서 무천년설로 입장이 변화되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변화가 어떤 근거로 시도되었고, 또한 장로교회 전체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본다면, 종말론 사상에 관한 한 장로교회의 입장은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세 가지 전부였다고 보는 것이 정답입니다. 전천년설의 경우(물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한국 보수 정통 교회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박형룡 박사와 한국 보수 교회 신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지 래드(G. E. Ladd)가 대표적인 주창자였습니다. 후천년설은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와 19세기 개혁주의 정통 신학의 요람이었던 프린스톤의 세 명의 핫지(Charles),와 20세기 정통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 지성 워필드(B. B. Warfield)에 의해 지지되었습니다. 그런 반면 무천년설은 개혁주의 사상의 가장 확실한 계보라고 할 수 있는 어거스틴(Augustine)과 칼빈을 비롯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정통 개혁주의 교회사적 입장에서 종말론의 추이를 개괄한다면, 어거스틴을 전후로 전천년설에서 무천년설로,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에는 무천년설이었던 것이 독일의 종교개혁의 영향아래 전천년설로, 그리고 18세기 북미에서 후천년설로, 그러다가 세대주의 천년왕국의 출현과 더불어 전천년설로 갔다가 작금에 다시 무천년설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천년왕국을 중심으로 한 교회사적 개관은 장로교회의 경우에서도 신학뿐만 아니라 시대정신(Zeitgeist)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신학적으로도 가장 일관되고 온전한 해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이 아예 비성경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확실하게 언급하는 것은 분명하게 취하여야 하겠지만,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이는 부분에 있어서는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종말론을 말할 때에, 어느 부분에 있어서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계시의 말씀으로 믿는 분과는 종말론에 있어서 객관적인 토론을 거친 보다 깊은 진리의 이해와 보다 성숙한 믿음의 진보라는 가능성에 대해 늘 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종합해서 말씀드린다면, 역사적으로 장로교회가 추구한 종말론을 한 가지 입장에서만 유일한 것으로 취급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작금의 한국 장로교회가 취하고 있는 공식적인 종말론 사상이 ‘이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이해와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한 바르고 참된 종말론 사상을 정립하고 계승 발전시켜 가는 것은 오늘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매우 뜻깊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 부분에 관해서는 송구스러움을 전하고요. 

다른 분이나 서적을 통하여 저의 부족을 뛰어넘는 보다 만족한 답을 얻으시기를 바라며... 그만 줄이겠습니다. 


카페지기 주나그네





9문.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본) 산상수훈(8복)의 올바른 성경 해석적 관점 


<unshakable>님의 질문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중 8복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전 8복을 천국시민의 모습이자 예수님의 자화상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죄로 인해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의 마음 상태, 애통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비참한 자신의 더러움에 대한 슬픔 등등.. 비 기독교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제임스 보이스가 쓴 '산상수훈 강해설교' 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의 글을 읽으니 산상수훈을 다르게 이해하고 계시더군요. 전문을 이곳에 올려봅니다.


1. 8복이란 마태복음에만 언급되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복음서에 거의 다 기록되어있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듣거나 인용한 예수님 어록이 있다)

마태복음 5장에 등장하는 8복은 (8복 뿐 아니라 산상수훈 전체가) 누가복음 6장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그 두부분을 비교해 보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절-10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누가복음 6장 20절, 21절)


우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설교는 예수님께서 동일한 곳에서 한 설교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설교는 말 그대로 산에서 하신 설교이고 누가복음에 기록된 설교는 평지에서 한 설교 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장 17절 참고).


즉, 예수님께서 똑같은 설교를 몇 번 반복하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2. 예수님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얘기, 애통한다는 얘기, 의에 목마르다는 얘기, 결국 인생에 대해서 실패한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가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나아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병자"에다가 "이방인"에다가 "가난한 사람들" 이었다. 근근히 먹고 살기도 힘들고, 살아갈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써가며 영적 진리를 분별하기 위해서 구약을 찾아가며 "온유한 자"에 대한 말씀이 시편을 인용한 것이며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주도권을 포기하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그러한 말씀을 하셨겠는가?

(헬라어 분석을 시도한 사람들께 말한다. 헬라어는 당시 귀족들이 쓰는 용어였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분명 "아람어"로 들었을 것이다. 마태는 단지 헬라어로 기록했을 뿐이며 그 기록에 있어서 성경에 영감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헬라어로 쓰여졌기에 설교도 헬라어로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가끔 놓치곤 한다.)


누가복음에도 거의 동일한 청중으로 설교를 하신다 어떠한가?

거기다가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설교는 아주 노골적이다


배고파 하지 말라 이제 배부를 것이다!!

울지말라 이제 웃게 될 것이다!!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위대한 천국의 선포가 아닌가!?

(참고로 하나님 나라나 천국이나 같은 뜻이다 마태는 유대인을 상대로 성경을 기록했기에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꺼리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늘"이라는 말을 써넣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함축적이지 않는 8복의 의미

함축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시도가 이 설교에는 있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대하고 있는 청중은 지적능력이 저조한 병든 사람, 즉 그러한 분석을 할 힘 조차 남아있지 않는 사람들이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절망에 가득 찬 사람을 말한다 사업에 실패했든지, 사랑에 실패했던지 빚더미에 쌓여 앞길이 막막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마치 로뎀 나무에서 지쳐있는 엘리야 처럼...


애통하는 자는 지금 슬픔가운데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 늘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처럼..


온유한 자는 그 성격 때문에 왕따 당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소심해서 늘 자기 권리에 대해 주장도 못하고 피해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약자 중의 약자 일 것이다. 마치 우물을 몇 번씩이나 빼앗긴 이삭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돈이 없기에 재판에서도 지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가!?"하며 울면서 소리치는 사람일 것이다. 마치 불의한 재판관을 만난 과부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늘  세상에 이용당하는 사람일 것이다. 늘 속고 사는 사람, 그래서 사기 당했지만 어디 하소연 하지도 못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마치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 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교만하든지 결벽증에 걸렸든지 혹은 완벽주의자 일지도 모르겠다 늘 불만에 가득차 자신과 타인에게 늘 마이너스 점수를 주는 사람, 그래서 완벽에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것 처럼 행동했던 삼손처럼..


화평케 하는 자는 중간에 끼어 이유 없이 욕먹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마치 두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야 했던 아브라함처럼..


의를 위하며 핍박을 받는 자는 정말 정의롭게 살려고 뇌물과 부패를 반대했다가 피를 본, 인생 파멸까지 겪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의롭게 살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다니 이처럼 억울하게 화가나고 슬픈 경우가 어디있겠는가? 마치 근친상간을 지적했기에 처형당한 세례요한처럼..


정말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너희가 비록 인생에 실패했지만 걱정말라! 

천국이 보상 못할 것은없다! 로 왜 내 귀에는 들리는 것일까??

8종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동일하게 "천국"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4. 결론

산상 수훈은 인생 실패자에게 주는 최대의 선포이며 가르침이다. 이 세상 모든 실패자에게 유일한 희망 천국에는 제한이 없다. 가난한 자는 부하게 되고 주린 자는 배부르게 되고 모든 죽음과 허무를 굴복시킨 영광의 나라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서 좀 가난하면 어떻고 힘들게 살면 어떠한가? 세상에서 살지만 서로 용서하고 남을 섬기면서 살면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의 뼈대요 서론이 아니겠는가..?


목사님은 어찌 보시는 지요??



unshakable 님은 산상수훈의 8복과 관련한 어떤 이해(해석)를 두고서, 이 입장이 종전에 자신의 이해와 다르다고 고백하면서, 저의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카페에 올려주신 인용문을 보고서, 글쓴이에 대해 ‘과연 성경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인지가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한마디로 굳이 답변 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이런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님께서는 ‘뜻밖이다’는 소회를 표하셨지만, 글의 출처를 알게 된 저는 ‘전혀 뜻밖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더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진작에 글의 출처(지은이)를 정확하게 언급하셨더라면, 시간 낭비없이 답변을 드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여하튼 두 번째 올려주신 전문과 (말씀하신 신학생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지라도) 이 글의 원출처가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의 일부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거나 의존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은 한 가지이지만,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답변 드립니다. 첫째, 산상수훈(8복)에 대한 올바른 해석적 관점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을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제가 인용문을 가치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해석이라고 일축한 이유입니다. 둘째, 인용문의 원출처이자, 원저자인 달라스 윌라드와 그의 동료들(특히 그의 책, <하나님의 모략>을 격찬한 리차드 포스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신학적 배경(관심사)과 그들이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끼치는 간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와 영향에 대해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전자의 주제에 관해서만 언급하겠습니다. 후자 역시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별도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본) 산상수훈(8복)의 올바른 성경 해석적 관점

(1) 마태복음 5장 vs 누가복음 6장

인용하신대로 산상수훈의 8복 내용은 복음서 두 곳(마 5장, 눅 6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두 곳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시기와 정황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자를 ‘산상수훈(강화)’, 후자를 ‘평지수훈’라고 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은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부르신 직후에 수록된 반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그보다 훨씬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의 다른 시점을 두고 개혁신학권내에서도 ‘분리된 강화’(Augustine) 혹은 ‘동일한 강화’(Calvin, Chrysostom)라는 상반된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수훈이 다른 시점과 독자에 관해 차이점이 있다고해서, 두 가지 수훈을 다른 성격의 가르침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즉 두 수훈의 차이점이 내용이 품고 있는 함의적 동질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점을 빙자하여 마치 다른 교훈이나 해석이 있을 수 있는양 이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2) 마태복음 5장의 팔복 해석적 기준과 관점

님의 인용문을 보면, 글쓴이의 최대의 관심사는 8복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 정말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관심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글쓴이의 주장은 허울좋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8복 설교가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에게 주신 천국의 선포라니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헐벗고 소외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천국의 복을 나누어 주셨다. 천국은 그러한 사람들의 것이므로 절망하지 말자. 희망을 잃지말자. 다시 일어서자. 예수님은 우리의 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교리나 규범이 아니다. 신앙은 체험이며 실존이다” 


듣기에는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예수님의 본의를 철저하게 무시한 오류중의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인간의 삶이 정황과 관련해서 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사회개혁적인 지침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이런 무리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조차 하기 힘듭니다. 


개혁신학은 이런 인간 중심의 성경 해석을 전면적으로 거부합니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산상수훈을 이해할 때, 먼저 이 설교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의 대상을 (모든) 자연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대상은 자연인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 분의 제자들입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물론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산상수훈을 듣고 있는 대상은 주님의 제자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맛보도록 구별된 자들입니다. 역으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의 참 제자 된 구별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산상수훈을 통해 나타난 천국의 실체를 경험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오직 예정론적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8복 설교의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주시는 은총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복은 장래의 복이나 조건적 복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진 현재 실현된 복을 말합니다. 즉 이미 하나님의 택자되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제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8복으로 열거된)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한 성격(품성)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영광이 그리스도의 제자 된 성도들의 삶속에 현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8복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조건과 환경과 노력의 산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품성속에 자연스럽게 구비되고 드러나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성도는 삶의 형편과 여건을 떠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그의 백성과만 상관있는 영역이며, 또한 그 분의 백성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을 이 세상의 자연인(그중에서도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마저 대상으로 삼음)을 위해 주시는 격려문이나 권고문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복음주의 교회 안에 이런 류의 성경 이해가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습니다. 인용문에 언급된 성경 해석은 성경의 본의를 가장 은밀하면서도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는 전형적인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름난 복음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왜 인용문을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되시지요?


unshakable 님의 질문과 관련해서 드리는 두 번째 답변입니다. 저는 첫 번째 답변을 통해 님께서 전해 주신 산상수훈의 8복에 관한 어느 해석을 두고, 왜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고 일축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에 관해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글을 읽는 순간 오버랩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의 출처를 물었던 것이고, 님으로부터 답신을 받는 순간, 제 예상(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글이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의 일부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너무 오래 전에 읽은 관계로), 달라스 윌라드나 리처드 포스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지요. 


님께서 그 글의 출처를 밝히기도 전에, 제가 혹평을 가했는데, 이제 글쓴이를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제 편에서는 금쪽같은 시간을 쪼갠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한 상황에서) 굳이(?) 두 번째 답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몇 편의 논문 양만큼이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만 시간과 지면이 제한된 관계로, 이번 답변에서는 (독자들의 주의를 요하는 마음으로) 달라스 윌라드나 리처드 포스터(그 외 여러 인물들을 포함하여)와 같이 모두에게 너무나 친숙하지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신학적 경향성과 해악성에 대해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과연 그들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인가?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를 비롯해서 헨리 나우웬, 필립 옌시, 브루스 윌킨스, 유진 피터슨, 릭 워렌, 데이빗 제레마여, 브라이언 매클러렌...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복음주의의 아이콘이라는 것과 이들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여지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관심사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과, 마치 한 사람의 생각인양 내용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군요. 교파, 교단, 신학, 심지어 목회자, 일반성도를 구별하지 않고 엄청나게 인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로부터 개신교 성도들에게까지, 장로교회에서 오순절교회에까지, 복음주의에서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들의 활동과 영향은 전방위적이며, 이들의 책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학적, 교파적, 교리적 차이를 단번에 무장해제 시키는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누구에게나 복음주의자 혹은 영성주의자라고 불립니다. 복음과 영성의 조화... 말로만 들어도 뭔가 완벽한 조합처럼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책을 접한 사람들은 저마다 이들로 인해 복음없는 영성과 영성없는 복음으로 편향되었던 기존 신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한국 대형 기독교 서점들의 치열한 보급 정신과 대형 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적극적인 추천과 보다 새로운 복음에 목말라하는 성도들의 강렬한 욕구가 맞아 떨어져, 이들의 책들은 어느새 복음주의의 신학의 준거점이 되었고, 수준있는 신앙생활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듣기에는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도 교과서로 채택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한국 교회에 소개된 시점이 불과 수년 전의 일임을 감안한다면, 가히 폭발적인 관심과 결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덕분에 님처럼 저도 한때 이들의 책이라면 아무 의심없이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책을 통해서, 그동안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접할 수 없었던 어떤 고상함과 심오함과 명료함과 건전함이 두루 갖추어진, 마치 명품으로 영혼을 치장하는 듯한 부티끄한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느낌은 그야말로 느낌뿐이었지, 결코 복음의 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고상하듯 하지만 음험한 속임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신학은 ‘참된 복음주의를 말살(훼파)하는 명목뿐인 복음주의’에 불과하였습니다. 결코 그들은 진정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2. 왜 우리는 그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가?

문제는 그들의 사고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신학 때문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윌라드 달라스나 리처드 포스터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영성신학자라고 평가받는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들의 관심은 복음을 영성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영성의 뿌리가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전형적인 퀘이커 교도의 후예로, 퀘이커적 영성 운동을 주도하는 ‘레노바레’(The Renovare, 일명 ‘친구들’(Friends))라는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윌라드 달라스는 이 단체의 설립부터 정신적인 멘토로서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영성은 퀘이커교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지 폭스에 의해 조직된 퀘이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형식적, 무교회적 관념 가운데 하나님과 직접적인 내적 교제(경험, 만남, 합일)가 가능하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들은 기존 교회의 형식적 기재들을 반대하면서, 성도 개인의 묵상과 명상가운데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을 고집하였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개신교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만인제상장설과 같은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을 명분으로 종교개혁의 가장 좋은 선물(예를 들어, 신학, 교리, 예배 모범, 교회 정치 등등..)들을 포기하였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에 있어서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진리의 기준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신앙적 감상과 각성을 위한 전형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성경 해석의 주관화와 신령주의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는 조직 폭스의 퀘이커교적 신앙을 좀 더 세련되고 현대화된 정서에 맞도록 재해석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또는 Centering Prayer, Breath prayer)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동원 목사(분당 지구촌교회)와 강준민 목사(동양 선교교회)등을 통해 한국 교회에 급속도로 붐을 일으키고 있지만, 사실 관상기도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타종교에서는 오래전부터 행하던 기도 방식이었습니다. 적어도 조지 폭스는 성경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 경험을 꿈꿨지만,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는 성경 밖으로의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칼 융과 같은 사람의 심리학적 방법론을 기초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보편구원론적 개념에서 신을 찾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과의 내통하는 방법을 ‘기독교적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풀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 한국 교회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대형교회들(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 새들백 교회등)이 이들의 ‘영성’운동을 포스트 대안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조, http://www.lighthousetrailsresearch.com/willowcreek.htm). 얼마 전에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블 목사의 참회 소식이 한국 교회에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참조,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06). 그러나 빌 하이블 목사의 참회는 ‘방법론적인 목회’에서 ‘보편구원론적 영성 목회’로의 전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새들백의 릭 워렌 목사도 전적으로 동감으로 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이들 교회는 교회의 체질을 관상기도 중심의 영성운동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경우,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 콘퍼런스의 주제가 최근 몇 년동안 거의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회 비젼을 이루기 위해 이들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관상기도와 관련된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의 서적도 예외 없이 끼어 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설명하였으니, 독자들이 잘 알만한 두 사람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가 직접적으로 영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헨리 나우웬입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에 ‘복음주의 영성주의’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책만 수십 권에 달할 만큼 헨리 나우웬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절대로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의 책을 조금만 신중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몇 문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그떡이다가도 전체 문맥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성경적인 사상을 가장 비성경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풀어내는데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가 가톨릭 사제였고, 종교다원주의자였으며,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의 책 속에 숨겨진 그의 비신앙적 본성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헨리 나우웬이 스스로 자신의 영적 아버지라고 존경해마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토마스 멀튼(Thomas Merton)입니다. 그는 가톨릭 수사로 20세기 관상기도 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성’이라는 촉매를 통해 복음을 초월한 모든 종교와의 영성과 만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 준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수도원에서 살면서 기독교의 영성과 모든 종교의 영성과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런 공로로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와 멀튼의 방식대로 미사 참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우웬과 윌라드와 포스터의 저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 멀튼입니다. 그중에서도 포스터의 경우, 그의 모든 책에는 반드시 멀튼의 어록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풀어내는 방식과 표현을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지만, 오직 성경,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복음은 혐오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부르짖지만, 그리스도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된 삶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상호 소통을 위한 인격적 영성을 언급하지만,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침묵과 묵상에 대해서는 열려있지만,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있는 자아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종교적 신비를 종교적 확신의 계기로 삼지만, 유일무이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계시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종교적 편견으로 몰아붙입니다. 성경의 일부(구절)를 인용하거나 강조한다고해서 복음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말씀만을 가리키며, 그 말씀의 전체를 가리키며, 그 전체를 가감없이 정직하게 증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증거하는 내용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들을 진정한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보다도 진리 안에서 명확한 지혜와 사려 깊은 분별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두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지혜와 분별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6-8)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2)





10문. 다니엘서 2장의 해석과 관련된 답변 


【부정의 힘 님의 질문】

다니엘서 2장의 느부갓네살 첫번째 꿈을 연구하다가 드는 질문인데요... 

우리의 해석은 보통 금- 바벨론, 은-메대와 바사 , 놋- 그리스 (헬라) 쇠와 진흙- 로마 로 해석하잖아요.

근데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을 수용하는 성직자및 성서학자들이 은 부분의 메대와 바사로 따로 띠어서 해석하므로 로마는 밀려나고 쇠를 그리스로 해석한다고 하는데 (금-바벨론 은- 메대 놋- 바사 쇠- 그리스)

제가 여기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러한 해석을 하는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을 수용하는 성직자및 성서학자' 는 누구 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단체 입니까? 물론 유대인들도 이 해석을 따르더군요 즉 손대지 아니한 뜨인 돌을 예수그리스도로 해석할 수는 더더욱 없겠구요... 그렇게 된다면 이 해석은 대단히 위험한 해석이겠지요?


간단하게 답변드리겠습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대선지서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연구된 책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다니엘서는 다른 선지서에 비해 보다 집중적으로 언급된 예언적이며, 종말론적인 성격 때문에 묵시 문학적 관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이 다니엘서 2장의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관련된 다니엘의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경 주석자들이 이 부분을 두고서 세계 역사에 나타날 제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계시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적하셨듯이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그들 사이에 커다란 인식의 간격이 있습니다. 혹자는 다니엘서의 중요성만큼이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가장 혹독한 비평을 받는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역사비평적 시각으로 이 성경을 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다니엘서는 한낱 사람에 의해 조작된 유대인의 예언 문서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다니엘서의 정경성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니엘서가 기록된 연대를 다니엘이 활동하던 B.C 6세기 초로 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이 성경을 직접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 비평가들은 다니엘의 기록 연대를 B.C. 2세기 후반으로 추정하며, 마카비 왕조 독립 운동에 관심이 많은 어느 유대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을 가리켜, <다니엘 후대설>, <마카비 시대설>, 그리고 다니엘서의 내용이 기원전 2세기의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175-164 B.C.) 때에 성취된 역사로 돌린다고 해서 <과거주의(Preterism)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주장하는 바는 거의 같습니다. 즉 다니엘서의 예언은 유대주의의 부활을 열망하는 유대인주의 중심의 미래적 역사관을 기술한 것이지,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정경 역사를 보면, 다니엘서의 경우 B.C. 3세기경전까지만 해도 정경성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3세기 헬라 철학자였던 포르피리(Porphyry)에 의해 다니엘서의 신적 권위에 대한 최초의 비평을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대표 철학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아서, 이교도적 철학 사상의 관점에서 다니엘을 포함하여 성경 전반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였습니다. 물론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포르피리의 반성경적인 주장은 잠시 자취를 감추는듯 하였습니다만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 16,7세기의 인문주의 운동의 발흥과 더불어 18,9세기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로 대표되는 성경 연구 방법인 비평적 연구가 시도되면서 다시 전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흔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성경 비평 학자들에 의해 포르피리의 주장은 좀 더 세련된 언어와 학구적 감성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이, 다니엘 2장에 나온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들은 다니엘 2장에 예언된 네 왕국을 금(머리)은 바벨론 왕국, 은(가슴)은 메데 왕국, 놋(배와 넓적다리)은 바사 왕국, 마지막 철(다리)은 헬라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다니엘서의 기원전 6세기 저작설에 대한 부정(否定)의 성격으로, 다니엘서를 기원전 2세기의 세계 정황 속에 처해 있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추구와 염원을 북돋기 위해 기록된 유대인 문서로 정리하면서, 결국에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비평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다니엘을 선지자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 2장에 나타난 예언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보면 2장에 언급된 ‘뜨인 돌’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 역시 오류가 되는 것이지요. 다니엘서가 위서(僞書)라면 다니엘서의 내용을 직접 인용한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특히 요한계시록도 모두 위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다니엘서 2장에 관한 비평주의자들의 입장을 허용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성격을 잃어버리며, 나아가 성경 전체의 정경성과 성경을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서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관한 해석은 대충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어차피 예언이고 상징인데, 헬라제국이면 어떻고 로마제국이면 어떠하냐며 쉽게 말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즉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관점과 해석 방식은 곧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가늠하는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대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예언이나 상징이라 할지라도, 성경 본문과 성경 전체의 맥락과 흐름에 맞게 성경을 옳게 분변하고 해석하는 일은 참된 교회와 참된 신앙과 참된 성도를 살리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님께서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을 수용하는 성직자 및 성서 학자와 단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고도의 학문적 식견이 있는 분(예를 들면, 구약학 전공 교수나 다니엘서 주석가)에게 문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님의 물음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데 도움이 되실만한 두 권의 참고 서적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글리슨 L. 아처(Archer, JR.),『구약총론(Old Testament Introduction)』, 김정우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436-463) 

카이저, W., 『구약 성경 신학』, 최종진 역, 생명의 말씀사 


성경 연구에 기대보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11문.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상징적인 숫자에 관한 답변


unsakable 님의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성경에는 많은 상징(symbolism)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은 그 문학적 특징 체계의 독특성이 상징주의라고 할 수 있을만큼, 어느 성경 보다도 많은 상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상징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본서에 국한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시록의 독특한 문학적 체계와 구조

우선,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염두해야 할 중요 핵심 사항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체계와 구조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령에 감동한'(계 1:10)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시'(계1:1)를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흔히 요한계시록을 '아포칼릅시스 요아누)라고 명하는데, 이는 '요한의 계시록(책)'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고대 문서에도 특별한 종교적 의미에서 신의 현현을 '계시'(아포카릅시스)라는 말로 사용해 왔지만, 요한계시록 이전에 책의 표제(제목) 자체에다 '아포카릅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에서의 '계시'는 일반 종교에서의 그것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래의 문서와는 달리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계시'는 현세 초월적인 예언적(prophetic) 성격이 농후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의 국가적-지상적 차원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우주적-초자연적인 미래의 일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러한 문학적 양식(구조)를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비록 이생의 현실은 불안하고 모순투성일지라도-그래서 믿음을 지키기가 매우 힘든 성격의 삶일지라도- 계시로서 천상적 세계의 실체를 미리 보여주심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망을 잃지 말고, 변함없는 언약으로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끝까지 승리하도록 하시기 위한 특별하고도 최종적인 권면이며,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약 역사, 그중에서도 외세의 침략과 같은 민족적 고난을 경험하는 역사가 구체적으로 언급(예증)되고 있는 것도, 방금 말씀드린 요한계시록의 기술 목적을 청자들에게 보다 확실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일종의 인식적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계시 문서의 특징으로서의 상징과 해석 기법

그런데 요한계시록과 같은 계시 문서의 가장 중요한 기술 특징이 바로 상징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상징들 중에는 요한 자신이 직접 고안해 낸 것도 있지만, 구약 성경이나 심지어 당시 일반 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징을 채용한 것도 있습니다. 요한이 이토록 다양한 자료로부터 상징을 이끌어 낸 일차적인 목적은 상징이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데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뿐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 상징을 언급할 때에는 보편적으로는 기록한 저자에 의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흔히 상징은 문자적으로 구별하여 언급되더라도, 상징이 의미하는 구체적인 뜻은 감추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 상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상징은 설명없이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성경적 상징을 이해할 때는 문구 자체에 뜻이 나타나고 있는지, 혹은 문맥을 통해 명시된 뜻을 찾을 수 있는지, 또는 굳이 뜻을 찾지 않아도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고 있는 개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성경적 상징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서 전달 양식이나 개념 이해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상징 중에는 고유명사인 이름들을 사용하여 전형적인 뜻을 전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예를 들어, 바벨론, 애굽, 소돔 등), 일반적인 전형적(typical) 의미보다는 상호 문맥적 흐름 속에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님께서 질문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몇 종류의 숫자(numbers)는 전형적 상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상징 숫자들에 관한 바른 해석과 현실태로서의 상징에 대한 기대

3, 4, 7, 10, 12, 1000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 숫자들의 상징성이란 지나친 문자적 해석을 지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 숫자들 안에서 알기 어려운 매우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던 유일한 의미를 자신만 알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 역시 성경적 상징을 극단적 주관화로 몰입시킨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이러한 숫자들이 지향하는 취지, 곧 전형적인 뜻을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에 사용된 숫자 3, 10등은 충만함(sufficiency), 온전함(completeness), 그리고 확실성(certainty)을 상징합니다. 숫자 7, 12역시 당대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특성을 가진 숫자로 완전함(perfection)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 12기둥이나 12문이 있다는 설명은 가장 이상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환상, 꿈을 통해) 천국에 직접 가보니 천국이 정말 이러이러하더라”라고 하는 『내가 본 천국』 시리즈 류의 간증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문자적, 자의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는 큰 숫자인 1,000이나 12,000이나 1444,000 역시 본서에서 다루는 상징적 해석의 연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이나 신약 초기 시대에는 1,000이라는 숫자는 계산하는 데, 매우 큰 수를 의미하는 데 사용된 전형적인 단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12,000의 장로들이나 1444,000의 무리들은 헤아릴 수 없는 큰 수의 사람들을 표시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계시록에 언급된 모든 상징적 표현들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계획을 계시로서 드러내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이 세상에 있는 성도에게는 제한된 의미로 남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할 수 없을만큼 확증하게 드러난 계시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그 본래의 의미가 감추워진 형태로 있는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계시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있는 성도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는 데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상징을 통한 계시일지라도 구원을 이루는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는 완전한 지식이며, 충분한 지식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더 큰 소망이 있다면,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지금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에 연명할지라도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그 분에 관해 온전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2).  그 날에는 더 이상 상징은 모호함으로 남지 않을 것이며, 주의 영광과 권능으로 가득한 현실가운데 그 실체를 우리 가운데 드러낼 것입니다.





12문. 찬양시 악기 사용에 대한 답변 


<unshakable> 님의 질문

종교개혁 당시 쯔빙글리는 오르간을 부순걸로 알고 있습니다.

칼빈인가? 또 다른 누군가는 오르간 소리를 두고 사탄의 휘바람 소리라고 까지 평했는데요. 하지만 지금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온갖 동원 가능한 악기는 다 동원하지 않습니까? 그 성경적 이유로 구약에 여러가지 타악기를 비롯해 각종 악기로 찬양했던걸 근거로요.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몰랐던 걸까요? 하지만 그렇게 볼수는 없을거 같은데요.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답변 드립니다. 

님께서는 찬양시 악기 사용 여부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목아래 온갖 종류의 악기들과 노래 기법이 동원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교회 현실에 대해 뜻 깊은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교회에서의 악기 사용 여부는 음률있는 찬양과 관련되어 있고 찬양은 곧 예배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 우선 질문하신 내용 중에 몇 가지 오해가 될 만한 부분들에 대해 보충 설명을 드린 후에, 찬양시 악기 사용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 쯔빙글리가 오르간을 부쉈다?

루터(Luther), 칼빈(Calvin) 쯔빙글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분들이면서도 동시에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 교회 음악의 세 가지 유형을 대표하는 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교회 음악을 전공하는 분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음악과 관련하여 루터는 개방적, 칼빈은 제한적, 그리고 쯔빙글리는 배타적인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단편적으로 본다면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의 복잡 다양한 인과적 성격을 고려할 때, 지나친 단순 도식화는 오히려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쯔빙글리에 관한 예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기 이전까지만해도 인문주의에 매료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인문주의 운동은 성경을 위시한 고전 연구뿐 아니라,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중에서도 쯔빙글리는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었습니다. 특히 그는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였다고 하는데, 전문 음악가 이상으로 잘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오르간(피아노?)을 자기 손으로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은 물론 교회에서 그 누구도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하였습니다. 혹자들은 그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주목하여 쯔빙글리는 음악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혹은 적대적이었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쯔빙글리라는 한 인물이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갔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단편적인 억지에 불과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가 살았던 시대는 부패와 타락으로 점철된 중세기의 끝자락이었습니다. 진리의 어느 국면 하나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은 부분이 없었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면모가 암축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바로 예배였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그야말로 가장 혐오스런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제대로된 말씀 선포는 고사하고 예배에서 부르는 성가 한 곡까지도 진리편에서 순전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배 양식은 복잡하고 화려해 보였지만 이방 종교의 외식적인 예배에 불과했습니다. 예배시에 연주되는 음악과 악기 뿐만 아니라 성가까지도 교황의 허락 없이는 가감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기만적인 예배 행위로부터 성경으로 개혁된 예배로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루터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 종교개혁에 투신한 루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도적으로 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고, 종교개혁에 매진하게 되는 과정에서 루터의 신학과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찬론과 교회 음악론인데요, 쯔빙글리는 교회 음악과 관련하여 루터의 입장, 즉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을 허용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신구약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제정한 것만을 인정하며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쯔빙글리 입장에서 볼 때, 루터의 견해는 세속적인 음악의 교회(특히 예배) 유입에 대해 매우 인간적인 미봉책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쯔빙글리의 탁월한 개혁적 신념을 엿보게 됩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삶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음악을 포기하고 오르간을 부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거짓된 예배 음악과 루터주의의 중도적 교회 음악론의 위험성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허세와 품위로 위장한 예배 음악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쯔빙글리는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포기한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만 사로잡힌 바 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그가 보여준 신앙의 행적은, 그가 남긴 엄청난 종교개혁의 열매와 도전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에게 입술의 신앙고백대로 하나님 앞에 정직과 진실로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할 말도 많고, 또 실지로 많은 말을 하지만 내뱉은 말만큼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을 보기 힘든 때입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가장 어두웠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거짓 선생들과 방해꾼들과 싸우면서도 자신이 누렸던 은혜대로의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교회 음악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그에 관한 전체적인 신학과 신앙의 객관적 조명아래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르간을 부순 일화 하나로 쯔빙글리를 교회 음악을 도외시한 난봉꾼 정도로 단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이며, 음악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불순한 생각입니다. 쯔빙글리는 가장 좋아하는 것까지 포기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택하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은혜로운 교훈이 아닐런지요? 


2. 칼빈은 오르간 소리를 두고 사탄의 휘파람 소리라고 까지 말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칼빈이 직접 이런 표현을 직접 사용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칼빈이라면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도 남았을 법하다고 생각됩니다. 칼빈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거짓된 예배 현장에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울려퍼지는 오르간 소리라면 이 정도의 표현은 약과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의 수많은 저작물 중에서 이와 같은 표현을 찾는 일은 그리 핵심적인 사안이 못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표현들이 어떤 신학적 함의와 주장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칼빈이 오르간 소리를 두고 사탄의 휘파람 소리라고 했대’라는 말을 되뇌이는 이들의 좋지 못한 저의(底意)를 간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칼빈이 교회 음악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우회적인 비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칼빈주의를 추구하는 성도들에게도 혼란과 부담을 주려는 의도가 섞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위 표현이 칼빈이 한 말이든, 그렇지 않던 중요한 것은 칼빈의 표현의 적절성이 어떤 상황(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선 칼빈의 음악관에 대해 생각할 때, 두 가지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일반 음악(성도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취향으로 여길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둘째, 교회 음악(예배를 중심으로 한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어떠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칼빈의 입장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칼빈은 음악을 포함하여 일반 예술의 기능과 가능성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합니다. 심지어 칼빈은 성경과 관련된 회화나 형상(조각)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더욱 풍성하고 부요롭게 하는 일반은총적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예술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완고하며 배타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억측입니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술을 도외시하며,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주장 역시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사상이 이런 칼빈주의의 예술관의 적극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는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예술을 대해야 하며, 예술적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예술과 관련된 내용들이 그 기능과 영역을 넘어서 신앙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을 ‘예술의 악용’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회화나 형상은 그 자체로서는 악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그것들이 예배의 수단과 형식으로 사용되게 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봅니다(참조, 기독교강요 1.11.6-12).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 안에서 활용되는 예술(특히 교회 음악)은 보다 엄밀한 성격을 갖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예배 시에 부를 수 있는 찬양의 범주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시편 찬송과 사도신경송, 주기도문송과 십계명송 등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는 찬양을 부를 것을 권면합니다. 그중에서도 시편 찬송의 부활은 교회 개혁의 핵심 사항으로 칼빈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였던 부분입니다. 칼빈은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찬양의 적합한 기준으로 곡조도 중요하지만 가사의 영적 의미가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아타나시우시스나 어거스틴의 예를 본받아 교회 안에서 적당한 정도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기독교강요 3.30.32). 전통적인 개혁교회는 이러한 칼빈의 교회 음악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는 칼빈이라는 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견해가 성경적 음악관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3. 예배 시에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도 괜찮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칼빈은 찬양을 부름에 있어서 가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찬양의 운율과 멜로디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운율과 멜로디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운율과 멜로디는 자연스럽게 악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음악(특히 예배에 있어서)과 관련해서 악기 사용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 악기 사용을 전면 부정한다. 둘째, 악기 사용을 전면 허용한다. 셋째, 악기 사용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견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중 두 번째 견해는 개혁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입장입니다. 어떤 형태의 악기를 막론하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루터주의를 모태로 하는 일반적인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악기 종류에 대해 뚜렷한 근거나 기준이 없다는 것은 곧 음률이나 멜로디의 구별에도 관심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CCM들은 이미 통속적인 세상 음악과의 경계선마저 허물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종교개혁의 시작과 끝의 성격으로서 예배 개혁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CCM이나 현대 교회 음악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견해는 무엇인가하는 것인데요, 첫 번째와 세 번째 견해가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 답입니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표면적인 이유는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혁교회를 추구하는 분들이 두 가지 견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견해의 차이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음악에 있어서 악기 사용을 전면 부정하는 입장은 악기 사용을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전 예배의 의식법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구약의 악기 사용은 전예배를 위한 의식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구약 성전 의식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의식법과 함께 악기 연주도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분들은 예배 찬양을 무반주로 형태로 부릅니다. 칼빈을 위시하여 많은 개혁자들(특히 스코틀랜드 장로교주의 개혁자들)이 이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약의 의식법의 완성과 단절을 인정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이 악기 연주조차 부정하였던 것은 중세 시대의 잘못된 종교 음악의 남용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경건을 도모하는데 적절한 음악적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오르간이나 피아노 정도에 한하여 예배 음악을 위한 악기로서 받아들입니다. 전통적인 유럽 개혁교회과 청교도들은 이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입장에 관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니다만 종교개혁 정신이 훼손되거나 대립될만큼 치명적인 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차이는 동질의 신학과 신앙적 배경을 가진 교회들이 신앙적 양심에 위배됨이 없는 범위에서 내린 자유로운 신앙적 판단과 결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 개혁과 개혁된 예배를 소원하는 성도라면 자신이 처한 신앙적 환경과 고백에 따라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이라도 자유롭게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만 더 짚고 마치겠습니다. 혹자들은 그렇다면 오르간이나 피아노는 되고, 전자 기타나 드럼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따집니다. 물론 악기 자체가 선과 악을 표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악기의 음색(톤)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며, 신앙의 정서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점에서 악기가 탄생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 기타나 드럼이 발명되게 된 동기는 지극히 세속적입니다. 사악한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이런 류의 악기들로 전달되는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가 세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르간과 피아노의 탄생은 교회의 영적 활동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악기들은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교회 음악을 표출하는 가장 전형적인 도구로 사용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이 도구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오르간과 피아노 자체가 어떤 인격적인 영성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오르간과 피아노만 있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만족스런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의미는 더욱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르간과 피아노로도 더 적극적으로 충분하게 세속적인 발상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질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바른 신학과 신앙 고백 가운데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수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반주 찬양이든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활용하여 드리는 찬양이든 예배자로 선 성도로서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하는데 우리의 모든 뜻과 의지와 열정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3문. 로고스와 레마에 관한 답변 


<은혜로만> 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전 고신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입니다. 캘거리 카페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눈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분하지 않는 것을 자신들은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 때문에 잘못된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요?

그리고 구분을 하는 것이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레마를 개인에게 감동과 감화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데, 말씀이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은 사실이라서 헷갈립니다. 


좋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답글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님께서 하신 질문은 개인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습니다만, 질문해 주신 덕분에 자료들을 찾아보던 중에,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질문에 있어서 저의 관심은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님의 지적과 같이 정말로 많은 목회자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단어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는 교파와 교단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장 현저하게 강조하는 그룹은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순복음이나 오순절 계통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 장로교회의 목사로부터 신정통주의를 부르짖는 또 다른 장로교단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경 연구와 개인 묵상을 강조하는 일부 유명 선교 단체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로마 가톨릭(천주교회)와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도 매우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볼 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일은, 적어도 한국교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며, 나아가 신앙적 내용과 배경이 전혀 달라야 할 천주교회와 이단에까지 공유되고 있는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성경 이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현상을 확인한 이상, 저의 관심은 도대체 누가, 왜, 어떤 성경적 근거로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면, 자칫 현상만 나열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 되기 때문에, 후자의 관심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게 된 점을 양해해 주시리라 기대하며, 이제부터 님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로고스>와 <레마>는 ‘말씀’에 대한 두 가지 헬라어로 번역이라고 하면서, 의미면에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레마>는 <로고스>되는 말씀이 청자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로고스>는 객관적, 합리적, 이성적인 말씀인데 반해, <레마>는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인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로서의 말씀의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레마>로서의 말씀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실제적으로 그에게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로고스>에서 <레마>로의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역사나 은사를 매우 강조합니다.   


2. 이들의 <로고스>와 <레마> 구분은 과연 성경적인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두 단어의 용례와 구문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신약 언어에 정통한 성경 사전만큼 도움이 되는 자료는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두 가지 성경 사전(「킷텔 신약 원어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by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콜린 브라운 신약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by Colin Brown): 참고, 이 두 권의 사전은 신약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정평이 나 있는 좋은 사전임」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만한 원어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고스>와 <레마>의 용법이 성경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로고스>의 경우, 헬라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한 것과 또한 구약과 신약(그중에서도 요한복음서의 경우는 매우 특별함)에서 언급된 범례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용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로고스>와 <레마>를 전적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되어진 말씀이라는 식의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한편 신약 성경의 헬라어 <로고스>와 <레마>는 구약 성경의 <다바르(rb'D'))>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70인경(LXX)의 경우,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두지 않고서 상호 교환적으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예레미야 1:1, 2에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로고스>와 <레마>가 사용된 용례가 전혀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 단어가 앞서 말씀드린 그러한 방식의 구분을 입증하는 사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임의로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비신앙적 행위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가?   

이미 앞서 ‘누가’에 해당하는 범주의 사람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1) 오순절식 성령 운동주의자(순복음 교회, 피터와그너 계열), (2)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 (3) 워치만니 계열에 속한 자(지방교회 혹은 형제교회), (4)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와 <알파 운동> 옹호론자(이단), (5)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주창자. 혹자들 중에는 (5)의 예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정통주의의 내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정통신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의 세속적인 성경 이해에 맞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3가지 형태로, 즉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성경 이해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과의 차별을 인정하게 되면서, 성경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다가올 경우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과 말씀과의 구별 혹은 차별은 결국 성경이 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의 여부는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성경을 통해 느끼거나 하는 체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배태하였습니다. 흔히 Q.T라고 불리는 <말씀 묵상>이라는 성경 이해 방식이 신정통주의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근거로 보편화되었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지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신학 이론을 만든 사람이라면, 찰스 파라(Charles Farah, 1926-2001)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은사주의 신학의 요람인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전적 은사주의 운동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신앙 운동’(the Word Faith movement)의 주창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신학적으로 오순절적 은사 운동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훨씬 더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적인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찰스 파라가 고안해 낸, <로고스>와 <레마>의 구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즉 <로고스>의 법적 성격의 말씀이 삶의 체험과 경험(대부분이 초자연적인 은사나 세속적 번영과 축복과 관련된 것이지만)으로서 <레마>의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반면, 말씀은 오직 체험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영적 체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주관화가 중요한데,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령의 신비적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행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로고스>와 <레마>를 구별짓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체험중심, 물질중심, 세속중심의 신앙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수작일 따름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고스>, <레마>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가 그 능력을 체험했건 그렇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의 수준이나, 경험같은 어떤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영적 권위와 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개입에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성도에게 역사하실 때에는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질서 없이 무분별하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은혜를 끼치게 하시는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은혜의 방도’(메디아 그라티아에, media gratiae)라는 신학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입증하는데 신비적 경험이나 인간적 사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경을 은혜의 방도 삼으셔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권면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바르게 배우며, 익히며, 깨달아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혼미한 세상에서 참된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말씀으로 영적 분별력을 기르며,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4문.  '이교도적 계시 vs 기독교적 계시'에 관한 답변 


<건이 아빠>님의 질문

더운날씨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 건이 아빠입니다. 잘 지내시죠? 그동안 눈으로만 봐왔는데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전도할 때요, 특히 무속인들, 타종교와 비교해서 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 인데 무속인들도 그렇게 말하면 뭐라 말하죠? 자기네들도 신이 우릴 찾아 왔다라고 하면 뭐라 답해야 할지, 저 혼자 생각 하다 이런 의문이 들어서요.


건이 아빠님의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직접 겪으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인 입장에서 불신자 혹은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거나 전도할 때에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법 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표현과 “신이 우리를 찾아 왔다”는 표현은 분명히 다른 개념일텐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님의 고민이고, 또 많은 성도들의 공통된 경험의 일부라고 생각됩니다. 


다르지만 딱히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하기 힘든 것은 한마디로 성경 진술에 따른 기독교적 ‘계시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혼동스러운 것은 타종교인들도 유사한 계시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비교종교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는 사실입니다. 비교종교학에서는 종교의 기원과 형태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종교는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고 봅니다. '계시에 의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는 신념은 세계 어느 종교 속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교종교학자들은 기독교나 자연종교나 종교적 근거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계시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계시를 자연종교의 계시와 다를바 없는 속성으로 치부하는 그릇된 결론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종교는 저마다 신적 존재에 의한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하나님의 계시의 종교다’라고 하는 주장은 틀린 것은 아니라도, 타종교인이 들을 때에 막연하고 모호한 주장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계시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곧 기독교의 참 종교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며, 기독교만이 참 구원의 종교로서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해명하는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의 원리를 논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계시’를 주제로 삼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 그렇다면 타종교와 현저하게 구별되는 참 종교의 근원 원리로서의 계시란 무엇인지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계시(Revelation)란 말은 ‘정체를 드러냄’(unveiling)이라는 뜻의 라틴어 Revelatio(레벨라티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 말은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는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고대 종교들도 이 말을 차용하여 자신들을 계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보편적인 적용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어느 종교에서나 “하나님 혹은 신(神)이 찾아오셨다”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용례는 성경 기록자들이 살았던 세계에 지배적인 혹은 일반적인 종교에서 사용되던 개념과 현격하게 다릅니다. 고대 역사를 관찰해 보면, 성경이 기록되기 한참 이전부터 종교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사본에 의하면 원시 시대의 사람들 역시 나름대로의 종교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역사의 종교성에 관해 성경만큼 정확하게 언급하는 문서도 드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기 이전에, 고대 근동 지역에는 이미 애니미즘(animism, 정령숭배)에서 구체화된 형상을 지닌 이교도 종교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헬라 시대이후 좀 더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의 종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원리적인 면에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차이가 없습니다. 


예컨대, 이교도적 종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자연과 초자연의 실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범신론적 형태의 계시관이라는 것입니다. 이교적인 생각에 있어서, 자연은 신적 현존과 더불어 살아가고, 우주적이며 초자연적인 흐름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신적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진리의 객관적인 실재와 주관적인 실재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세계 자체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곧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지식과 경험이 종교화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든지, 개인의 직관 속에서든 어떤 형태로든 종교 활동은 가능하고, 계시를 받는 수단은 열려 있습니다. 셋째,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체험과 느낌이라는 인간 정서를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강조합니다. 이교도적 종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보다 신비적인 체험의 주관성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세계 종교뿐만 아니라 님께서 말씀하신 한국의 무속인들도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이교도적 종교 범주 안에 있습니다. 이 모든 종교들은 신의 계시성, 즉 ‘신이 (인간에게) 찾아 옴’을 종교의 근본 원리로 강조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종교적 판단이 개인, 집단, 민족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신의 찾아 옴’(계시성)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요청의 형태로 계시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계시에 나타난 신의 절대적인 권위나 도덕적인 요구, 객관적인 진리의 확립과 적용,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가치와 해석과 같은 내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교도적 종교 혹은 계시는 철저하게 자아 중심적이며, 자기만족적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계시란 자아 충족을 위해 나열된 비유와 자기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계시관은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계시’라는 말 역시 ‘하나님의 드러나심 혹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이교도적인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적이며 자의식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계시의 근원성이 하나님의 능동적이이고 인격적인 속성에 기초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완전한 신적 권위를 가지며, 인간의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 생활 전체에 대한 확고한 권리를 가지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의 모든 성격은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적확하게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그 누구도 개인적인 정서나 직관에 의존하거나 신비적인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는 형태로 사유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 안에서, 자아 안에서 추구되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객관적이며, 공적이며, 권위적이며, 실제적인 권위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드러내시는 최종적인 목적으로서 계시를 기록케 하심으로 성경을 주신 역사적인 교훈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관한 은혜와 섭리를 전달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명료하고도 진실된 지식과 통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근거를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방식과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이것이 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가졌던 사고방식의 독특성이며, 여전히 오늘날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요, 형제된 사람들이 가진 진리를 대하는 방식의 독특성입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계시하셨는가? 계시의 방식의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성도로서 추구해야 할 계시의 이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계시에 관한 모든 물음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답을 찾고, 확증해야 합니다. 


성경을 벗어난 모든 종류의 신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하며 모호한 신'(사 17:23)이며, '아무런 능력과 권능을 행할 수 없는 종교적 허상'(고전 8:4)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의 기원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거짓된 신을 만들며, 요청하며, 의지하는 것은 타락한 자들의 보편적인 신앙 정서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종교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롬 1:21) 결과일 뿐이며, 그러한 것들에 머리를 조아리고 경배한다는 것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것이며'(롬 1:23),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롬 1:25) 하나님에 대한 반역된 행위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도록'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알곡을 거두어들일 때까지 쭉정이를 내버려 두듯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그들을 자신들의 죄악 가운데 유기해 두십니다. 


과연 '신이 찾아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무속인이나 불신자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하심의 은혜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일은 누구를 위한 일이라기 보다는 성도 개인의 영혼을 위한 일입니다. 부디 늘 성경을 통하여, 이교도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계시에 합당한 방식대로 하나님을 알며, 그 분의 은혜와 요구 앞에 늘 겸손하고 진실되게 나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5문.  워치만 니에 관한 답변 


【솔반시온】님의 질문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하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인간의 영의 기능이 지, 정, 의 외에 직관, 양심, 영교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상당히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직관적으로 분별하고, 발생할 죄성에 대하여 양심을 통해 미리 경고 받고, 하나님과의 충만한 영적교통을 이룰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뛰어난 영적 삶이 있을까요?


'자아파쇄와 영의해방'을 통해서는 나를 덮고 있는 오염된 육체와 혼이 파쇄되면(조나단 에드워즈도 죄와 크게 싸워 승리하는 경험을 통해 죄성이 점점 힘을 잃고 거룩한 삶을 살수 있다고 표현하더라구요-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영이 육체와 몸을 통제하는 깊은 영성적 삶을 살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이 관심을 끌긴하지만 왠지 거부감이 제 마음에 경고를 울리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정확한 정보들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명쾌한 분별을 부탁드립니다.



솔반시온님의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라는 인물과 그의 신앙 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62권으로 구성된 그의 전집과 지금도 그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마도 신학을 정식으로 전공하지 않은 사람가운데(흔히 ‘평신도’라고 하지요) 그만큼 커다란 신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의 신학 사상을 근거로 전 세계에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방교회 또는 회복교회라고 하고, 외국에서는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es) 또는 형제교회(Bredren Churches) 이름으로 대단히 폭넓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와 그를 추종하는 교회들은 늘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소위 이단 논쟁인데요, 90년 초에는 한국의 두 장로교단(통합측, 고신측)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워치만 니를 따르는 분들은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워치만 니의 신학은 정통 교회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저도 진리를 추구하는 목사요, 성도로서 오랫동안 워치만 니에 관한 논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성도들의 요구와 목회적 필요에 의해 그의 신학 사상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 근거를 확보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얼만 전에도 워치만 니 사상에 심취한 몇몇 분들과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나름 성경 연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회를 찾아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그 분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워치만 니의 신학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분들의 신앙 유형과 성경 이해 방식을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워치만 니와 그를 추종하는 분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단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워치만 니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입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중국에 교회가 세워지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바르게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워치만 니의 신학 사상은 매우 위험하고 불건전한 요소가 너무 많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의도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신학과 성경 해석 중에는 정통 기독교 사상과 배치되는 내용들이 다분합니다. 특히 신학 원리 면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과 교류할 수 없는 근거없는 주장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단 판정 여부를 떠나서 분별하고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알고 경험한 범위 안에서 그의 신학과 성경 이해 중에서 결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현저하게 드러난 몇 가지 (이단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오류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1) 워치만 니는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지금도 성경밖에서 계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영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계시를 추구했으며, 또한 영안으로 (지방) 교회들이 나타나는 계시(환상)을 여러 차례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워치만 니 추종자들도 성경을 말하면서 동시에 직접적 계시의 가능성에 대해 열어놓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깨달은 계시는 특별한 것이므로 신령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워치만 니 공식 웹사이트 참조, http://www. watchmannee.org)


이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강조하는 66권 성경 계시의 완전성과 종료성에 위배되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성경 밖에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이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 계시의 계속성을 인정하는 워치만 니의 신학은 신비적 신령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도한 계시를 자신의 경험이나 사색을 동조하는 사람만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들에게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영적 교만의 모습입니다. 


2) 워치만 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 사상을 주장합니다. 양태론은 삼위는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구별이 없으며 세계와 관계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사상입니다. 워치만 니는 삼위일체에 관한 이러한 이해를 많은 비유와 유추로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양태론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이단의 전형적인 주장의 한 예로서 교회 역사를 통해 그 진위가 드러났습니다. 3세기의 사벨리우스 이후로 양태론을 주장한 이들은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았습니다. 특히 양태론의 거짓된 주장을 성경으로 규명한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은 양태론적 삼위일체 사상을 매우 경계하였습니다. 


3) 워치만 니는 신인합일론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없이 똑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인데,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연합 교리에서 유추 해석하였습니다. 즉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특히 워치만 니의 사상을 계승한 위트니스 리가 체계화 한 사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진정한 연합에 대한 성경적 무지와 오해로부터 기인한 주장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고 해서 인간의 성품이 하나님의 고유 속성과 같아지거나,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삼위 하나님 안의 위격 간의 구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의 본질적인 구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연합을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공유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로 전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4) 워치만 니의 사상은 헬라주의적, 영지주의적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영, 혼, 몸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중 영은 가장 고상하고, 혼은 그 중간의 매개적 기능을 하고, 몸은 가장 천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몸과 관련된 육신적인 행위나 생각은 단념하고 오직 영적인 사람, 영적인 것을 추구할 것을 권합니다.


언뜻 보면, 영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혀 다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영과 혼을 구별된 실체로 보지 않습니다. 상호교호적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또한 몸을 말할 때에도 반드시 부인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성도가 경험하는 구원이란 영과 몸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전인격적인 성화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이루어질 최종적인 구원 역시 영과 몸이 한꺼번에 구속받는 구원입니다. 


5) 워치만 니는 기성 교회의 조직과 정치를 부정하고 죄악시합니다. 심지어 기존 교회의 신학과 교리(신앙고백)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무리를 형제라고 칭합니다. 이 형제 됨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형제들을 중심으로 계급없는 교회를 이룩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이유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워치만 니의 개인적인 편견의 산물입니다. 설사 계급주의 교회와 교조주의 교회를 비판하는 성격이라고 인정하다손치더라도 기존 모든 교회의 교파성과 정치와 신학을 전면 부정하는 태도는 또 다른 극단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개혁주의는 신학과 교리를 매우 중시합니다. 신학과 교리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적용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혁주의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 정치를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형제 됨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개인적인 중생의 경험을 강조하고 확인하려는 것 역시 성경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워치만 니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형제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영적 우위와 순도를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와 재세례파와 구원파 신학이 교묘하게 혼합된 주장입니다. 


6) 워치만 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에는 불건전한 신학을 지닌 자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Jessie Penn-Lewis와 John Nelson Darby가 있습니다. 특히 Darby는 세대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워치만 니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대주의는 구분된 성경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과 방식이 다르다고 하는 신학입니다. 개혁주의는 이와 같은 신학에 반대합니다. 세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과정과 방식은 동일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합니다. 세대주의는 구원론뿐만 아니라, 종말론에 있어서도 매우 위험한 주장을 하므로 경계해야 합니다(세대주의 신학의 문제점에 관하여는 Q&A 란의 해당 내용 참조 바람). 


7) 성경에 충실하지 못한 워치만 니의 사상은 기독교 이단들을 양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외적으로 성경(말씀)을 강조하는 이단들의 경우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물(교주)나 단체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베뢰아 귀신 신학의 원조 김기동, 구원파 권신찬, 레마 선교회의 이명범 등은 워치만 니 사상과 관련되어 있는 대표적인 이단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으로 염두해 볼 때, 왜 많은 이단들이 워치만 니의 신학을 옹호하고, 모체로 삼으려는지 그 이유와 원인을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워치만 니 신학의 방대함과 성경에 대한 그의 열정 자체를 완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징은 성경의 본의를 드러내는 장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참뜻을 모호하게 하는 이단적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워치만 니의 글을 대하는 많은 분들이 그를 매우 성경적인 이해가 풍부한 신령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지방 교회에 속해 계신 어떤 분은 그를 가리켜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라고까지 추켜 세웁니다. 


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전체 신학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주장에서 진리에 관한 일관된 신학적 객관성이나 명료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사상은 온갖 잡다한 상념들로 버무려진 영양가없는 비빔밥 같습니다. 극단적인 신학 내용들로 구성된 가지들이 어지럽게 엉켜있는 흉물스런 나무와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워치만 니류의 인물과 그같은 신학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께 이런 조심스런 부탁 겸 충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이단 전문 연구가가 되실 의향이 있다거나 혹은 심오한 성경적 지식과 탁월한 분별의 은사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음습한 정글처럼 한 번 잘못 길을 들어섰다가는, 불안과 근심 속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교회 역사 속에서 옳고 바르게 판명된 신학과 교리에 근거한 성경 이해를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더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늘 곁에 신학적으로 바른 판단과 이해로서 인도해 줄 좋은 스승이 있다면 예외이겠지만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주 안에서 지혜와 명철과 분별의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p.s 그럼에도 워치만 니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기를 원하시는 분은 개인적으로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16문.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방송에 대한 답변 


<부정의 힘> 님의 질문

주나그네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오늘 굉장히 답답한 일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이 까페가 생각나더군요..   '신의 길 인간의 길' 이라는 sbs다큐를 보셨는지요? 그것이 어떤 색깔인지는 제가 그 프로를 시청하진 않았지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그 프로를 보고 많이 힘들어 하시더군요. 그런데 오늘 저도 그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프로를 본 것도 문제지만 그 프로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독일에서 학위를 딴 신학교 교수란 것입니다. 도대체 이 위험한 프로를 신학생들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슨 의도일까? 이 영상이 끝날 때 과연 어떤 코멘트를 말할까?  그 불쾌한 영상을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영상의 내용은 저 역시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수가 보여준 프로는 1부 예수는 과연 신의 아들인가? 라고 하는 제목부터 아주 거부감 드는 영상이었습니다. 마치 중립을 지키는 것 같지만 제 눈에는 온통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중간 중간에 인터뷰는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의 저자와 유태인 학자, '성서 비평연구가' 등이 나와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진리가 허구임을 갖은 증거를 대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머 이런 프로가 가끔씩 방영되는 일이야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도대체 이 교수가 이 프로를 통해 우리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 없이 수업을 끝냈습니다.



답변드립니다.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TV 다큐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 프로그램 방영으로 인해 불거진 논란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거센 반발에 대한 보도는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또 부정의 힘님의 물음을 계기로 인터넷을 통해 이 프로그램에 대한 여러 다양한 시선과 반응에 대해서 모니터링하였습니다. 덕분에 정밀한 분석까지는 아니지만 이 프로그램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그에 따른 사회적, 종교적 파장과 기독교의 대처와 과제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전체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도올 김용옥의 신학 논쟁과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와 <유다복음>과 같이 지난 몇 해 전부터 유행이 되다시피한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불신과 의문을 제기하는 일련의 반기독적 정서의 또 하나의 사회적 표출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시사해 줍니다. 첫째,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실망과 반감의 수위가 폭발직전에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사 이래 요즘처럼 한국 기독교가 사람들로부터 괄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합니다. 최근 한국 언론들이 쏟아내는 기독교 관련 기사만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개독교’ ‘개먹사’라는 신조어가 회자될 만큼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냉소와 실망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평소 기독교에 대해 유감을 갖지 않고 있다던 사람들조차 한국 기독교를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고급한 종교로 보기 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패하고 영악한 기득권 추구를 위한 종교적 이익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상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먼저 한국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반기독교적 사회적 정서와 함의를 세상 사람들이 현실 기독교에 갖는 잠정적인 불만이나 아쉬움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이 프로그램과 같이 공중파 방송을 이용하여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고 매도하는 의도는 진리 전쟁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생각해 보아야 할 더 중요한 두 번째 관점입니다. 


기독교에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은 이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 갖게 될 기독교에 대한 부당한 편견과 오해를 염려합니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이 프로그램과 같은 내용들은 기독교를 폄하하고 훼파하기 위해 사탄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전형적으로 사용해 온 수법이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허위 진술과 격렬한 저항과 의도적인 왜곡은 어떤 형태로든 사탄의 사주아래 일어나는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영적 활동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올수록,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과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후11:11-13)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또 다른 서신서에서는,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진리를 속이고 배교로 이끌기 위해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더 파괴력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왔고,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올수록 더 많은 거짓말과 부정과 속임으로 성도들을 꾈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에 방영된 프로그램이나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 코드>나 <유다복음>등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불신과 도전의 예이기도 하지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성도들에게는 우리가 처한 진리 전쟁의 현실을 실감하며, 더욱 말씀으로 무장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 현실은 진리 전쟁 중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엡 6:12)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은 "육체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으로"(고후 10:3-4)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사단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1)를 입어야 합니다. 성도의 싸울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6)뿐임을 기억해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사단 세력과의 영전 전쟁터로 나아갈 때, 우리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고후 10:5) 영적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첨언한다면, 왜 그 교수라는 분이 신학생들에게 이 프로그램을 보여주고서 아무런 코멘트 없이 자리를 떴는지...  저역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런 의혹들이 그 분이 독일에서 학위를 딴 신학자라는 내용과 얼마나 관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님의 묘사가 사실이라면 결코 신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작금의 신학교가 처한 현실이라면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 신학과 이외의 질문에 관해서는 별도로 답해 드리겠습니다.


P.S 유해무 교수(고신대학원 조직신학)의  '신의 길 인간의 길'  프로그램 후기를 <명쾌한 글읽기> 코너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보시면 유익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17문.  독일 신학에 관한 답변 


【부정의 님】의 질문

현재의 독일의 신학은 어떻습니까? (문제있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요 게다가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학위를 따신 3분의 태도가 너무너무 비슷해서 놀라웠습니다...


저번에 WCC 와 에큐메니컬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는데 노골적으로 종교 다원주의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사상이 너무 많이 엿보이던 찰나에 이번 사건이 터져서요.


복음을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 태도, '은근한 혼합' 역시 참으로 불쾌합니다. 게다가 노골적인 현 정권의 비판과 촛불집회 옹호 발언을 강하게 하더군요.


답변 드립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면, 그동안 신학 과정을 거치면서 유독히 제 주변에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의 절친한 친구 하나는 얼마 전까지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지금은 화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독일 출신들(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한 분들)은 하나같이 개혁 신학에 특심한 관심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 분들을 통해 독일 개혁신학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개혁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선에 닿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이 전통마저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 그 분들의 한결같은 전언입니다. 개혁신학에 관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개혁신앙을 지키기에는 너무 힘든 곳이 독일 신학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지요. 


17세기 유럽 대륙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독일 신학은 종교개혁의 흐름에서 저만치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17, 18세기의 독일 신학은 이성적, 관념적 철학 사상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특히 칸트(Kant)와 헤겔(Hegel)의 영향으로 진리에 대한 이성 비판이 제기되고, 계시를 도덕적 종교를 위한 가치로 여기는 풍토가 생겨났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19세기 들어 성경의 절대적 계시성에 대한 본격적인 해체 작업이 감행됩니다. 성경의 역사적, 비평적 연구 방법이 독일 신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됩니다. 일명 종교사학파(宗敎史學派)라고 하는데, 이들은 성경을 절대적 계시로 보지 않고 철학과 종교와 문화와 역사의 상관성 속에서 현대인에 맞게 성경의 실존적 의미를 재구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이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당시 독일 튀빙겐 신학교의 교수들이었습니다. 후대에 이들의 학문적 공로를 인정하여 튀빙겐 학파라(Tübingen Schule)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신학 전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하던 고전적인 성경 이해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이들은 루터와 칼빈의 성경 해석 방식을 전면 거부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성경은 원시그리스도교의 고대 문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은 구약의 고대 신화적 요소을 제거하고 예수님의 말씀(4복음서 중심으로)과 사도들의 기록물 중에 상호 모순된 부분을 찾아내어 성경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이들의 주장은 독일 신학계의 지배적인 학설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 가운데 오늘 독일 신학을 주도하는 기라성같은 신학자들(예를 들어, 바우르(Baurus), 스트라우스(Struth), 리츨(Ritschl), 로체(Lotze), 궁켈(Gunkel), 바이스(Weiss), 트뢸치(Troeltsch), 하르낙(Harnach), 바르트(Barth), 부르너(Brunner), 불트만(Bultmann), 틸리히(Tillich), 몰트만(Moltmann) 등등)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들은 신학적 관점과 해석적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영웅처럼 받들여지는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분명한 점 하나는 독일 신학뿐만 아니라 세계 신학계에 이들이 끼친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지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 노선과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독일 현대 신학의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때, 님을 당황하게 만든 그 교수들도 반종교개혁적 신학의 우산 아래 머물고 있는 분들이 아니겠는가 판단하게 됩니다. 아무튼 독일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근세 이후의 독일 철학과 현대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요청됩니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향후 관련 서적을 통해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18문.  이상한 신학 사상에 심취해 가는 신학교 동료들에 대한 답변 


【김은옥】님 질문

목사님 안녕하세요?

늘 좋은 글들을 읽으며 신앙과 신학의 틀을 세울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요즘 좀 어려운 마음이 많아서 질문드립니다.

저는 신학교 3학년에 재학(편입, 합동정통 )하고 있는데요. 주변 학우들 특히 가깝게 지내는 학우들에게 너무나 이상한 신학적 사상들이 많습니다. 성령의 직통계시, 알파코스(금가루, 짧은다리..), 트레아디아스 심취 등등.

그러나 제가 어려운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증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루어 진 현상들, 맞아 떨어지는 예언들...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제가 헷갈립니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조회하면 여러 신학자들도 다양한 사상을 주장합니다. 개혁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인지 아직은 확실한 분별이 안되니까요. 분명 이상한데... 그리고 목사님의 여러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만 학우들을 대할 때 극단적으로 이단스러우니까 가까이 하면 안되나? 고민도 되고요. 또 힘든 것들은 이들이 주변의 연약한 지체들을 계속 동요하며 그런 풍조를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고 있지만 매일 만나는 학우들 속에서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어떤 게시란에 올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올립니다 도와주세요. 


김은옥 전도사님께 답변드립니다. 


제가 알기에는 전도사님께서 수학하고 계신 곳이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이고, 교단 역시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 중의 하나인 것으로 아는데, 장래에 한국 장로교회를 이끌고 나갈 목회자 후보생들이 은사주의와 같은 불건전한 신학 사상에 매몰되어서 바르고 참된 신학을 배워야 할 교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전도사님께서 겪고 있는 일들이 신학교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사례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된 사례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진리에 관해 더욱 새로워지고 강력해 진 오류들이 좀 더 세련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교회뿐 아니라 신학교 강단과 교실에까지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은사주의 특강에서 밝힌 대로 오늘날 교회의 하나의 트렌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은사주의는 현대판 영지주의의 결정판입니다. 지난 수년간 한국 교회에 미친 결과만 보더라도 은사주의 잠재적 파괴력은 과거 그 어떤 사상보다도 강해 보입니다. 더욱 위험스러운 것은 은사주의의 영향력은 어떤 교단이나 교회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교파와 교단, 심지어 가톨릭과 이단에 이르기까지 은사주의의 마수가 뻗치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비록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이론과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확신이 있지만 은사주의가 휩쓸고 지나 간 곳마다 비슷한 결과물이 남습니다. 정통 교리에 대한 환멸과 혼돈, 신비주적 · 주관적 성경해석, 무분별하고 모호한 교회 연합, 탐욕적인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의 출몰, 진리에 관한 속임과 왜곡, 기독교적 상식과 윤리 파괴, 거짓 교회 부흥과 거짓 성공에 대한 집착, 물질적 부요와 건강과 번영에 대한 맹목적 추구, 비인격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앙, 성령 하나님의 기계적 수단화, 신흥 종교와 이단 사이비와 공조, 경건과 믿음의 파산. 부패한 양심과 거짓 확신...


오늘날 은사주의가 끼치고 있는 막대한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이천년 동안의 정통 기독교 역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속적인 힘의 논리와 교회 몸집 불리기 환상에 빠져 이제 교회 내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은사주의를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언젠가 걷잡을 수 없는 영적 재난을 입게 될 것입니다.


실례의 말씀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료들의 이상한 신학 사상을 염려하면서도 그들의 주장에 대해 긴가민가 하거나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전도사님 역시 아직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분별, 그리고 정통 신학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너무나 급속도로 성경적 분별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선생되는 사람들마저 그러한데 일반 성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실제로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의 파수꾼으로 쓰임을 받은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반하는 전 영역의 오류와 왜곡에 대해 가감하고도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였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오직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으며, 성경 자체에 대해 일관되고 정밀한 이해를 추구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른 분별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진리에 관한 내용들을 신앙고백 형태의 문서로 기록하여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일을 매우 가치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이런 관점과 비교해 본다면 오늘날 보수주의 혹은 정통주의를 추구하는 교단과 교회와 신학교와 목회자들의 무지와 뻔뻔스러움을 가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잘못된 신학 사상(특히 은사주의)에 빠진 동료들을 염려하는 전도사님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염려하기에 앞서 과연 그들에게 다가가서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있게 변증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시는 것이 더욱 유익할 듯 싶습니다. 


비록 지금 겪으시는 일이 답답하고 힘든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신학에 대한 더욱 확고한 분별을 추구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전도사님 개인에게나 전도사님에게 맡겨진 성도들에게 매우 유익한 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당장 그들과 대면하여 자신있게 논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불편한 마음을 잠시 접으시고, 보다 진지한 열심을 가지고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과 바른 신학적 체계를 확실하게 세우는 일에 더욱 전념하시길 바랍니다. 


진리를 향한 애정과 오류에 대한 증오심은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두 가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하게 그릇된 사실에 대해 대충 눈을 감아주거나 적당하게 타협하는 자세는 진리를 드러내어야 할 교회 선생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권면을 기억하십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이 말씀이 전도사님과 저의 고백과 소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9문.  이단 식별과 판단에 관한 답변 


【부정의 힘】님의 질문

위 글과는 상관 없는 내용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는 교단들이 있자나요.(성경을 좀 몰라도 교리가 좀 약해도 평신도들은 '이단'이라고 규정된 곳은 경계를 하더라고요.) 어느 교단이 '이단'이다! 라고 결정을 짓게 되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조엘 오스틴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경계해야 할 가르침인데 왜 이 사람이 '이단'으로 규정 되지 않는 겁니까? 


답변드립니다. 


정통 기독교 역사는 이단과의 논쟁과 변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이단’(영어로는 heresy)이라는 말은 헬라어 <아이레시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사도 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거나 도전하는 교회 안팎의 ‘분파’, ‘당파’, ‘편당’, ‘종파’ 혹은 ‘부조화’, ‘불화’, ‘논쟁’, 그리고 특정 종교와 철학을 신봉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만 구약 성경에 당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할 것을 분부하는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단자와 이단 사상은 구약 시대에도 매우 일반적인 형태로 나타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단자과 이단 사상은 교회와 신앙이 존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역사상 단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유구하면서도 치명적인 비성경적 종교 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 진리를 보존하고 현시해야 할 정통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단자와 이단 사상과 싸우는 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당연한 의무 사항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신앙을 세워가는 것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참 교회와 참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나 지나 간 교회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단을 판별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이단과 끝까지 싸워 승리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단의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들 역시 성경을 인용하고, 구원을 말하고, 믿음과 행위를 중요하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단의 배후에 역사하는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인 양 행세하고, 이단자들은 자신들을 의의 일꾼인 것처럼 위장하기도 합니다(고후 11:14,15). 물론 기독교 신앙을 빙자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일반인마저 이단이라고 지목하지 않을 수 없는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이단들은 윤리적 문제보다 교리적 측면에서 훨씬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단을 식별하는 기준은 그들의 외적인 행위에만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점이 이단을 식별하는 데 가장 커다란 어려움 중의 하나입니다. 님께서는 조엘 오스틴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볼 때는 이단인데, 왜 한국 교회(교단)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는가, (제가 부연해서 해석한다면) 그럼으로써 일반 성도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미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단을 결정하는 방식(과정)은 어떠한지를 궁금해 하셨습니다. 


사실 지나 온 이단을 설명하는 일보다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는 이단을 살피는 일은 몇 배의 관찰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입니다. 저 또한 조엘 오스틴과 그의 신학 사상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주장에는 기존의 이단과 공유되는 주장들이 있으며,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 체계를 심각하게 훼손시킬만한 여러 가지 인자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진리를 증거해야 할 목회자의 양심으로 조엘 오스틴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을 경계할 것을 권합니다. 거짓 복음의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의 신앙을 (범교회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는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절차가 요구됩니다. 


개인의 판단과 논쟁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의 생각은 개인의 것으로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때로는 권위와 객관성 시비 문제로 논쟁의 본질이 왜곡되거나 변질될 우려도 있습니다.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교회를 대적하는 이단적 사상 역시 진리 편에 서기를 원하는 전 교회 구성원들의 동의와 수납이라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이단을 식별하고 판정하는데 보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적시할 수 있는 경우는 개인적인 도전이나 반응의 결과가 아닙니다. 비록 처음에는 개인적인 관심과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이단 논쟁이라고 해도 공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단으로 판정되기까지는 반드시 성경 지식에 관하여 공신력을 가진 여러 사람이나 교회 단체에 의한 객관적인 성경 검증과 논의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아리우스주의나 네스토리우스주의 등과 같은 이단들을 정죄한 교회 회의나 17세기에 알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한 도르트 회의를 연상하시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오늘날에도 각 교단마다 이단 문제를 취급하는 연구 기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해석적 관점과 교리적 이해의 차이가 있는 이상, 이단 시비에 관한 한 모든 교단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단 연구라는 것이 성경 해석과 교리를 근거로 하는 객관적 활동이라고 할 때, 어쩌면 ‘이단이 누구냐’보다 ‘이단을 이단이라 하는 자가 누구냐’가 더 중요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 시대에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이단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이단들은 자신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교회와 성도를 이단으로 단정합니다. 그래서 이단 연구자들은 먼저 성경에 대해 철저하고 바른 이해와 정통 교리와 교회 역사에 대해 확고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확보되지 않은 이단 논쟁은 오히려 객관성을 상실한 자기 주장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이왕에 조엘 오스틴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더 덧붙이겠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신학 사상을 담은 책들이(사실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구심이 들지만) 대형 교회와 대형 목사(?)들의 후원과 비호 아래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과 신실을 부르짖는 신학자와 목회자라면 개인적으로든지 아니면 집단적으로든지 이런 기현상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임을 압니다. 조엘 오스틴은 이전의 전형적인 이단들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기독교 진리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교회 웹사이트에 가 보면 자신의 교회를 복음에 충실한 복음주의 교회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복음주의, 심지어 보수주의 교회중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존의 이단보다 더 이단적인 사상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종교를 믿든 구원은 가능하며, 자신은 그중에서 기독교의 구원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주장이나 몰몬교와 같은 이단들 역시 정통 교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잠재된 자아를 개발하여 성공하는 것을 복음이 실현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 등등 그의 메시지에는 진짜 복음을 속이는 가짜 복음의 내용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와 목회자로 떠받들여지고 있습니다. 저는 조엘 오스틴 부류의 목사와 그의 교회같은 곳이야말로 오늘날 기독교 진리에 반하는 배교에 서 있는 거짓 선생과 거짓 교회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과 교회는 반드시 성경과 바른 교리로 검증되야 하며, 이 일에 은사가 있는 정직하고 소신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나서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공식적인 이단 논쟁의 대상이 될 때까지, 혹은 이단으로 확정되기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기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편에서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와 같은 불건전한 신학과 교리와 목회자를 분별하며 대항하며 극복해야 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일관된 교훈이었으며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를 향한 동일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단이나 혹은 이단적인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바른 성경적 안목과 이해를 키우는 설교와 성경 공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종교개혁적 전통의 역사적 신앙고백에 관한 교육이 보다 철저하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셋째, 정통 교회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통해 이단들의 형태와 속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넷째, 미혹당하지 않도록 멀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다섯째,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부정의 힘님 뿐만 아니라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께 분별하는 지혜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승리를 위한 인내의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문.  안식일 교회(SDA 어학원) 관련 답변 


【mepasol1】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이단에 관련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청년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제시하는 그들만의 교리와 그들만의 말씀에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어이없는 상실감과 허탈함과 안타까움이 함께 하는 이 시대인줄 압니다. 


이번 제가 궁금한 사항은 이단들의 기업중 제 7일안식교안에서 설립된 SDA어학원에 관련되서 견해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제 주변에 있는 많은 크리스천이 SDA어학원을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어학원 시스템은 다른 학원 못지 않게 안정적이고 전문적이며 다른 타 학원에 비해 학업 향상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렇기에 기독교 청년들도 많이 다니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들의 말은 종교 이전에 학업향상을 위한 방법이기에 괜찮다. 또한 학원 내에 그들만의 채플이 운영되지만 그 자리를 떠나든지 그 자리에 있어도 마음은 아니니 괜찮다고 하며 그 학원을 몇 달간 지속적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말씀에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결단코 그 곳에서 함께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많은 크리스천들의 생각이 조금은 변질되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학원을 통해서 어학 실력을 쌓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란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 잠깐이니깐 괜찮다라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 아닌지? 이 자체가 말씀 아닌 다른 것에 타협하는 것이 아닌지? 아님 제가 너무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것인지요? 

모르겠어요.ㅋㅋ 감사합니다. 답변 부탁드릴께요


답변드립니다. 


얼마 전에 30년 간 안식일 교회를 다니셨다는 부부께서 저희 연구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시는 일이 계기가 되어 안식일 교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더랬습니다. 안식일 교회의 정체에 관해서는 본 카페의 <이단에 관하여> 코너에 올린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관한 예장(합동, 통합), 기성 총회의 결의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 총회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동안 수차례 안식일 교회 성도들과 만나서 나눈 대화와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세 총회의 연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 교회에서 늘 강조하는 것처럼 북미지역에서는 실제로 기독교 이단이 아니라 근본주의에 가까운 기독교 보수 교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도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장로교)나 월터 마틴, 호튼 데이비스(침례교) 같이 이름난 일부 신학자들과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과 미국의 전(前) 대통령 빌 클린턴 같은 유명 인사들의 역할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적극적인 혹은 암묵적인 지지와 호응 속에 안식일 교회는 북미 지역에서 최근 들어 가장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는 교단으로 지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안식일 교회의 일부 교리(핵심 교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는 이단성이 농후한 주장들입니다. 설사 안식일 교회가 기존의 사이비 이단들에 비해 복음주의와 중첩되는 주장이 많고, 경건하고 건전한 생활 방식을 강조하고, 교육·건강·의료 사업을 통해 일반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안식일 교회가 강조하는 교리는 사도 바울에게 정죄를 받았던 갈라디아 교회의 다른 복음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주의와 경계를 해야 할 대상임에 분명합니다. 


저는 질문하신 내용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정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SDA 어학원이 안식일 교회(단)와 직접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학원에 다녔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안식일 교회를 위한 직간접인 포교의 수단으로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구나 그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강사의 경우 북미 지역 안식일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대부분이고, 또한 한국인 강사 역시 안식일 교회에 다니는 성도라는 점이 판명하게 드러난 상황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굳이 그와 같은 곳에 가서 영어를 배워야 할 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7, 8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고국에서 청년부 사역을 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청년부에 나오던 청년 몇몇이 영어 공부를 이유로 그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중의 한 청년이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어릴 적부터 반듯하게 신앙 생활을 잘 해 왔다고 평가받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SDA 학원을 선택한 이유와 영어에 자신감을 갖게 된 과정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한 가지 고민은 레벨이 올라가면서 신앙적인 혼돈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SDA 어학원을 선택했을 때는 그저 영어 공부만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SDA 학원 뿐만 아니라 안식일 교회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마음을 털어 놓았을 때에는 상담이라기 보다는 안식일 교회의 입장에서 일종의 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후 그 청년의 신앙이 제자리를 잡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그 청년의 경우를 보더라도 안식일 교회가 SDA 어학원과 같은 교육 사업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결과가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앙적인 혼돈과 근심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구태여 그런 곳을 찾아가서 공부를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영어 공부를 위한 다양하고 효과적인 정보와 방법이 넘쳐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어 공부라는 목적을 위해 이단적 신앙 배경에 있는 어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분명 지혜롭고 분별력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학원을 다니는 일 자체를 정죄하거나 죄악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경우에 국한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와 같은 사안은 기독교인들이 일상 속에서 늘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으로서 이단과 관련된 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을 사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물음도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한기총)을 중심으로 이단 기업 제품 불매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많은 이단들이 기업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는 동시에 활동을 위한 경제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무심코 흘려보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단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기업을 통한 그들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경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 기업의 제품을 구매한다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형태의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각자의 믿음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을 최대한 이해하고 준중하는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의 시장에서 파는 대부분의 고기는 우상 숭배에 제물로 바쳐졌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방 신전에 바쳐진 고기 중 일부는 제사장이나 예배자에게 주어졌지만, 쓰고 남은 대부분의 고기는 시장 상인들이 가져다가 다시 일반인들에게 판매하였습니다. 신전에서 흘러나온 고기들이 다른 것들과 뒤섞여져서 시중에 유통되는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마는지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모르고 먹은 고기가 우상의 제물일 수 있고, 그러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 숭배에 동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일은 이 시대의 교인들이 고민하는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선택과 자유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첫째,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먹지 않는 일은 개인의 신앙의 양심과 자유에 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해도 우상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이상, 성도는 출처를 묻지 않고 먹을 수 있습니다(고전 10:25).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자는 믿음과 양심에 위배됨이 없는 한,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자유를 행사하는 범위도 넓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SDA 어학원을 다니는 일이나 이단 기업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하는 일 자체를 두고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개인의 믿음과 신앙적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정죄받거나 제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자유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그리하여 개인의 믿음과 양심에 따라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개인적인 자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타인(특히 믿음이 약한 성도)의 믿음과 양심을 제한하는 행위가 된다면 오히려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음식의 출처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거나 음식이 자신의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스스럼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었음을 지적한다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까지 말합니다(고전 10:27, 28).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서 우상의 제물마저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허용되어지는 성격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개인의 만족을 위해 사용되어질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목적을 위해 절제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며 동료 그리스인들의 최선의 유익을 위하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권리와 특권은 누림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배려와 이해와 아량과 겸손의 마음으로써 교회와 성도를 섬길 때에 그 가치를 발하는 것입니다. SDA 학원을 다니는 일이나 이단 기업 제품을 구입하는 일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영어 공부만을 위한 목적이라면 SDA 학원을 못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이단 기업 제품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상 제물을 먹고 마시는 일처럼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믿음과 양심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자유의 관점에서 용인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과 양심을 따른 자유로운 결정일지라도 다른 성도, 특히 연약한 성도의 믿음과 양심을 제한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누리는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근거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구속하는 행위는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경건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어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경건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어를 공부한다는 이유로 굳이 SDA 학원을 찾거나, 이단 기업 제품인 줄 알면서 구태여 구입하는 일은 삼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하고 성숙한 성도라면 연약한 성도가 모르고 하는 일을 무조건 정죄하기 보다는 그의 신앙이 바르게 세워지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교회와 성도의 유익과 덕을 위한  거룩한 수단이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성경적인 이해를 전제하지 않는 한, mepasol1님이 제기하신 것과 같은 문제는 매우 의미있는 논의의 주제임에 불구하고 객관성을 상실한 상황 논리로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각(마음)의 참과 거짓을 규명하는 일이 성도에게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 제물 논쟁의 결론으로서 주신 말씀을 오늘 질문하신 내용의 결론으로 전해 드리면서 맺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21문.  프리메이슨(Freemason)에 대한 답변 


【부정의 님】의 질문

'프리메이슨'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단체에 대한 개념을  잡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단체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답변드립니다.

지난번에 드린 답변 내용이 갑자기 사라진 통에, 다시 쓰려니 조금 막막합니다만 이번에는 아주 간단하게 제 생각을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님께서는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동시에 이 단체에 대한 제 생각(견해)을 궁금해 하셨습니다. 실망스럽게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이 단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흥미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분들에게 주의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국에서 십 수 년간 청소년, 청년 사역을 거치면서 이 단체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때마다 관련 서적이나 자료를 통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마치 UFO를 좇는 사람들처럼 확인되지 않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프리메이슨이 UFO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한 이 단체에 관심을 두는 분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이 단체에 대해 특심한 관심을 가진 이들 중에는 신실하고 경건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있고, 이 단체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만 말씀드린 것 같이 말씀과 신학으로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일에 과도한 관심과 지나친 열심은 교회와 성도의 건강한 신앙을 위해 그리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자로서 왜 이 단체와 그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 그리 심각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현재 시중에 떠돌고 있는 프리메이슨에 관한 정보(자료)는 객관적인 검증이 불가능한 내용들, 즉 절대적인 신뢰성을 가질 수 없는 구설수, 가설, 낭설들이 너무 많습니다. 둘째, 현재 진행중인 프리메이슨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정통 기독교 신학과 역사와 교리의 지경을 벗어나, 자극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한 근거없는 음모와 막무가내식 비판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셋째,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개혁신학과 관련된) 교단이나 교회나 신학자로부터 이 단체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신학 논의와 판단과 평가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넷째, 설령 프리메이슨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와 세상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바뀌거나 변경될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정통 기독교 신학과 역사를 통해 검증되고 확인된 내용에 불과합니다. 다섯째, 성도라면 주관과 불확실성을 담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해보다는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 말씀에 준거한 계시의존적 사색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두 가지 내용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답변을 대신코저 합니다. 이 말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의 이름으로 사는 자라면, 누구나 동일하게 생각하고, 애쓰고, 추구해야 할 신앙의 자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딤후 3:14-17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전 4:7-11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22문.  구원파에 관한 답변 


【부정의 힘】님의 질문

요즘 이단들은 더욱 교묘해져서 그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뿌리는 전도지는 딱봐도 틀린 것이 나오지만 구원파의 전도내용은 그 개념이 굉장히 모호한 듯 한데요. 이들의(구원파) 구체적인 문제점과 구분법은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도 색안경을 끼고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원파에 관한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보면 '히드라'(‘Ύδρα)라는 괴물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몸에 아홉 개의 목을 가진 거대한 물뱀 모습의 이 괴물의 입과 피부에서는 치명적인 독이 품어져 나옵니다. 게다가 다른 목을 잘라내면 거기에서 또 새로운 두 개의 목이 더 생겨나기 때문에 아무리 용맹한 신이라도 히드라와 싸우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횡행하고 있는 구원파 이단들을 영적 히드라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원래 몸뚱이(한국 구원파는 권신찬 파에서 유래됨)는 하나인데 각기 다른 모양의 머리(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을 머리-교주-로 각기 다른 이름으로 활동함)를 하고서 맹독성이 강한 거짓 복음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드라의 독이 살결에 닿는 순간 살이 썩어들어갔던 것처럼, 구원파의 거짓 복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영혼을 부식시킵니다. 또한 놀라운 자체 번식력과 재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와 같이 강력한 힘과 지략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웬만해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 성숙한 이해와 분명한 확신, 그리고 논리력과 설득의 은사가 부족한 분이라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바른 교훈에 착념'(딤전 6:3) 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구원파의 누룩이 교회 안까지 음험한 방식으로 퍼져가는 때를 감안할 때, 구원파의 비성경적 주장들을 바르게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제가 직접 답변드릴 수도 있겠으나, 종래에 구원파의 문제점을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좋은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료들을 전해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 중에 정동섭 교수(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전 침신대 교수)라는 분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 분은 구원파와 관련해서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입니다. 오랜 세월 구원파에 몸을 담았다가 주의 은혜로 돌이킨 후에, 몸소 경험한 구원파의 이단 정체와 폐해를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 교수가 그의 아내와 함께 쓴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죠이선교회)라는 책으로 인해 구원파와 상당 기간동안 법정 공방을 거듭하다가, 지난 달(2008년 9월)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승소하였습니다. 아마도 정 교수와 구원파 간의 싸움이 더 치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만 정 교수의 활약은 구원파라는 흉물스런 이단과의 전투에서 교회의 진지를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물론 구원파에게는 정교수와 같은 분들이 공공의 적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구원파에 대한 정 교수의 분석과 제안은 구원파를 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에 구원파와 관련된 정 교수의 <구원파는 왜 이단인가?>라는 글과 위에 소개해 드린 정교수의 책을 잘 요약한 내용을 <이단에 관하여> 코너에 올려놓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3문.  헬라어 학습에 관한 답변 



안녕하세요

헬라어에 궁금한 점이 많아 글을 올립니다.

헬라어 신약 독해의 원리와 방법이 궁금해요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수고해주세요


답변 드립니다.


헬라어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귀한 일입니다. 허나 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좋을지 고민이 되네요. 아직 헬라어를 접해 보신 적이 없거나 알파벳조차 모르시는 경우라면, 더 난감하겠지요. 성경 원어의 원리와 독해를 몇 마디로 간추려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무리일 듯 싶습니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언어 학습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차근차근, 시간이 날 때마다 가까이 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단답형 답으로는 제한이 있는 것이니 만큼, 헬라어 학습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소개해 드리기로 하지요.


신학교 시절, 이순한 목사의 『(개정판) 신양성서 헬라어』(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라는 책자로 헬라어 문법를 배웠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헬라어 기초를 다지기에는 좋은 참고 서적입니다. 별도로 문제 풀기를 위한『자습서』도 함께 구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책이라 지금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언어를 생동감있게 배우려면 직접 소리를 들으면서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텐데요. 인터넷으로 헬라어(히브리어도 가능)를 배울 수 있는 국내 사이트를 이용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원어학당 엘피스 학당(http://www.hope-ind.com/Elpis/Elpis_home.htm)이라는 사이트는 the best of best 입니다. 사전, 문법, 성경 강좌는 물론 성경 원어와 관련된 국내외 유수의 자료들과 성경 프로그램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방문해서 도움을 얻곤 하는데, 운영자 분의 성경 원어에 애정과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 원어를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국내 신학교나 신학대학원마다 1,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 교수를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성경 원어를 가르칩니다. 학기 중에도 하지만, 때로는 방학 중에 intensive course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단기간에 좋은 선생으로부터 성경 원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지요.


일반 성도라도 사정을 잘 이야기하면 청강이 충분히 가능할거라 생각됩니다. 성경 원어를 배워보겠다는데 이유를 들어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요. 덕분에 신학교도 가보고, 도서관도 방문해 보고, 신학생들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일석다조가 아닐까 싶네요.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24문.  안식일과 주일 성수에 관한 답변 


【로뎀나무】님의 질문

목사님께 ...

여기는 이제 완연한 겨울입니다. 오늘 눈도 오구요. 건강하시죠?


다름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였는데 원래 토요일이 안식일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데, 이거 성경엔 없는 내용이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우리가 잘 지키고 있는게 맞나요? 우리 인간 의지대로 바꿔서 지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드립니다. 


<주일 성수>와 관련된 주제는 교회론 강의를 통해 조만간 다루게 될 내용입니다. 카페에 강의안을 올린 이후에 좀 더 자세하게 확인하시기를 바라겠고요. 여기서는 질문하신 내용에 초점을 맞춰서 간략하게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볼 때, 사도 시대 이후 어거스틴과 칼빈을 이어 17세기 청교도들로 계승해 오는 신앙을 가리켜, ‘개혁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개혁 신앙’을 다른 말로 하면, 오직 성경을 중시하는 사상이라고 해서 ‘성경 신앙’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개혁 신앙과 성경 신앙을 고수해 온 사람들을 가리켜 또 다른 말로 ‘엄밀하고 철저한 주일성수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주일을 참되고 바르게 지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온 심혈을 기울여 지키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주일 성수 사상은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로부터 16, 17세기 종교 개혁과 후대의 청교도에까지 한 번도 중단되거나 혼돈됨 없이 지속적이고 고유한 형태로 강조되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개혁(혹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신앙고백서들 중에서도 주일 성수 사상에 대해 성경적인 치밀한 논의와 확고한 근거를 통해 신약 이후의 모든 교회가 계승해야 할 신앙적 고백의 차원으로 집대성한 문서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주일 성수와 관련해서 이 고백서 작성에 참여하여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분이 윌리암 구지(W. Gouge, 1578-1653)입니다. 정통 장로교 역사가들은 주일 성수와 관련하여 이 분이 정통 교회와 신학에 끼친 영향을 일견 칼빈보다도 더 풍성하고 의미있는 업적이라고 할만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지 선생이 어떤 근거로 주일을 참된 안식일이라고 보았는지 그의 근거를 살펴보는 것으로 질문하신 내용에 충분한 답변이 되리라 생각하여 그의 주장을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교회론 강의안(『주일 성수』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지는 주일을 참된 안식일로 섬겨야 하는 근거로 다음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지속적인 관습이기 때문이요, 셋째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요, 넷째는 제 칠일을 요구하는 율법의 실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신적 권위 때문에.

신적 권위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주일 성수를 모든 사람의 판단과 양심에 정착시키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간의 첫 날(주일)에 함께 모였습니다(요 20:19, 26; 행 2:1). 그로부터 여러 해 후에 기록된 성경에도 성도들은 그 날 모여서 떡과 교제를 나누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행 20:7). 그리고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셨음에도 그 날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고전 8:6). 이 현상을 기록한 사도들은 이 날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드렸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관례적으로 모여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2. 그리스도 교회의 지속적인 관습 때문에.

구지는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의 모든 교회는 이 날을 주의 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거룩한 날로 기념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구지의 이러한 입장을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 교회는 교회의 집회를 위하여 주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 이래로 주일이 교회의 집회일로 확정되었으니, 이 주일은 거룩한 안식을 위한 것으로 예배와 사랑을 위하여 오늘날까지 옳게 보존된 교회의 실천적 행습이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사도 시대 이후 모든 교회들이 이 날을 참된 안식일로 기념하여 지키는 데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구지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 사건을 주일을 참된 안식일로 보는 중요한 근거로 보았습니다(고후 5:17).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망 권세를 가진 마귀에 대하여서도 완전히 승리하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중단되었으며, 사망과 마귀가 완전히 정복된 이 날은 창조시에 말씀하신 참된 안식일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후부터 교회는 매 주마다 이 날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즉 구약의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인데, 친히 안식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안식일을 주일의 마지막 날에서 첫 날로 바꾸셨습니다. 


4. 제 칠일을 요구하는 율법의 실체 때문에.

일곱째 날을 요구하는 율법의 본질은 창조의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들의 주를 마무리 짓는 날이었다면, 우리의 안식일은 새 주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이 바뀜에 있어서 어느 주도 두 안식일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주도 안식일 없는 주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을 율법의 실체이며,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를 기억하며, 그 분과 더불어 영원히 안식하는 날로 정하신 것입니다. 


결론 

17세기의 종교개혁자 부쳐(Bucer)는 교회가 주일을 참된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1,600년 동안 지켜온 교회의 전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주지한 내용대로 개혁교회는 철저하고 엄밀한 주일 성수 사상을 개혁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특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개혁신앙을 반대하거나 유린하려고 했던 이들은 주일 성수 사상의 근간을 허무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주일을 성경적으로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일은 개혁교회의 참된 신앙 정신을 파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중에도 여전히 구약적 의미에서의 안식을(토요일)을 고집하는가 하면, 아무런 기준이나 분별없이 주일을 뜻없이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율법주의요, 후자는 무율법주의라는 허울을 쓴 다른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대 가운데 주일의 본의를 성경적으로 기억하여, 바르게 지키는 것은, 곧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과정이요, 구원의 궁극적 완성으로 다가가는 승리의 여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5문.  창세기 1장과 관련된 물음에 대한 답변 


【uk_choi】의 질문 

안녕하십니까? 창세기 1장에서의 질문을 드립니다.


1.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6일간의 시간에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하루의 시간이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시간과 같은 24시간인지? 아니면 다른 시간으로 보는지요? 개혁주의자들은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2. 첫째날 빛을 창조하신 빛이 과연 어떤 빛을 말합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이 성경 구절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를 즉 첫날 창조하신 빛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다’라고 말하는데...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3. 창세기 1:1 절의 천지 창조 때의 이 하늘과 1:8절에 나오는 하늘과 다른 하늘인지요?


4. 둘째 날에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는데 궁창 위의 물은 무엇을 가르키는지요?


답변 드립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주셨네요. 시간 관계상 질문을 나누어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1. 2 질문, 그리고 다음 기회에 3, 4 질문에 답해 드리겠습니다. 


1. 날에 관하여.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יום, day)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주 창조의 연대와 시간적 길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 ‘날’은 상당히 긴 기간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요세푸스, 이레니우스, 오리겐과 같은 교부나 고대 역사가에 의해 제기된 학설인데, 이들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 1:5, 8, 13)라는 문구를 하나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날’을 한 시대의 끝과 다른 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지요. 공교롭게도 이 주장은 19세기 이후에 다시 강조되었는데, 과학과 지질학에 근거한 과학 이론자들에게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지구 표면에 남은 지질학적으로 볼 때, 창조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날’을 막연히 긴 시간으로 규정하는 주장은 제 칠일 안식일의 길이 역시 무한정 연장된 시간이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날’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과학적 현상을 근거로 창조의 ‘날’을 무한히 늘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대해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날’을 문제 그대로의 24시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날’에 대한 가장 유력하고 전통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과 그 외의 많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지자를 받고 있는 주장입니다. 근거로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날’은 매우 극소수 몇 번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24시간 하루를 가리키는데다가, 제 7일이 안식일로 국한되었다면 다른 6일도 당연히 같은 하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벌콥이나 보스나 댑니같은 분들도 이 견해를 성경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입니다. 저 역시 원칙적으로는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셋째, ‘날’의 기간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절충적인 주장이 있습니다. 이 견해가 대두된 것은 ‘날’의 개념이란 태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때, 태양이 창조된 제4일 이후와 이전 3일은 서로 다른 기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어거스틴과 바빙크와 같은 개혁파 입장에서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바빙크는 오늘의 24시간은 지축을 중심으로 한 땅의 자전과 그와 연결하고 있는 태양과의 관계에서 확정된 만큼 태양 창조 이후의 4일간은 현재의 날과 동일시하더라도, 창조의 첫 3일은 전혀 다른 날이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주장을 전개합니다.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면서, 세 번째 견해에 대해 비판적인 수용을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두 가지 다른 견해를 어떻게 공유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겠으나, 모두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의 원안과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한 의견이라고 봅니다. 


2. 창세기 1장의 빛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님께서는 창세기 1장 3절의 빛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라는 주장과 연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아마도 인용하신 고린도후서 4:6 말씀은 이 견해를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로서 제시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해석입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초장에 자주 언급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빛’의 개념과 창세기 1장의 빛의 개념을 연관지으려 하다 보니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 되신다’는 표현과 창세기 1장의 ‘빛’은 엄연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자의 ‘빛’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실체를 드러내는 의미인데 반해 후자의 ‘빛’은 모든 에너지원의 근원으로서의 발광체들(luminaries)을 의미합니다. 전자는 창조주이신 반면 후자는 피조물입니다. 고로,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창세기 1장의 빛과 ‘예수 그리스도다’를 혼동하여 동일한 개념으로 여기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혼미케 하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이런 종류의 풍유적 성경 해석은 지양해야 합니다.  


3. 창세기 1:1 절의 천지 창조 때의 이 하늘과 1:8절에 나오는 하늘과 다른 하늘인지요?


4. 둘째 날에 나오는 궁창아래의 물과 궁창위의 물로 나누는데 궁창 위의 물은 무엇을 가르키는지요?


여러 가지 사역들이 겹쳐 있었는지라 답변이 조금 늦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 내용이라 한꺼번에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창 1:1에 언급된 ‘천지’와 창 1:8의 ‘하늘’과의 차이에 대해 궁금해 하셨는데요, 이 물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 1:1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창 1:1에서 이미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이후(다른 날에)에 또 다시 하늘과 땅을 만드신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창 1:1은 천지 창조에 대한 단순한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 기자(모세)의 계시 기록의 방식에 대한 무지 혹은 오해로부터 야기된 것입니다. 창세기 첫 절인 1:1은 하나님의 무에서 유에로의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창조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즉 창 1:1은 하나님의 선언(말씀)시 하늘과 땅이 직접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언급된 ‘천지’는 무엇이고, 다음에 이어지는 ‘하늘과 땅’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오게 되겠지요. 


1절의 ‘천지’는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 행위로 만들어진 ‘온 우주 전체’(the entire universe)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임’()은 복수 명사로, 직역하면 ‘하늘들’(heavens)입니다. ‘샤마임’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인들이 지닌 하늘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잘 반영해 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늘들을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등 세 가지 하늘로 구분하였습니다(고후 12:1-4). 첫째 하늘은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atmosphere)을, 둘째 하늘은 대기권 밖의 공간(outer space)를, 그리고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천국을 가리킵니다. 바빙크도 이 해석에 동의하면서, 1:1의 첫 창조 행위 때에 이미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주지인 하늘들의 하늘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봅니다(참, 욥 38:4-7). 다시 말해, 창 1:1의 하늘은 창공으로서의 하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하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8절의 ‘하늘’은 무엇일까요? 이 하늘의 다른 이름은 ‘궁창’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7에서 하나님께서 나누신 궁창 위의 물을 가리킵니다. 궁창은 히브리어로 ‘라키아’이라는 말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두들겨 넓게 편 판(板)’이란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역본 성경들은 이 단어를 단단하고 넓은 금속판을 가리키는 ‘firmament’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궁창 개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8절의 하늘은 궁창 위의 물이고, 이 물은 첫째 하늘에 있는 물, 즉 대기권에 있는 구름층 혹은 수증기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창 아래의 물은 당연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물을 가리키는 것이 되겠죠. 이해가 되시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첨언하자면, 창 1:1절의 ‘천지’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1:2에서의 ‘땅’은 모든 생물의 존재와 활동의 무대인, 우리가 사는 ‘지구’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기사는 우주 전체 가운데 오직 생명체가 존재하는 ‘지구’와 그 땅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또 다른 인격체(외계인)를 찾는 일은 허망한 일이지요. 아무튼 이 땅을 사는 동안, 이토록 놀랍고 신비하고 원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 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6문. 교회 정치와 관련된 지적에 관한 답변(신본주의 정치와 민주 정치, 대립적인가요?) 


【하늘 사랑】님의 질문

한국 장로교단의 모든 헌법에 보면 장로교 정치의 정의에 '기본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주의 정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본주의 정치'로 고쳐야 맞다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주나그네님께서는 장로회 정치의 정의에서 '신본주의적 공화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공화정치의 사전적인 의미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 또는 대표 기관의 의사에 따라 주권이 행사되는 정치'로써 과거에는 과두정치나 귀족정치도 여기에 포함이 되었지만, 현재는 '민주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한 가지 의문나는 점은 '공화정치(민주주의)'와 '신본주의'가 과연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인데 어떻게 신본주의적 공화정치가 가능할 수 있는지? 제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보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까 생각됩니다. 


민주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선거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도 총회장 선출에서부터 집사 피택에 이르기까지, 또는 가장 사소한 기관의 임원들 하나를 선출하더라도 선거에 의해서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적합한 사람보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이 뽑히기 일쑤고 선거를 위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이 반대해도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가야 할 '신본주의'는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도리어 신본주의와 어울리는 말은 '왕권정치'가 아닌가 생각되구요, 그 왕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말씀)가 되겠지요. 


철저하게 말씀에 의지해서 다스리고, 교회의 일꾼을 선별해서 임명했던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정치는 민주주의 정치라고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성령의 인도함을 좇은 왕권정치라고 함이 더 옳은 것 같은데요... ^^


답변드립니다. 


윗 글은 【하늘 사랑】님께서 2차 공개강좌(교회론)에 올려진 강의안 “교회 개론(8-1)”(부제: 교회 개혁의 시작과 마지막으로서의 교회 정치1)중의 ‘장로회 정치’에 언급된 일부에 대해 개인의 생각을 전달해 주신 내용입니다. 직접적인 물음은 아니시지만, 교회 정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셨기에, 임의로 이 코터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모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길 바라면서, 【하늘 사랑】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내용에 대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첫 번째 단락에서 “한국 장로교단의 모든 헌법에 보면 장로교 정치의 정의에 '기본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주의 정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저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표현입니다.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측 헌법에는 이런 표현이 명시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알지 못하는 어느 장로교단의 헌법에서 이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장로교단의 모든 헌법에 보면’이라는 말은, 혹 모르는 독자들로 하여금 단정적인 오해나 근거없는 확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사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2.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님께서 하신 말씀(지적)에 대해 보다 집중해서 설명 드리고 싶은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님께서는 제가 장로회 정치의 정의에서 ‘신본주의적 공화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지적하면서, 공화정치는 오늘날의 민주정치와 동일한 용어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신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므로 이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틀리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님께서 약간의 혼동을 하고 계신 점이 있습니다. 교회 정치적 용어와 개념에 대해 아직 잘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정치, 그러니까 좀 더 제한해서 말씀드린다면 장로교 정치에서 사용되는 공화정치나 민주정치라는 용어는 개념상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화정치와 민주정치와 큰 틀에 있어서는 유사한 정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교회 정치를 특징짓는 구체적인 요소에 있어서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례를 들자면,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정치 원리를 신학과 목회에서 구체화된 적용을 시도했던 존 칼빈은 신본주의적 교회 정치라는 표현보다, 신본주의적 공화정치 혹은 공화주의적 민주정치 혹은 귀족주의적 민주정치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였습니다. 제가 저희 교단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장로교 정치는 ‘신본주의적 공화정치’라고 정의 내린 것도 칼빈의 교회 정치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은 왜 ‘신본주의’라는 표현대신에, 님께서 염려하는 이런 여타의 정치 용어를 장로교 교회 정치와 관련시켜서 설명하였는가? ‘신본주의’보다 ‘공화주의’ 혹은 ‘민주주의’가 더 성경적인 제도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아니면 칼빈은 원래부터 ‘신본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을까요?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왜 칼빈과 또한 그 이후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교회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 ‘신본주의’라는 단독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말씀드린대로 여러 가지 형태의 혼합주의적 정치 형태로서 (장로교) 교회 정치를 표현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 올바른 답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님의 지적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구약 시대 이후로 ‘신본주의’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정치 제도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하면, 하나님께서 통치 제도와 통치자와 구체적인 규율(율법, 헌법)을 허락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나 신탁을 통한 방식으로 국가를 다스리시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점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 정치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다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운영 방식이 바로 교회 정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무런 목적이나 수단 없이 그때마다 생각나는대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며’(고전 14:33),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시는 분’(고전 14:40)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본의대로 다스리시기 위하여 교회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바르게 운영하기 위한 조직과 질서와 지도의 방편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교회 정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교회 운영, 곧 교회 정치의 수단들을 믿는 자들의 손에 맡기셨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당신의 뜻에 따라 세워 가심에 있어서, 사람의 의지와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의 뜻을 좇아 행하는 이들(택자들)에게 교회의 본질과 가치가 고백되고 드러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시라고 할 때, 하늘 아버지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인 간여(계시, 환상, 음성을 통한 신비적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이신 성령의 간섭과 지도 아래, 교회를 위하여 특별한 소명을 맡은 자들을 통하여 그 분께서 위임하신 권세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권통치’입니다. 고로, 교회 정치를 이해할 때,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리시는 권세, 곧 교회를 정치할 수 있는 권세를 누구에게 위임하셨는가를 살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칼빈과 개혁자들은 장로교 정치의 권세는 성직자 개인(교황이나 감독)이나 불특정다수(회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치리의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장로회에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설명은 철저한 성경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지요. 칼빈과 개혁자들이 장로교 정치를 공화정치나 귀족정치나 민주정치라는 말로 표현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입니다. 즉 공화정치란 1인 독재적 전제적 교회 통치(로마 가톨릭과 감독 교회)에 반대하는 개념입니다. 교회 통치의 주권(권세)가 개인이나 일부에게만 집중되어지는 것을 거부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개혁자들은 교회의 실제적인 통치는 귀족정치와 민주정치를 결합한 형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귀족’이란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특권층을 말하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자질을 갖춘 인물들(장로들)을 가리키는 신학적 수사(修辭)입니다. 성도들은 이 장로들에 대해 신뢰와 순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교회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방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춘 장로들의 말에 신뢰와 순종을 해야 하며, 또한 이렇게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하여 교회 정치가 순전하게 이행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민주정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장로교 정치에 ‘민주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진리와 양심에 따라 성도 각 개인에 참여권과 저항권이 동시에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교 정치는 성도들이 교회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임직자 선출시 투표권, 의결권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또한 교회나 장로들이 진리의 내용과 달리 교회를 운영할 때는 양심의 자유로서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되시나요?


그러므로 칼빈과 개혁주의자들이 언급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화정치, 귀족정치, 그리고 민주정치의 혼합 정치 제도로서 장로교 정치는 매우 성경적인 내용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 역시 무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도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종교개혁 이후 세속 사상들이 교회 안에 침범해 들어오면서 교회 정치 개념이 사회적, 정치적 시각에서 이해되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교회의 타락과 부패와 맞물려 교회 정치에 대한 이해 자체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사실입니다. 님께서 지적하신 교회 정치에 대한 몇 가지 부정적인 사례는 그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요. 저도 지난 두 주에 걸쳐 교회 정치 부분을 성도님들과 함께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개혁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 교회 정치 사상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고 지킨다면, 결코 오늘날과 같은 교회 타락과 부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인 동시에 새로운 자각과 반성의 계기가 되는 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교회 정치는 개혁자들이 예배와 더불어 늘 교회 개혁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개혁해야 하는 내용으로 보았던만큼, 진리의 터로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교회 정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성령이 떠난 다음에는 아무리 좋은 교회 정치로도 교회를 건지지 못한다. 그리고 교회 정치가 나쁘면 비록 정통 직원들이 있다고 하여도 교회의 타락을 막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귀 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못다한 말씀은 ‘제2차 공개강좌’(교회론)의 교회개론(8-2) 내용 가운데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으므로, 꼭 참조해 보시라는 말씀을 전해 드리면서 답을 맺겠습니다. 





27문.  말씀사경회 요한복음 3:1-16절에 관한 답변  


<uk_choi>님의 질문 

목사님께..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듣는 중에 한 가지 질문이 생겨서 드립니다.


말씀 마지막 부분에 민수기의 불뱀사건을 말씀을 하시는 부분부터를 들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가는 중에 놋뱀을 쳐다본즉 살아나듯 오늘도 죽어가는 영혼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상태이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태”로 말씀하시는데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존재가 아닌지요? 전적타락에서 말하는 죽었던 우리의 존재와 목사님이 말씀하신 “죽어가는 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제가 잘못 이해하여서 질문을 드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uk_choi 님, 자주 뵙게 되네요^^ 


설교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적타락의 교리에서 본다면, 사람은 이미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자'인 동시에 여전히 죄성 가운데 '죽어가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으로서 거듭남(중생)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와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거듭남이라는 명제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대화 말미에 놋뱀 사건을 예로 드시는 이유는,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죄 값으로 심판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다름 아닌 니고데모와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유대 민족의 지도자라고 생각하여 마치 모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을 니고데모를 향해, "너는 광야에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즉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놋뱀 사건을 환기시키시고자 하는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은 지금 예수님께 찾아 온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가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는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나 인간적인 반성을 촉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고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라는 요구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니고데모에게 놋뱀 사건은 자신의 근본적인 죄성을 인정하고, 참된 회개에 이를 것을 핑계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통하여 설득하는 것입니다. 본질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이미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산 사람은 죄의 결과로 인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 3장의 니고데모는 이런 사람들의 성품과 속성을 대표하는 모델로서 예시되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 "죽어가는 또는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라는 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염두하시면서, 설교 전체의 강조점과 맥락을 잘 이해하신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추가질문>

바쁘신중에도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는 가운데서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줄 압니다. 특히 이 본문의 내용은 목사님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짓복음, 예를 들면 알미니안주의도 들어간다고 봅니다. 이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인간은 죄에 물려 죽어가는 존재이기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신 말씀을 인간의 편에서 보기에 인간은 죽지 않았고 죽어가는 존재이므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 것으로 인식하기에..... 

제가 드린 질문이 바로 이런 이유이기에 드린 것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구원을 인간의 주권과 선택의 결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알미안적 해석이라고 지적하기 전에, 이미 이 본문 자체에 대한 몰이해이며, 구원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적 발상입니다. 니고데모를 통해 참된 구원의 근원이 누구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명백하게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요 3:16은 보편구원론자들이 늘상 자신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요 3:16은 구원의 참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불신앙을 지적하시는 결론으로 제시된 말씀입니다. 즉 만약 요 3:16을 알미니안들처럼 하나님은 구원을 제시하시지만, 그것을 택할 수 있는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다는 식의 해석은 앞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나누신 대화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나,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내 뜻대로 성경을 보려는 무지와 교만의 결과에서 비롯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 3:16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문맥에서 제시된 말씀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교의 요점 중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이처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계획되고 성취되는 일임을 아는 것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요구하시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반(半)알미니안적 정서를 가지신 분들 중에 하나님의 칭의만 강조하고, 성도의 성화라는 국면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행한다는 개념 자체를 인간의 행위로만 규정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에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참된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칭의와 성화가 모순되지 않듯이 믿음과 순종은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 안에는 믿음과 순종이 함께 요구되며, 나타나야 합니다. 참된 구원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도를 아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신뢰하며, 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정당하신 요구가 삶 속에서 합당한 열매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선택적 사안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즉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는 자로서 구원의 자태를 드러내야 하는 열매의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두 차례의 말씀 사경회의 설교가 이 부분에 보다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신다면 보다 큰 은혜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주안에서 승리하시길 바라며... 





28문.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관한 답변 


【캘거리 교민】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쓰신 칼럼 중 "말로만 위기"라는 내용이 있으신데, 실제 제 생각에는 위기라고 말하는 쪽은 대형 교회나 기존 보수 교회들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변방에서 나오는 소리들 뿐인 것 같습니다. 캘거리를 예를 들어봐도 큰 몇몇 교회에서 그 교회 장로나 목사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경우는 전혀 없으니까 말이죠. 몇몇 신도 혹은 교회 밖에서 그런 말이 나오거나, 일부 작은 규모의 교회들에서만 말할 뿐이죠..

 

그래서  제 생각엔 문제가 많은데도 문제 의식을 전혀 갖지 못하는 기존 교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뭔가 그런 조치나 대책은 없으신지요?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주신 메일 잘 받았습니다. 

칼럼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교회가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은 비단 저의 생각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진리 편에 서 있는 이 시대의 모든 경건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 교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혹자는 교회 밖에서 혹은 불신자들이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성도를 보고 위기라고 하니까 위기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럼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교회 밖에서 교회를 진단하는 것은 명백하게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교회를 향해 위기라고 할 때에는 교회의 본질과 관련된 지적이 아니라, 일반적인 시대 정신과 상식에 의존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관이나 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지 않은 분은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겠습니다만, 여하튼 교회의 교회됨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세상 밖의 인식과 판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성경)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한국 교회나 이민 교회 할 것 없이)들이 교회의 교회됨의 본질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들을 하나님과 믿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하고 있으니, 일반인들로부터 질시와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가 맞고 있는 진정한 위기는 교회의 상황이 이처럼 참담한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그것을 위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영적) 무의식과 무감각에 기초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존재해야 할 진짜 이유인 교회의 교회됨의 자태를 드러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교회됨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진술된 복음의 실체를 진실하고 정직하게 증거하는 일입니다. 증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내용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요 사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정확하게 지적한다면 목회자들)이 성경과 복음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진리로 정밀하게 드러내는 일보다, 성경과 복음을 종교적 수단화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의 교회됨을 추구하는 교회와 성도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참된 믿음은 입으로 "주여"를 찾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말씀 전하는 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과 권능을 행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세상과 사람을 놀라게 하고, 교회의 외형과 규모를 확장하고, 세상의 복을 빌어주고, 세상과 더불어 잘 사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 편에서 볼 때, 이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또한 이보다 경망스럽고 심각한 죄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런 일들을 추구하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김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이곳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문제 의식을 갖지 않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직접 상황을 관찰해 보지 않은 저로서는, 김 선생님의 지적처럼 실제로 이 곳 교회와 성도들이 그러한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영적 상황을 위기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는 실증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칼럼에서 이러한 현상을 교회 몰락의 전조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현대 교회가 처한 위기로 인해 교회의 본질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의 참 정신을 드러내지 않는 교회와 성도의 종국은, 설령 스스로 성공적이라고 위안 삼을지라도, 위에 언급한 예수님의 지적같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는 교회이나 거짓된 교회를 향한 주님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반면 말씀의 빛을 따라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에 열심을 가진 교회와 성도는 그 형태와 모양이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교회와 성도에게는 위기와 몰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직과 진실로서 교회의 교회됨의 자태를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교회의 성공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조치와 대책을 물으셨는데요. 정답은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의 본질, 즉 교회의 교회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로써 성경 그대로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복음에 기초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이 교회의 진실(교회의 참된 회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교회와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들을 위한 명분 쌓기에 골몰한다면 교회는 지속적인 위기를 맞을 것이며, 결국 몰락의 길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관건은 말씀대로 교회의 진실이 회복되는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다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혹시 좋은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면 양해를 구하고요. 더 궁금하신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셔도 괜찮고요, (가끔이라도) 저희 연구회 카페를 방문하셔서 글들을 대하시다 보면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을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늘 교민을 위해 수고하시는 일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9문.  이분설, 삼분설에 대한 답변  


【항복하다】님의 질문

개혁신앙이 추구하는 바는 이분설(영혼+육체)라고 들었습니다. 추구하는 이유와 삼분설에 대한 비판을 알고 싶어요.


다시 답변드립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혹은 본질이 이분적인가, 삼분적인가 하는 논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논의(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분설은 일반적으로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고, 삼분설은 말 그대로 인간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저는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이분설을 받아들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이분설은 통상적으로 초대 교회 시대부터 현재까지 성경적이고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일관되게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터툴리안과 아타나시우스와 어거스틴과 같은 정통 교부들이 이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특히 어거스틴에 의해 주도된 콘스탄티노플 대회(the Concil of Constantinople, A.D. 381)에서는 삼분설에 기초하여 가현설을 주장하던 아폴리나리우스의 입장을 반박하고서 이분설을 정통 교회의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확정하였습니다. 이분설을 강조하는 라틴(서방) 교회 교부들의 영향을 받은 중세 교회 역시 이 견해를 신봉하였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위시하여 거의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이분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4장 2항, 32장 1항)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해나 강조점에 따라서 신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 본성에 관한 하나의 통일된 관점으로서 이분설을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유물론과 관념론의 등장으로 이분설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었지만, 진리의 편에 서 있던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분설을 더욱 확고하게 주창하였습니다. 메이천, 바빙크, 핫지, 벌콥, 머레이 박사등 우리가 잘 아는 개혁신학자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이분설을 인간 본성에 관한 명백한 이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분설은 정통 교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보편적이고 일관되게 강조되어 오던 견해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분설을 지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분설은 성경이 지지하는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독특한 요소 또는 본질은 육과 영혼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부터 작정된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17)은 사람은 물질적인 요소인 몸과 비물질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은 몸과 영혼이라는 이분법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가지 요소가 절대적인 구별이나 대립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육과 영혼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 혹은 복합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본성을 전혀 다른 두 개의 주체로 나누지 않습니다. 육과 영혼은 통일적인 구조 속에서 인간의 전인적인 특성을 드러내 줍니다. 다시 말해, 완전한 구원은 몸이나 영혼 중의 어느 한 가지 요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삼분설주의자들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경에서 영과 혼을 구별하여 사용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은 각기 달리 존재하는 실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음에서 오는 오해입니다. 성경은 ‘몸과 영혼’이라고 할 때도 있지만, ‘몸과 영’ 혹은 ‘몸과 혼’을 따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유롭게 언급되는 이 두 가지 표현은 언제나 상호 교호적인 연관성을 갖습니다. 즉 성경은 영과 혼을 구별된 실체로 보지 않고, 동일한 실체인데 두 가지 상이한 명칭들로 언급할 뿐입니다. 때로는 영과 혼과 같은 의미로 생명, 목숨, 마음, 심령 등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몸과 구별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몸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 않은 전인격적 단일체로서의 인간 본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에는 이를 증명하는 수없이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관점을 반영한 조직신학 서적 한 권만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여기서는 일일이 소개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이분설은 성경적인 이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인데, 그럼에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것도 자신들의 입장을 더 성경적이라고 강조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분들에게 당혹감과 의문을 자아나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삼분설이 가장 대표적인 주장인데요, 그렇다면 삼분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점을 잘 이해한다면 님의 궁금증도 해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분설은 이분설과 달리 인간은 몸과 혼과 영이라는 각각 다른 성격의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봅니다. 이분설과 마찬가지로 이 견해의 연원 역시 초대 교회 교부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삼분설을 강력하게 지지한 이들은 대부분 헬라(동방) 지역의 교부들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이레니우스가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라틴(서방) 교부들이 이분설을 주장하였던 것과 달리 삼분설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당시 헬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을 육, 혼, 영의 3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헬라(동방) 교부들의 삼분설은 헬라 철학 사상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물론 삼분설주의자들 간에도 약간의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혼과 영을 구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공통된 주장을 합니다. 혼은 사람이나 동물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의 혼은 동물의 혼보다는 월등하지만, 사람의 영에 비해서는 열등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존재론적 차이가 나는 것은 혼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은 죽을 때 혼과 몸이 다 없어지지만, 사람은 몸과 혼은 함께 죽지만 영은 불멸한다고 봅니다. 이런 삼분설적 개념을 수용하여 아폴리네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몸과 혼이 죽는 완전한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정통 교회로부터 정죄를 받았지만, 역사의 수면 아래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가늘게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세기에 독일과 영국의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논의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이후 삼분설은 어느덧 이분설과 함께 교회의 신학적 이슈로 취급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오늘날의 몇 몇 교단들(오순절파 순복음,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일부)은 이 견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삼분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삼분설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분명히 문자적으로 몸과 혼과 영을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으니, 삼분설을 성경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삼분설주의자들이 삼분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자주, 대표적으로 인용하는 세 구절이 있습니다. 살전 5:23과 히 4:12과 고전 2:14이하입니다. 하지만 이 분들의 해석을 보면 궁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본문을 가지고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삼분설주의자들은 살전 5:23에서 언급된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세 가지 요소가 개별적인 존재로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소개하기 위한 교리상의 진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성도들이 추구해야 전인적인 성화(거룩과 보전)를 위한 당부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영과 혼은 구별된 개체가 아니라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만약 삼분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영과 혼을 서로 다른 실체로 보아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눅 10:27)이나 또 성경에서 영과 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마음, 정신, 뜻, 심령, 양심 등등의 표현마저도 모두 서로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뜻일텐데, 그렇다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분설, 삼분설이 아니라 다분설(多分說)이라고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은 같은 개념을 반복적으로 그 의미를 강화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하듯이, 영과 혼도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 히 4:12에서 삼분설주의자들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삼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플러머(Plummer)의 해석처럼, ‘관절과 골수’는 우리 육체 구조의 신비로운 부분들을 의미하는 반면, 혼과 영은 우리의 영적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삼분설주의 입장처럼 혼과 영을 구별된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면, 이어서 언급되는 관절과 골수, 그리고 마음의 생각과 뜻도 완전히 상이한 형태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말하는 관절과 골수는 신체 일부를 특화해서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언급된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관절과 골수만 있습니까? 또 관절과 골수를 분리해서 설명한다한들 본절에서 어떤 유용한 의미를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관절과 골수는 사람의 신체, 즉 물질적인 요소를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또한 생각과 뜻은 어떻습니까? 두 가지를 완벽하게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답은 영과 혼은 관절과 골수에 대별하여 인간을 구성하는 비물질적 요소를 언급하고 있는 동일한 의미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씀드린다면, 이분설은 정통 교회 역사가 증거하고 성경이 자증하는 진리입니다. 인간 구성에 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해 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견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설을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마치면서 노파심이 들어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분설이 성령 진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해석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 사실을 근거로 이분설이 아닌 다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신앙과 양심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분설이나 삼분설을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참되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우리에게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 진리를 알아가는 일에는 늘 진실과 겸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와 관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얼마나 엄밀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가 하는 관심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이런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더욱 생생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과정이 되리라 확신한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면서 답변을 끝맺겠습니다. 





30문.  교단별 (예정론적 관점에서의) 구원론에 관한 답변 


<uk_chol> 님의 질문

목사님께..

남은 한 해도 영육간에 강건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질문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예정) - 장로교

인간의 선택 (예지예정) - 감리교. 성결교.

신인협동설 - 천주교

침례교, 구세군, 순복음교단들은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위처럼 간단히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샬롬^^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구원론에 있어서 현재의 개신교 안에 있는 교단(파)들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예정론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한 구원과 신인협동론적 구원이 그것입니다. 사실 예정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교단은 없습니다. 예로 드신 모든 개신교 교단들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천주교)도 예정을 말하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예정론에 대해 첨예한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예정론 인정 여부 보다는 예정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과 어거스틴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16, 7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이어지는 예정론은 장로교회 신학의 독특성으로 자리잡혀 있습니다. 장로교적 개혁주의 신학의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이 누구인가하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로교의 구원론이 다른 교단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기도 하는데, 장로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알미니안의 견해를 반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택자’만을 위해 고려된 것이라는 17세기 초의 화란의 도르트 총회(1618) 결정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총회는 예정론과 관련하여 역사상 가장 첨예한 논의가 진행되었던 교회 회의였습니다. 이 총회는 알미니안주의가 제시한 항론적 성격의 5대 교리(자유의지, 조건적 선택, 보편 구속, 거부할 있는 은총, 은혜로부터의 타락)를 비성경적인 주장으로 정죄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개혁된 장로교회의 구원론으로 확립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정론적 관점에서 구현된 구원론은 정통 유럽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며, 나아가 스코틀랜드 총회(1638)와 웨스트민스터 총회(1647)를 통해 정통 장로교회의 보편적 구원관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 문서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도르트 회의에서 확정된 내용으로서의 예정론은 타 교단와 구별되는 장로교회의 신학적 차별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 19세기에 들어서 이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파급으로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점차 확산되어 가는 중에, 마침내 20세기에 와서 장로교회 안에서 선교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예정론을 포기하거나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1903년에 미국연합장로교회(PCUSA)는 정통 장로교회의 예정론에 반하는 내용으로 웨스트민스터를 수정하고, 몇 년 후에 알미니안적 성향이 강한 컴벌랜드 장로교회와 통합을 하게 됩니다(1906). 이로써 미국 주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정신으로부터 멀어져 감과 함께 만인구원론을 제창하는 여타의 교단들과 손을 맞잡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초기 한국 장로교회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초기 한국 장로교회가 독노회를 개최하며(190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정신을 담고 있는 12신조를 받아들이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초교파적인 연합 성격의 선교 정책과 신학적 미성숙함으로 인해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을 유지, 계승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철저하게 미국 장로교회의 실패의 전철을 따르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교단은 오직 정통 장로교회뿐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반어거스틴 전통의 반펠라기안의 신인협력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감리교는 은혜와 관련하여 인간의 의지와 반응을 중요시하는 알미니안의 입장에서 정리된 웨슬리의 신학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웨슬리는 1784년 감리회 종교강령이라는 이름으로 신학 교리를 발표하였는데, 많은 부분에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유산을 따릅니다만, 유독 구원론에 관해서는 감리교 교리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성공회 39조에서 칼빈의 예정론 부분을 삭제하였습니다. 또한 성결교회는 19세기 후기에 미국 감리교회의 신앙부흥 운동 과정에서 태생한만큼 전통적 감리교 교리를 수용합니다. 성결교의 시작과 더불어 발생한 교회가 오순절주의 교회입니다. 교리보다는 은사 중심의 체험을 강조하여 세워진 오순절 교회는 구원론에서 철저하게 반칼빈주의 노선을 추구하였습니다. 한국의 순복음 교회는 언급할 필요도 없지요. 19세기 중반에 조직된 구세군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와 구령사업에 초점을 맞춘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졌던만큼 알미니안적 교리를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침례교의 경우는 구원론의 스펙트럼이 조금 다양합니다.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17세기 영국교회의 분리주의 청교도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신앙의 독립과 자유를 기치로 내 걸은 침례교회 안에는 18세기 이후부터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교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알미니안적 침례교회가 일반적인 양태로 자리잡게 됩니다만, 개중에는 정통 칼빈주의를 고수하는 침례교회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보편 교회는 신학적으로 매우 혼합된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러한 시도들이 반칼빈주의적 관점(신인협동설, 알미니안주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로교회 간판을 내 걸고, 장로교회 목사라고 해서 당연히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을 만날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며 착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인 신앙 고백에 충실한 장로교회와 장로교회 성도들이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 현실에서 이런 교회와 성도들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교단과 교회가 곧 그 사람(성도)의 신앙을 대변하는 구실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로, 어느 교단과 교파 혹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로 신앙을 판단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아무튼 질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답변이었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본 카페 코너 중에 1차 세미나(개혁신앙)에 올려진 내용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외에도 본 질문과 관련된 좋은 글들이 카페에 많이 올려져 있습니다. 검색란을 활용하셔서 자료를 찾아보세요. 많은 도움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31문.  큐티 (QT)에 대한 답변 


【uk_choi】 님 질문

한가지 궁금한것이 있습니다.

제목에 쓴 글대로 큐티에 관해서 알고 싶습니다. 

언제, 누가, 왜,..그리고 이 큐티가 우리 개혁주의 사상과는 문제가 없는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큐티가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관상기도처럼 어떤 심리적이나 초월명상의 한 형태가 아닌가해서 질문을 드립니다. 주변에 이 큐티를 한다고 모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듣기도 해서 말입니다.


답변드립니다. 


님의 질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오늘날 교회(한국 교회뿐 아니라 이민 교회에서도)내에서 성경을 묵상하는 좋은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는 QT(말씀 묵상)에 관해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자체를 두고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난 교회 역사를 통해 통찰해 보더라도 성경 읽기와 성경 묵상은 정통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지켜 온 가장 오래되고 가치 있는 전통일 뿐만 아니라, 성경 또한 경건과 거룩을 추구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취해야 하는 자세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 읽기와 성경 묵상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논의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님의 지적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QT가 성경 읽기와 묵상에 관한 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성경적이고 교회사적인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저 역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QT의 정형화된 방식 - 즉 매일 매일 일정량의 성경 본문을 정해 놓고 읽는 과정 속에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나 음성’을 찾고 들으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식 -은 성경의 진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곡해하는 결과로 이끄는 매우 위험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말씀 묵상의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는 QT가 지닌 몇 가지 내재적 위험성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오늘날 QT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혁자들과 신실한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본의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흔히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고 불리우는 이 정신에 관해 칼빈 선생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 정신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오직 성경으로부터 유출되는 뜻과 의미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에 헛된 상상이나 호기심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를 지양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데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거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도 않는데 그 범위를 넘어서려는 어떠한 의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QT는 성경 본문을 대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더라도 아무런 제재, 경고, 대책을 제시할만한 성경적, 신학적 안전장치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습는 것이 태반입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오늘날 유행하는 QT의 내용과 방법론을 만들어 시중에 공급하는 이들조차도 ‘오직 성경 사상’의 엄밀한 성경 이해의 기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QT 자료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빈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기만해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QT는 '전체 성경'(Tota Scriptura)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QT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한된 분량의 성경 구절을 통해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 관련된 제한된 적용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성경 전반에 걸쳐 조망되어야 할 전체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결국 자신의 형편과 이해와 수준에서 내용을 단정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몇몇 구절을 가지고서 성경 전체를 아는 양 우쭐거릴 수도 있습니다. 부분별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이러한 활동은 언제나 전체 성경 안에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찾는 이라면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합하는 부분적 내용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 속에서 의미적 모순이나 갈등 없이 일관되게 전달되고 있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QT를 보면, 전체 성경 사상보다는 부분 성경 사상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QT를 하는 사람 중에는 성경 자체 혹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자신에게(특히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말씀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여 그 말씀만을 신주 받들듯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성과 내재성 사이에 간격을 벌인 신정통주의, 그중에서도 바르트 신학이 끼친 치명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경험에 따라 가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오직 전체 성경 안에서만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셋째, 오늘날 QT는 신령주의와 주관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성과 객관성은 올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권위입니다. 성경이 정말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성경은 한낱 이방 종교의 경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혁자들과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근거로 한 성경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늘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 역사적 신앙고백(신조와 교리문답)입니다. 성경 내용의 일관성과 확실성 그리고 계대성을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데에 이보다 더 좋은 신앙적 유산은 없습니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역사적 개혁신학으로 공인된 신앙고백서들의 내용과 체계를 통해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성경대로 묵상하고, 성경에 따라 살도록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의 내용과 체계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성경의 내용과 체계를 바르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에, 각자의 독특한 정황에 따른 상이한 해석과 깨달음을 추구하기 보다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고백한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진술과 기준에 따라 통합적인 차원에서의 성경 이해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QT는 이러한 개혁교회의 성경 이해 방식과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근래에는 무분별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 운동, 그리고 심리학적 관상신학 등의 영향으로 점점 더 성경을 주관과 내면을 만족 혹은 고양시키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도를 마치 신탁을 찾기 위해서나,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한 명상으로 설명하고, 경건이라는 말은 영성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사용되는 용어보다도 오늘날 QT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방법론입니다. 대개의 경우, QT는 실행하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성령의 내적인 조명하심에 따라 성경의 본의를 깨달아가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설정한 목적이나 기대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려 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정보와 결과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 QT를 통한 궁극적인 관심이 자아 만족과 현세적 성공이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QT 자료집 안에 교묘하게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심리학적 해설과 예화 등이 이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위에 언급한대로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 사상에 따라 바르게 시행되는 성경 읽기나 묵상이 아니라면, 오히려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역사를 따르는 잘못된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QT 혹은 바른 말씀 묵상이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경험에 비추어 실제적으로 적용 가능한 답변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늘 염두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책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고, 분별하고, 고백하기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일은 우리 자신의 지혜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바르게 깨닫고,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일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먼저 자신의 뜻과 요구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며 동시에 성령의 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케 하셨으므로, 성경의 참 뜻을 찾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일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교만과 자랑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더욱 겸손한 태도로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이고, 깨달은 말씀에 대해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역사적 신앙고백서와 병행하여 성경 읽기와 묵상에 임하기를 권면드립니다. 앞서 주지한 바대로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에 관한 한, 신앙고백서의 중요성과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 진리를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담고 있는 기준 자이고, 틀입니다. 개혁교회에서 고백하는 모든 신앙고백서들의 고백과 문답들은 모두 성경 구절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한 일종의 가장 좋은 해설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를 면밀하게 공부하다 보면, 신학적 통찰력은 물론 성경해석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과 적용적 근거를 갖게 됩니다. 성경을 옳게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말씀에 충실한 모든 개혁교회들이 성도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데 있어서 성경과 더불어 신앙고백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활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설교나 성경 공부 내용으로 읽기와 묵상하기를 권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 방편은 언제나 말씀 선포(설교)을 통해 실현됩니다. 특히 성경 묵상하는 일이 낯설거나 스스로 성경 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분이라면 금주에 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을 음미하면서 더 깊은 묵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상당히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이때에는 설교를 전한 목사의 내용이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묵상 역시 성경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옳게 전달한 설교라면, 그 내용을 근거로 묵상을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청교도 시대의 성도들은 이같은 성경 묵상 방식에 매우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목사로부터 들은 설교 내용을 가지고서 묵상하며, 그 가운데 더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설교 뿐만 아니라 좋은 성경 공부도 성경 읽기와 묵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무런 원리나 기준없이 무턱대고 하는 것보다 들었던 설교와 성경 공부 내용을 의지하여 한다면,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넷째, 기본적인 신학 지식과 성경 언어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성도가 신학교 강단 위의 신학교수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각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갈수록 신학의 중요성에 관해 강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일반 성도가 신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금기시하기까지 하는 풍조입니다. 하지만 신학은 특정인을 위한 전유물이 아닙니다. 신학은 모든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곧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일반 성도라고 할지라도 신학을 이해하고, 성경 언어를 배우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일반 성도들의 말씀 이해 수준과 능력이 성장해 간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장성해 간다는 증표이며, 교회의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인간적으로 잘 대우해 준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베뢰아 성도들을 더 신사답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전한 말일지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할 줄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에 간절히 요청되는 교인은 목사의 말에 무조건 맹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의 진위를 따질 줄 알며 나아가 그 말씀으로 성경을 더 묵상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수준의 성도가 되려면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른 신학과 성경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금상첨화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 정도에서 마칩니다. 


모두에게 유익한 답변이 되기를 바라며...





32문.  한국 장로교회 미래에 관한 답변 


<jhpae02>님의 질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343934


목사님... 위 기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겠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장로교회의 미래에 대해서요.


어떤 생각에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구나 쉽게 지나칠만한 신문 기사 내용을 가지고서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를 고민하실 정도라면, 한국 교회에 대해 특심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분이라 생각되어 짧게나마 저의 생각을 전해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하신 목사님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에 나온 이 분의 이력을 보니 대단한 분 같군요. 예장통합 총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이하 KNCC로 표기) 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이하 한기총으로 표기) 대표회장 등의 두루 경험하신 분이니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직함을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만, 여전히 목회자들 간에도 자리(권세)와 서열(능력)의 문화를 중시하는 한국 교회의 정서를 감안할 때, 이만한 직함과 경험이라면 어디에서도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사적이고 단편적인 신문 인터뷰 기사인데다, 신년을 맞아 덕담을 나누듯 한 화자의 말에다가 기자가 자신의 생각을 주석 달듯이 해 놓은 글이라 이 내용을 가지고 화자의 생각을 속 깊게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기사에 대한 저의 생각을 궁금해 하시고, 저 역시 여러 상념들이 스치는지라 생각이 가는대로 몇 자 적지요. 


1. 기독교적 희망에 대해서...

저는 박 목사께서 강조하시는 ‘희망’이라는 신년 키워드와 세상의 다른 종교나 신앙이나 심지어 무종교인들이 바라는 ‘희망’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분의 말씀처럼 세계 경제가 위태롭습니다. ‘총체적 위기’라는 말이 살을 에는 추위만큼 실감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고 서로 위로하며 이 위기를 극복해 가야 한다는 교훈(?)에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저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희망’적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희망’이란 것이 과연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소원하는 이런 ‘희망’일까요? 이 분은 성도가 가져야 할 희망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이 시대를 ‘난국’(亂國)으로 설정하고서, 이 난국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뜻 들어보면 그럴듯한 표현이지만, 이런 논리 전개는 특정한 사실에 대한 일반화의 오류와 논리의 비약입니다. 성경은 경제적 위기와 같은 현상을 두고 난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난국이라면 그것은 진리와 관련하여 전반적인 양상을 나타나는 교회와 성도의 영적 타락과 부패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어려움과 위기를 만나면 자연스레 종교와 신을 찾습니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난관이다 싶으면 초월적인 힘이나 능력을 빌어서라도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보다 더 종교적인 모양새를 갖춥니다. 그런 때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절과 같은 종교 기관을 찾고, 기도나 수행을 함으로 위안을 얻으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염려하지 말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곧 빛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만, 이것이 과연 교회에서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던져야 할 희망의 메시지인가 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좀 아시는 분은 예레미야 시대의 교회 상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역시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재앙과 파멸의 징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본다면, 오늘 우리 시대가 맞고 있는 위기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현상들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예레미야와 다른 편에 서 있던 일단의 선지자들이 늘 강조한 내용이 바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더 나은 ‘평안과 행복과 번영’을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터뷰 하신 목사님이 예레미야 시대의 이런 부류의 선지자들과 동일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적 희망의 본질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희망이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공유하거나 바라는 소망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기독교적 희망을 말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귀를 막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희망이란 그들의 본성에 거스르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세상에는 위기가 존재하지 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사는 시대와 사람은 언제가 가장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위기라면 진정한 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와 성도는 세상 현실의 어려움을 빙자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요구할만한 세상을 위한, 세상에 의한, 세상의 희망을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그런 중에도 오직 유일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해 진실로 알려 하지 않으며, 신뢰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는 타락한 본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각성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2. 한국 교회에 대한 진단에 대하여...

박 목사께서는 인터뷰를 통해 지난 2년 동안 사회로부터 혹독한 질책과 비난을 받은 한국 교회를 두고서 교만과 독선이 원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3대 고질병을 개교회주의, 공명주의, 물질주의라고 꼬집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 교회가 힘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통전적으로 결합할 때, 사회가 교회를 더 이상 얍잡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평가와 진단이 딱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금은 피상적인 지적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정도의 분석은 오래전부터 교회 밖으로부터 듣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 같아선 교회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관심은 한국 교회에 대해 어떤 진단을 내리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여러 가지 고언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누구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연코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당면한 숱한 문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목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 해에 수백명이나 배출되는 목사들 모두가 성경(말씀)대로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섬겼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비난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사들은 한국 교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을 때마다, 일반 성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박 목사께서 그러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박 목사께서 지적하신 한국 교회의 병폐상을 생각할 때, 이것은 일반 성도들이 아니라 목사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모든 목사들이 스스로 교회의 선생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위 한국형 대형교회와 그런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에 끼친 좋지 못한 영향과 파급력을 생각할 때, 교회와 사회 앞에 석고대죄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큰 덩치와 막강한 파워를 이용하여 비성경적이고 불건전한 신학 이론과 검증되지 않은 성경 프로그램을 양산하며, 보급하고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할 때마다 마치 면죄부를 받은 자처럼 태연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 목사께서 한국 교회의 문제와 고질병으로 지적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은 그동안 한국 대형교회들이 보여왔고, 지금도 그들에 의해 변함없이 행해지고 있는 병폐 중의 병폐입니다. 한국 교회를 개교회주의, 공명주의, 물질주의로 이끈 장본인들이 누구입니까? 그런데 제게는 박 목사의 지적은 어쩐지 제 똥 구린 줄 모른 소리 같아 씁쓸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박 목사께서는 그동안 한국 교회을 향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유독 J 순복음 교회나 J 목사에 대해서는 약한 모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장로교 목사임에도 신앙과 고백이 전혀 다른 교회 강단에서 말씀하신 지적의 원흉으로 불리울만한 교회와 목사를 향해 축복과 번영을 빌어주는 말씀만 하고 계시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아서 혼란스러울 따름입니다.  


박 목사의 진심을 알 수 없으나, 화살 시위를 자신과 그리고 늘 행보를 함께 하는 대형 교회를 향해 먼저 겨누심이 마땅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와 대형 교회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드리길 원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대형 교회와 대형 목사(?)의 힘의 논리 때문에 주눅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박 목사께서는 한국 교회의 약화가 힘의 분산에서 온 것이어서, 다시 사회가 교회를 얕잡아보지 못하도록 힘을 기르자고 하시니, 어떤 힘을 말씀하시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힘이 분산되었거나, 부족해서 사회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는 것까요?  오히려 힘을 너무 과신했거나 몹쓸 힘만 기르는 데 온통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리를 세우고 밝히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어깨에 힘을 주고, 세상을 휘어잡을 목적으로 기르는 힘은 근원적으로 복음으로 나타나는 능력과 다른 것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참상의 원인은 말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진정 복음의 능력이 아닌, 다른 힘에 깃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말씀(진리)의 엄밀함과 진실함에 대한 무관심과 무반응이 팽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들이 져야 할 것이고, 특히 대형교회와 목회자들이 각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를 향해 내 놓는 어떤 고언도 누워서 침 뱉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3. 한국 교회의 일치와 연합과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에 관하여...

이 부분은 박 목사의 인터뷰 내용에 직접 언급된 내용은 아닙니다만, 그동안 박 목사께서 걸어오신 신앙 행보를 염두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라 생각되어 몇 말씀 드립니다. 전언한대로 저는 박 목사를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분께서 앞서 언급한 ‘트리플 크라운’을 역임하던 때에, 가장 역점을 두어 이끌었던 교회 사업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일명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라는 단체는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총사령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체는 현재 구세군, 감리교, 성공회, 복음 교회, 하나님의 성회, 장로교, 정교회를 대표하는 8개의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한국지부에 해당합니다. 설립 정신과 취지와 목적에 있어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추구하는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세계교회협의회와 KNCC에 의해 주도되는 연합일치운동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교회 화합과 일치를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신학과 전통과 해석이 다른 교회들끼리 연대 혹은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 제도를 모색하는가 하면, 실제적으로 하나의 기독교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사도적 전통과 개혁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신학과 교회를 독선적, 비타협적 신앙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드러내어 놓고 타 종교(가톨릭이나 불교)에까지 선심과 제휴의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과 농도 짙은 밀회를 나누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단체의 수뇌부들이 스스로 개신교 목사라는 신앙적 정체성을 갖고는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또한 최근 들어 이 단체는 보수계 교회들의 연합체로 알려진 한기총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외연을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한기총은 형식상으로는 보수 신학을 지향하는 한국 교회의 연합체로서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단체에 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60여개의 교단들의 면모를 보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작금에 와서는 회원 교단들의 연합과 일치에만 관심을 가질 뿐, 더 이상 교단의 신학적 독특성과 진리에 대한 이해나 신앙고백의 일치를 위한 논의에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지향점에서 무차별적 포용주의를 표방하는 KNCC와 차이점을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박 목사 개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학과 교리의 관점을 염두한다면, 두 단체는 물과 기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상호간에 신학과 교리를 포기하면 모를까, 내용적으로 깊은 교류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현실은 어떻습니까? 박 목사께서는 두 단체를 대표하는 회장을 역임하였고, 또 그 일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목사가 정치가가 아니고, 교회 정치가 세상 정치와 다른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트리플 크라운' 운운하며 자랑으로 삼으니... 교회 연합과 일치라는 명분아래 신학과 교리를 내팽개치고 신학적 무차별주의와 포용주의로 나아가는 한국 교회의 실상은 자랑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뜯으며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혼돈의 중심에 한국 장로교회가 있습니다. 신학적 정체성을 상실한 장로교회와 목회자들이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 연합과 일치를 이루자’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이끌려 진리의 길에서 탈선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처럼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강단과 신학교를 좌지우지한다면,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이 아니기에 그리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어느 시대든 진리의 편에 서기보다 세상과 사람 편에 서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에 의해 보편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비록 시대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며 운동력이 있어 그 말씀에 참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모으시며, 그들로 하여금 참되고 바른 교회와 신앙을 열망하게 하시니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교회의 미래는 언제나 밝고 희망찹니다. 세찬 시대의 탁류를 거슬러 오직 진리 가운데 담대하고 튼튼하게 서 있는 교회와 신학과 신앙을 함께 세워가십시다. 이것이 성도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드리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p.s 참고로, 공교롭게도 한창 진행중인 말라기 강해를 통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과 관련된 주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그중에서도 말라기 강해(5),(6)를 유념해서 들어보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33문. 교회 연합 운동에 관한 답변 



<강원식> 님의 질문

목사님의 글에 평신도로서 공감을 하고 성원을 보내드립니다. 

우리교단에서 치러지는 행사에 참여해 보면 어느 모임에 가든지 형제님이 주장하는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의 표어와 박윤선목사님의 개혁의 기치와 바른 목회철학은 우리를 감동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각 지교회를 돌아보면 각 교회 담임 목사님의 목회방향에 따라 신학은 살아있는데 신앙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되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늘 아쉬움으로 하나님께 애원하고 신학교를 위해 교계의 지도자를 위해 우리교단의 영향력있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목사님의 제안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을 잘 모르는 평신도라 무지한 부분은 용서를 구하고 몇가지 의문과 대안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교단 연합회에 우리교단이 이번에 처음 가입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이전 총회장님들도 참여하여 활동을 하시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활동은 체면치레여서 문제가 안되는데 임원을 맡은 것이 문제인가요? 저로서는 이 부분이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둘째 위의 사실이 맞는다면 총회장에게 공개 서안을 보내는 것은 총회장 개인의 잘 못을 크게 문제 삼는 느낌이 들어 한번더 고려해 보심이 좋을 듯 하구요. 

   

교회는 옳고 그름 이전에 덕을 세우는 것이 먼저라고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심사숙고하고 어려우셨겠지만 홈피에 올리기 전 총회장님께나 총회 어르신들께 한번 쯤 상의를 드려 보셨는지요? 


목사님의 글이 교계의 어른 들에게는 경종이 될수도 있겠고 저희들 처럼 무지한 성도들을 깨울 수도 있겠으나 많은 보편의 진리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에게는 총회장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교계에 어떤 분란이 있나 혼란을 가져 올수도 있을 듯합니다. 


저의 작은 소망은 총회란 이런 교단의 문제들을 토의하고 해결하기 위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 정리하셔서 총회를 이용하심이 어떨런지요. 


물론 토를 다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지난해 장로회 네개 교단의 연합은 목사님의 취지에 부합되는지 그리고 그전 장신과의 통합은 신학의 일치를 본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재론 되어야 되는 것인지 평신도로서 궁금하기만 합니다. 


목사님 많이 배우고 깨달았는데 무례한 요구를 드리지 않았나 생각되어 양해를 구합니다. 목사님께는 죄송합니다.

 


강원식 성도님께... 


먼저 세 가지 면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첫째, 부족한 자의 글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공감과 성원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둘째, 합신 교단을 향해 깊은 애정과 고뇌를 함께 가져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셋째, 일반 성도로서 쉽지 않을 일임에도 실명 공개와 더불어 겸손과 배려의 어조로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해서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조만간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 사려되어, 각설하고 문의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합신의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교단 연합회 활동이 처음이 아니라는 의견에 관하여. 

현재 한국에는 교회 연합과 일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기관이나 단체가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한국 교회의 연합일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라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그리고 이 두 단체의 단일화를 목표로 설립된 교단장협의회를 들 수 있습니다. 한편 한국 장로교(단)의 실제적 통합을 목표로 교회연합일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기관으로 한국장로교연합회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단이 언제부터 교회 연합과 일치라는 목적 아래 이러한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아마 교단 사무실에 문의하거나 총회록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교단의 대외적인 활동 사항을 눈여겨 볼 때, 교단적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초교파적 교회연합일치 운동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특히 지난 몇 해 동안 합신의 총회장 출신 목사님들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 교단적으로 교회연합일치 운동에 매우 우호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총회장님들의 활동은 문제가 안 되는데 임원을 맡은 것은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짐작컨대, 이 질문은 제가 이번에 총회장 목사님께서 교단장협의회 상임회장단에 선출된 것을 지적한 것을 두고 하시는 물음인 것 같습니다. 편지에서 밝혔듯이 저는 교단 연합 활동 자체를 전면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신앙과 가치가 공존하는 한국 사회의 상황을 고려할 때, 어떤 사회 현상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연합된 의견이나 주장이 필요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교회의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금의 교단간 연합 운동의 성격이 성경적인 교회 연합을 도모하는 방식이 아니라, 힘과 규모의 논리에 따라 외형적인 일치만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연합일치 운동은 진리와 비진리, 혹은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단간의 신학적 정체성을 담은 교리나 신앙고백의 독특성과 차이를 무시합니다. 에큐메니칼 신학의 입장에서 교회 연합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은 보수적 성경관과 (특정)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자세를 한국 교회의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보수 교단에 속한 이들도 이들의 주장에 묵묵부답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일치를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교리나 신앙고백에서 벗어나 종교적 타협과 관용을 발휘할 것을 주문합니다. 


제가 교단장협의회라는 단체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드린바대로, 이 단체는 한기총과 KNCC의 단일화를 추진하기 위해 한국 교회의 교단들을 총망라한 교단의 총회장, 총무, 자문위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사도적 신앙전통과 복음적인 고백신앙을 공유하고 있다”고 천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각 교단의 신학적, 성경적, 교리적 이해와 해석의 차이를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통 기독교의 관점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본질적인 내용들에 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교단과 교파의 단일화를 교회의 지상 과제와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에큐메니칼 신학이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험성과 파괴력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교단장협의회나 그 외의 연합단체들이 이런 에큐메니칼적 성향의 논의와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나 임원을 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회장 신분으로 이런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나, 임원을 맡아 그러한 사업을 주도해 가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3. 총회장 목사님 개인의 잘못을 크게 문제 삼는 느낌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편지에서 언급하였던 바처럼,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총회장 목사님의 개인 신상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분의 인격이나 삶에 관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목사님께서 우리 교단의 총회장이 아니시라면, 굳이 이 목사님께 편지를 드릴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합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순전하게 따르고자 하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우리 교단(총회)을 대표하는 총회장님의 교회 연합과 일치에 관한 최근의 행보에 대해 진정어린 물음과 염려를 전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오해없으시기를 바랍니다. 


4. 홈피에 올리기 전 총회장님께나 총회 어르신들께 한 번쯤 상의를 드릴 수 없었냐는 지적에 대해서. 

전들 왜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누군들 부담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젊은 목사가 감히 총회장님께...”라며 불편한 심기를 보이실 분들도 있을 거라는 것을 왜 생각지 않았겠습니까? 엄연히 총회와 노회에 속해 있는 일개 목사로서 이런 일로 인해 원치 않은 오해나 비난이나 구설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제가 실명으로 공개 서한이라는 방식으로 글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사안의 막중함과 위급함 때문입니다. 공개 서한이라는 방식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혐오감을 갖고 계실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중요한 것은 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실 여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며, 그로써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본질적이고도 중대한 신앙적 과업을 보다 정직하고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해 함께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5. 성도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 

성도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 교단에서 목회자들의 가르침에 일관성이 없을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다른 말로 인해 오는 혼란보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혼란이며, 비극입니다. 바른 진리를 아는 일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아닙니다. 성도님께서는 자신을 신학을 잘 모르는 무지한 평신도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겸손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정말로 그리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은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목회자나 일반 성도나 혼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바르게 분별하는 일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바른 신학을 연마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요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공부의 필요성과 중요성>이라는 설교 중의 일부 표현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신학지식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수적인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학공부를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학공부를 매일 일과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하며, 일과의 어떤 작은 부분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학지식을 쌓아 가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소명 가운데 아주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6. 총회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라는 권면에 대하여.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일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때에 모든 문제를 다 다룰 수 없다는 사실도 진실입니다. 향후라도 총회에서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관해 매우 구체적인 논의와 대책이 있기를 고대합니다. 그래서 총회에 속한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올바른 지침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에도 총회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는 사안을 개인적으로 언급하는 것에 불편을 느끼실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덧붙이고자 합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 입장이 다를지라도, 진리 안에서 논의될 개연성이 충분한 내용이라면, 좀 더 신중하되,  열린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이 신학적 지향점 중의 하나의 모델로 삼는 유럽 개혁교회에는 ‘폴레믹스’(비평 혹은 논쟁)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지면을 통해 공개적인 양식으로 진행되는데, 어떤 이의 (신학적, 교리적) 주장이나 입장에 대해 공식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그것이 다르게 생각되면 또다른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논의는 특히 신학자와 신학자 사이에서,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서 격의 없는 그러나 진솔한 문답의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진정한 "폴레믹스’는 배려와 아량과 평화를 상실하여 오직 상대방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한 익명의 비난과는 격이 다릅니다. 진리에 관한 자신의 논리를 정연하게 말하고, 바르게 설득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와 성도는 더욱 분별있고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부디 저의 글을 개인이나 단체를 향해 던지는 비수로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제 글의 내용 중에 근거 없는 주장이나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언제라도 지적해 주시면, 숙고의 과정을 거쳐 "폴레믹스" 정신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님의 요구는 전혀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용서를 구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매우 정당한 물음이고 고민입니다. 답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34문.  올드 프린스턴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네요.^^

다름이 아니라 구프린스턴 신학교에 대해서 입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 개혁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통나무대학(log college), 구프린스턴 신학교에 대한 질문이 있어 드립니다. 

많은 미국 신학교 홈페이지에 가보면 현재 실제로 따르든, 명목상으로든 구프린스턴 신학교의 전통을 따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예로는 웨민, 비블리컬, 그린빌 퓨리탄리폼드 등등..


신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당시의 프린스턴의 모습을 좀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 책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학생의 일기라든지 아니면 당시 저널이나 학교이야기를 엮는 책은 없을까요? 

원서도 괜찮습니다. 언제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박찬양형제-



형제님. 오랜만입니다. 신학교 입학 준비는 착실하게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과 귀한 소명을 품고 있느니만큼, 계획된 모든 일이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일전에 공지해드린대로 Q&A 코너는 3월말까지 잠정 중단된 상태입니다. 주석 작업이 완료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고요. 다만 지금은 간단하게나마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지요. 


엄밀하게 따진다면, 구 프린스톤 신학(The Old Princeton Theology) 시대는 우리가 아는대로 1812년에 미국 북장로교회(PCUSA)에서 교단 목회장 양성 직영 신학교로 프린스톤 신 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한 이후로 1929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침투와 신학적 좌경화 현상에 반대한 그레샴 메이쳔(G. Machen)과 몇몇 동료 신학자들에 의해 정통 개혁신학 계승을 목적으로 인근도시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운 시점까지를 가리킵니다. 메이쳔이후 구프린스톤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통해 명맥을 유지되었습니다만, 현재의 프린스톤 신학은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정통신학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한때 정통 장로교 신학의 요람이었던 프린스톤 신학교는 지금은 정통 장로교 신학에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물론 프린스톤 대학과 더불어 명성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프린스톤에서 공부한 목회자는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메이쳔 이후 프린스톤 신학교는 순수한 정통 장로교 신학을 포기하고,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의 메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점을 잘 유의해야 합니다. 


구 프린스톤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신학과 관련된 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이를 테면, 이 신학의 선조(Predecessors)격인 윌리암 테넌트(William Tennent), 윌리암 테넌트(William Tennent, Jr),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과 이 신학의 전성기를 이끈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챨스 핫지(Charles Hodge), 아키발드 A. 핫지(A. A. Hodge), 벤자민 B. 워필드(B. B. Warfield)과 그리고 이 신학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게할더스(Geerhardus Vos), 그레샴 메이천(Gresham Machen), 코텔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존 머레이(John Murray) 등을 통해 신학적 흐름과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분들의 개별 저서들에 관해서는 인터넷을 이용하여 충분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프린스톤 신학을 전체적으로 평가한 몇 권의 책과 논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W. Andrew Hoffecker, Piety and the Princeton Theologians (Presbyterian and Reformed) 

Mark A. Noll, The Princeton Theology 1812 – 1921 (Grand Rapids: Baker Academic)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서울 엠마오 1992(위의 책 번역서) 

데이빗 웰스, 찰스 핫지 「프린스톤 신학」 서울 엠마오 1992 

조지 마스든. 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생명의 말씀사 1997 

김길성 저, 구 프린스톤 신학 전통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신학지남 1993년 여름호(통권 제236호) 

김기홍 저, 프린스톤과 근본주의 신학, 한국교회사학회, 1987 





35문.  개혁주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개혁주의 삼위일체에 대해여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세요. 


위에 두 분께서 좋은 설명과 권면을 주셨습니다. 감사하고요. 중요한 물음이어서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몇 자 적습니다. 칼빈주의 3대 학자 중 한 분인 헤르만 바빙는 삼위일체 신앙을 가리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기독교를 구별하는 표요,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의 영광이요, 위로"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을 역설해 줍니다. 달리 말해서, 삼위일체 신앙이라는 토대 없이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를 통해 정통 교회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인 동시에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리 앞에 선 교회와 성도라면 누구나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이해할 뿐더러 후대에 잘 계승해야 할 책임이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에 비해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렵다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학을 전공한 분들도 삼위일체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신학도 모르고, 신앙심도 없는 이라면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최대의 허구적 공작품 정도로 여길만합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교회 역사상 삼위일체 교리는 가장 많은 논란과 공격과 수모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 역사 속에 배태한 이단과 사이비성 주장들 대부분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거나 왜곡하는 기본 형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삼위일체 교리야 말로 기독교 분열의 씨앗이라며 맹독성 비판을 퍼붓곤 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과 제가 삼위일체에 관한 바빙크의 고백을 존중하며,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에 언급된 구절들을 진실로 믿고 고백하는 입장이라면, 어떻게 삼위일체를 이해하여야 하겠는가?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관심있는 물음이 됩니다. 


흔히 삼위일체를 믿지만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기 때문에 너무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전 존재 혹은 실체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닫도록 요구하시는 당신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신비'이니까 덮어놓고 '믿자'는 식의 태도는 진리의 궁극을 깨달아가는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라는 물음이 나옵니다. 일종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론에 관한 궁금증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 쉽게 간과해서 결국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반드시 요구되는 전제와 조건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최첨단 과학이라도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오내하면 하나님에 관한 적확한 지식은 오직 성경을 전제로 한 계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우주의 근원이나 인간의 근원과 목적과 같은 근원적인 지식에 도달하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창세기 1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창조 역사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학(이성)은 늘 실체의 근원에 다가갈수록 또 다른 의문과 무지를 노출하는 성격으로 남게 됩니다. 이러한 과학의 실패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동기와 출발점 자체가 성경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삼위일체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 즉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실제의 지식의 독특성과 엄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바른 성경 이해의 산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삼위일체라는 낱말뿐 아니라, 관련된 갖가지 용어와 표현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 유추되고,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칼빈은 우리에게 삼위일체와 같은 하나님에 관한 실체적 지식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슴 밖에서 어떤 것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즉 성경 각 구절 속에 언급된 내용은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갈등이나 모순됨없이 완성된 의미(개념)로 드러나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이해는 성경에 대한 이런 태도로부터 시작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과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고 혼란이 가중되게 됩니다. 


또 유념해 두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학과 사색의 대상이 된다고할지라도, 그 분의 계시는 절대적인 '명령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하신는 방식에 관한 공식적인 선포입니다. 사람의 인식의 한계와 능력과 상관없이 믿고 의지해야할 대상으로서 요구된 내용이지, 우리의 합리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하거나 간과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씀드리자면, 삼위일체는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과 수용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선명하게 종합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선물과 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삼위일체를 성경의 진술을 따라,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삼위일체는 단순한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소망과 기쁨과 확신을 주는 원천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즉 개혁자들과 같이 오직 성경과 전체 성경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삼위일체의 한 분(일체성)과 삼위(구별성)에 관한 다양한 물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분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구조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은 좀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는 것을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한에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시고요. 정통 신학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잘 정리하고 있는 책들이 많은만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지나치기 아쉬워 몇 말씀 드린 것인데, 쉽게 설명해 달라는 님의 뜻에 반하는 답변이 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드네요. 아무튼 이 부분에 관해서는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Q&A 를 통해 (공식)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한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36문.  [본문스크랩] 설교 내용 중 궁금한 점들 


궁금한 점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 몰라서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1. '복지는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가 하는 일이다.

교회의 목적은 복지에 있지  않다. 교회 내에서 복지활동 하자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럴 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니다 싶은 생각도 들어서

목사님과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글을 올립니다.

교리적인면에서 아는 게 없다보니 항상 혼돈이 옵니다.


2.욥기 2장 10절에서 욥이 아내에게 어리석은 자 같이 말한다고 했습니다.

근데 이 부분이 다분히 남성적인 시각이라고 말씀하네요

여성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더라구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

설명 좀 해주세요


마지막입니다. 질문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3. 남녀 이성관계에 있어서 손도 잡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단 손을 잡게 되면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봉쇄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이지만, 너무 비약을 한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많은 질문  올려서 죄송합니다.

여기 카페에 와서 정리해 놓은 신 자료들을 보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풀리지 않은 것들이 하나씩  풀어져 가는 듯 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 설교에 대해 궁금하시는 줄 알고 부리나케 열어보았더니, 다른 내용이었군요 ㅎㅎ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 

1. 첫번째 질문... 들으신 설교 중, 한 부분을 인용 혹은 요약해서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이 부분만으로도 딱히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관점에 따라 맞는 이야기도, 틀린 이야기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어떤 본문을, 어떤 맥락에서, 어떤 강조점을 두고 한 말인가에 따라 이해가 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교의 핵심이 '교회의 존재 이유와 본질적 사명과 관련하여 복지는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면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교회는 복지에 대해 무관심해야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복지라는 말을 꺼내지도 말라'는 식의 강조라면 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2. 두번째 질문... 욥이 아내에게 한 표현을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한 발언이 아닌가 하셨는데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관점이 어긋나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몇몇 구절을 들어서 남성 중심 혹은 여성 중심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성경에 대한 편애적 혹은 편협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님의 지적대로 본다면, 성경에는 여성 말고도 남성, 장애인, 사회적 적 약자가 불편하게 여길만한 표현들이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들이 정말 그들로 하여금 사회적 차별과 인격적 모멸감을 줄 목적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성경을 더이상 만고불변의 진리라 말할 수 없겠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은 부분으로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어지는데 있어서 진리성과 합목적성과 불변성에 아무런 모순과 갈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경은 그 자체로 진리로서의 완전성과 타당성과 명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을 세상적인 인식의 잣대로 평가하다면 오히려 성경의 참된 본의를 놓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3. 세번째 질문... 남녀 이성 교제에 관해 질문하셨는데요. 말씀하신 내용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논리의 비약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극단적인 관계(즉, 해서는 안 될 행위로까지) 발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손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이성 교제를 하지 않는 것이 선이다라는 결론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말 혹은 주장이 담고 있는 함의와 교훈이 무엇인지를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그릇된 이성 교제에 대해 염려하는 목소리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의 이성 교제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또 성경적이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하는 젊은 기독인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37문. 이단 다락방에 대한 답변 


<부정의 힘>님의 질문

목사님 평안하셨는지요~^^ 이 카페에 회원수가 늘어나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 큰 행복을 느끼는 게 됩니다. 

궁금한 점은 이단 다락방에 대해서 또 류광수에 대해서 인데요... 

(네이버검색은 진짜 안하는 게 낫다는 거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들어보긴 많이 들어봤는데 이 집단에 무슨 사상이 어떻게 위험한 걸까요?? 


답변 드립니다. 


류광수 씨의 <다락방 전도 운동>에 대해 들으니, 전에 겪었던 가슴 아픈 추억들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십 년도 넘은 일입니다만 경기도 평촌의 어느 작은 (장로) 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였을 때, 류광수씨의 다락방 전도 운동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지요. 제 기억으로는 그 당시가 다락방 전도 운동이 최절정에 달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류광수씨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능력있고 유명한 전도 집회 강사로 대접받았고,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교회에서는 그에게 강단을 내어주었고, 기독교 신문마다 그의 전도 집회 광고가 실리지 않은 곳이 없었더랬지요. 뿐만 아니라, 당시에 정말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가 인도하는 다락방 전도 집회(부산의 동산 교회라는 곳이 아지트였지요)에 참석하였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신앙 안에서 좋은 교제를 나누던 지인들도 그 집회에 참석한 후로, 자연스럽게 관계가 단절되었는데요. 그중에는 참 순수하고 열정 많은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합니다. 


아무튼 당시에는 저도 신학적 분별이 별로 없던 때라,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그 운동과 관계된 교회와 사람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로 거의 듣지 못하다가 오늘 다시 그 운동에 대해 듣게 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가 다소 질문과 동떨어진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와 무관한 거짓된 신학과 신앙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가 하는 것을 잠깐이나마 여러분과 나누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은 류광수씨의 <다락방 전도 운동>의 실체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다행히 이 운동에 대해 보다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신학적 분석물들이 나오게 됨에 따라 구태여 사견을 언급할 필요성이 없어졌습니다. 하여, 개인적인 의견을 전달하는 것보다 신학적으로 신뢰할만한 분들에 의해 작성된 연구 자료를 소개해 드리는 것이 피차 간에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아래는 저희 교단의 공식 이단 전문 연구 기관인 '한국 기독교이단 상담소'(http://www.jesus114.org/gnuboard4) 사이트에 게재된 '류광수와 다락방 전도 운동' 관련 자료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jesus114.org/gnuboard4/bbs/search.php?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4%D9%B6%F4%B9%E6&sop=and&gr_id=&onetable=bbs02_05


감사합니다.




38문. 알미니우스와 도르트 공회에 관한 답변 


<로우에나>님의 질문


세가지 정도 질문입니다.


1. 알미니우스 살아생전에 그 누구도 알미니우스와의 구원론 논쟁에서 개혁주의의 예정론을 옹호하는데 있어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사용하는 것에 실패하였으며, 항상 성경적인 토론에서 그는 승리했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예정론자중에는 칼빈 같은 분이 없어나요? 이론적으로는 웨슬리안이 칼빈주의를 항상 이긴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더군요...


2. 도르트 공회에서 13명의 알미니안 대표자들은 국가반역죄가 주어져 발언권과 선거권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도르트 공의회에서 알미니안들은 만장일치로 이단으로 정죄됩니다. 발언권과 선거권을 주어 제대로 된 토론을 거쳐야 공의회가 권위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발언권과 선거권이 제약된 회의가 과연 그 정당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지요? 아무리 그들이 국가반역죄에 있다해도 신학적 이론토론은 허용했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3.현재 예정론자들과 웨슬리론 신학자들 사이의 토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이젠 이런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해서 하지 않는 가요? 하도 이단들이 많아서 그런가?^^


답변드립니다. 


님은 첫 번째 질문에서 알미니우스가 활동하던 당시, 구원론 논쟁에서 알미니우스가 항상 승리하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개혁주의 예정론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알미니우스에 필적할만한 개혁주의자가 없었는가 하는 것과 이론적으로는 웨슬리안이 칼빈주의를 항상 이긴다는 주장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알미니안이나 웨슬리안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는 분들의 견해를 전해 들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해 주신 내용은 단순한 신학적 입장 차이로 이해해서는 안 될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사적인 명백한 증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알미니우스가 한창 활동하던 당시, 화란(네델란드)은 정치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큰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화란은 1546년 에스파니아(구 스페인)로부터 자주 독립을 선언하며,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란의 독립 전쟁은 1609년에 있었던 양국 간의 휴전 이후에도 무려 8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기 바로 전에 화란 교회는 신학적 논쟁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문제의 발단은 야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라이덴 대학(오렌지공 윌리엄이 1575년에 세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개혁주의 대학교였음)의 신학 교수로 봉직중이던 알미니우스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예정론’ 사상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적 ‘타락전 선택설’에 대해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알미니우스의 스승은 제네바에서 칼빈의 ‘타락전 예정설’을 구체화한 개혁주의 신학자 베자(Beza)인데다, 라이덴 대학에서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 준 선임 교수는 벨직 신앙고백의 개정작업에도 참여한바 있는 유니우스(Fracnis Junius)였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탓이었던지 알미니우스가 라이덴 대학의 신학 교수로 부임되어 갈 때만해도, 사람들은 그를 전도유망한 칼빈주의 신학자로 생각하였고, 그에게 그 대학의 신학적 정통성을 확고하게 계승해 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화란 교회 안에서 일부 칼빈의 가르침에 의혹을 품고 있던 사람들과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예정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바치안 카스텔리오(Sebatian Castellio)와 더크 쿠른헤르트(D.V. zoon Koornhreert)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반칼빈주의자인데요, 특히 후자는 화란 개혁교가 고백하고 있는 ‘예정론’ 사상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암스테르담의 유지들은 젊은 신학자 알미니우스에게 이 문제에 대해 개혁주의 입장에서 반박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알미니우스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을 얻게 됩니다. 알미니우스는 개혁주의 관점에서 예정론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상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두둔하는 논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알미니우스의 입장은 전혀 낯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쓴 논문, 『예정론의 순서와 형태에 관한 윌리암 퍼킨스의 논문에 대한 고찰』(1602)에서 퍼킨스의 견해에 대해 비(非) 칼비주의적인 접근 방식으로 비평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이 논문에서 전통적인 예정론 사상과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알미니우스는 신학적 커밍아웃을 한 셈이 되었고, 화란 교회 내에서는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신학 논쟁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미니우스의 신학적 관점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사람이 그 유명한 프란시스 고마루스(F. Gomarus)입니다. 알미니우스에게 최대의 적수가 되었던 그는 정통 개혁주의자로서 알미니우스의 동료 교수이면서, 그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마루스는 처음에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알미니우스의 견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반개혁주의적 신학 사상은 이미 화란과 영국의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었고, 그때마다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비판 받은 선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정부에게 교회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결국에는 그의 요구가 거절되었습니다만 알미니우스 사후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항변서를 작성하여 정부에 요구할 정도로 그의 주장은 삽시간에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화란 교회가 받아들인 벨직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신조의 개정을 요구하면서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에 따라 항변서의 내용을 5가지로 요약하여 천명하였습니다. 도르트 회의(1618)가 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개혁교회 신조의 근간을 이루는 ‘칼빈주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 OF CALVINISM), 일명 영어 표현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튤립 교리’(Tulip Doctrines)라고 불리는 내용이 도르트 회의의 결과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③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Urresistible Grace), ⑤성도의 견인(Perseverence of Saints) 교리입니다.


그런데 알미니안들의 항변에 대항하여 개혁주의자들이 도르트 회의를 통해 이러한 역사적인 개혁주의적 신앙 고백을 만들어내기까지 가장 큰 공헌이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고마루스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도르트 회의가 고마루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마루스는 칼빈과 베자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는 철저한 타락전 예정론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고마루스와 그의 제자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도르트 회의는 ‘타락후 선택설’ 입장에서 예정론을 정리하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타락후 선택설 입장에서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다소 혼합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알미니우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그의 신학 사상의 실체, 즉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삼는 선택론(예지예정론)을 정확하게 밝혀냈다는 점에서 고마루스의 노력과 공로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마루스와 미니우스 사이에 좀 더 깊고 첨예한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1609년, 알미니우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오래지 않은 논쟁이었지만,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 대항하여 정통 칼빈주의 사상을 매우 치밀하고 성경적인 태도로 변호하였고, 그로써 진리의 흐름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알미니우스는 알아도 고마루스는 모른다고 하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당시 개혁주의 권에는 고마루스와 필적할만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도르트 회의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 중에도(전부는 아니지만) 알미니우스와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정교하고 뛰어난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지닌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그들은 너무나도 낯선 혹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교회사의 뒤안 길에 묻힌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16, 17세기에 찬란하게 빛나던 종교개혁의 여명이 지금 우리에게는 희미한 불빛보다 못한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지적처럼, 오늘날 엄밀한 칼빈주의는 이 땅에서 날마다 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시대에 거짓된 가르침으로 정죄되었던 주장들이 우리 시대에는 교회의 보편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보더라도 역사적인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위기를 맞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확실히 앞으로도 엄밀한 개혁 신앙의 미래는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선 진리 앞에 바른 믿음의 신앙인들은 오직 진리로서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번영이며, 승리임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님은 도르트 공회에서 알미니안들이 만장일치로 이단으로 정죄된 결과를 들면서, 그 회의 과정에 나타난 권위와 형평성과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질문은 개혁주의의 ‘예정론’ 사상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반복해서 제기되는 물음입니다. 특히 예정론 사상에 불만을 가진 분들이 걸고 넘어지는 단골 이슈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의도가 있던간에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물음이라고 생각됩니다. 도르트 회의의 결과와 관련해서는 우선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이 그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도르트 회의는 화란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서 소집된 국가적 교회회의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회의가 갖는 순수한 의도와 결정 사항과 상관없이 이 회의와 관련하여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신의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세속 정부 관리들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리스(Maurice)와 올덴베르네 벨트(Jan van Oldenbaneveldt)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모리스는 화란 독립 전쟁의 아버지인 윌리엄 공의 아들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지지하는 최고 군사령관이었습니다. 올덴베르테는 모리스에 반대하여 지방 자체제를 요구한 주도면밀한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원래 두 사람은 화란의 립 운동을 함께 이끌었지만, 1609년 휴전 이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에 따라 관계가 원해졌습니다. 그런데 화란 정치의 중심 인물이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정지적 입지에 따라 각각 다른 교회를 지지하였습니다. 모리스는 개혁교회를, 올덴베르테는 알미니안들의 입장에 동조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알미니안과 개혁주의자들 간에 논쟁이 가열되었습니다. 급기야 모리스의 궁중 목사인 존 위텐보게르트(Uytenboagert)는 알미니안의 입장에서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반대하는 ‘항변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측을 지지하는 사람들 간에 논쟁이 감정적인 폭력시위로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올덴베르테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방 민병대를 소집하게 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모리스가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를 체포하게 됩니다. 


이런 정치적 소요와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도르트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 교회 회의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올덴베르트는 알미니안, 즉 항의파들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모리스는 그때 비로소 ‘예정이 파란색인지 초록색인지 자기는 몰랐지만’ 고마루스파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날 무렵, 항변파의 정치적인 정도자 올덴베르테는 반역 혐의로 모리스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미니안 신학을 대변한 그로티우스(Grotius)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0여명의 알미니안 목사들은 파면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들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모리스와 일당들이 외견상으로 개혁교회를 지지하였으며, 도르트 회의가 전반적으로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도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분명하지만, 개혁주의 교회와 신앙을 사수하려는 순수한 신앙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화란 정부 당국이 ‘참된 교회’를 옹호한다는 명분에서 시행했던 일임을 볼 때, 하나님께서 불신자인 세속 관리를 통해서도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르트 회의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회의 자체의 일방성과 편협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도르트 회의의 성격과 진행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그저 앞서 말씀드린 정치적 결과를 개혁주의자들의 소행 혹은 배후로 지목하려는 사람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교회 회의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란 개혁주의자들은 회의의 공정성을 보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 있는 교회 대표들을 초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엄밀한 칼빈주의 입장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교회는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618년 11우러 13일부터 1619년 5월 28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154번의 회의를 일반인들도 참관할 수 있도록 공개하였습니다. 


이 교회 회의가 소집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항변파의 견해를 신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 회의 주재자들은 항변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밝히도록 소환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초반부터 항변파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항변파 지지자들은 회의에 불성실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항론파의 대변인 격이었던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n Episcopius)를 통해 회의를 연기시키고, 대표들을 이간시키는 계략을 이용했습니다. 나중에는 한달 이상 회의에 불참하면서 회의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회의 의장인 요한네스 보겔만(Jojannes Bogerman)은 항변파들을 해임ㅇ하고 그들이 쓴 저서를 근거로 결정을 내릴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항변파들의 불성실과 회유와 방관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매우 엄격하고 진중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회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나 횟수나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역사상 이전에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엄밀하고 철저하게 논의된 회의가 없었다고 할만큼, 이 회의에서는 문장 하나, 그리고 단어 하나에 있어서까지 참된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드러내기 위한 치열한 경건과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국가적으로는 여러 가지 소란이 있었지만, 이 회의에 참석한 총대들은 정치적 고려나 인간적인 의도를 철저하게 배제하였습니다. 오직 교회를 보호하고 순결하게 하기 위해 최선의 바른 판단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연구하고 논의하였습니다. 


유명한 교회사학자 필립 샤프는 이 회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準) 세계교회의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르트 총회는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표준 문서들을 제정하긴 하였으나, 그 참석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중략) … 학식이나 경건함에서 사도시대 이후 어떠한 회의보다 뛰어났다” 


또한 화란의 사학자 캄펜기우스 비트랑게(Campegius Vitringa) 역시, “이처럼 많은 지식이 한 곳에 모인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트렌트 회의도 이렇지 못했다”라고 하며 도르트 회의 성격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확신컨데, 이토록 명백한 역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회의의 권위와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은 진리에 관해 무엇을 말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도르트 회의 역사를 바르게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이 몇 가지 단발적인 정황과 사건에 집착하여 이 회의의 성격과 결과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예정론 사상을 포함하여) 칼빈주의의 신학을 어떻게 해서라도 매우 과격하고 편협하고 몰염치한 종교적 독선주의로 치부하고픈 사람들의 불순한 의도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성경에 가장 충실한 교회와 성도들이 한결같이 도르트 회의와 그 외의 종교개혁적 신앙의 산물인 신앙고백서를 왜 그토록 소중한 교회의 유산과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며, 그내용을 계승하며, 그 내용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지를 말입니다. 주께서 님에게도 통찰과 안목의 은혜를 더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이 정도에서 정리하겠습니다.


님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속에서 어느 정도 답변을 얻으실 수 있으라 생각되어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기회에 웨슬리안의 신학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이 있을 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리 안에서 늘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39문.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나요'에 대한 답변 


with You(kdouglas) 님의 질문

카페가 활기가 있어 좋아 보입니다.^^

저는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구원론부터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고, 그 외 천주교가 성경에 벗어난 교리들을 시행하고 있고, 그래서 천주교를 이방 종교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천주교를 믿다가 개신교로 개종했는데, 목사님께서 천주교에서 세례받았으면 여기서는 다시 세례받을 필요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와 우리 개신교는 형제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로도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구원론도 다르고, 성경을 벗어난 교리들도 많은데, 올바른 세례교육을 다시 시키고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나중에 대답해 주실 때, 이단교파에서( 다락방이나 , JMS등 ) 받은 세례도 유효한지 같이 설명해 주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 드리겠습니다. 


흔히 통칭해서 성례(sacraments)라고 일컬어지는 세례와 성찬은 참된 말씀 선포와 정당한 권징(치리) 집행과 더불어 참된 교회를 구별하는 중요한 표지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 문서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 문답(167문답)은 성도는 이 성례를 증진시켜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 시대 이후의 모든 교회를 위해 친히 제정해 주신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에 관하여 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본의(本意)대로 생각하고, 시행해야 합니다. 


오늘 님께서는 성례 중의 세례에 관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님의 질문을 요약하자면, 개신교 입장에서 천주교나 기독교 이단에서 받은 세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정리한다면, 천주교나 이단의 세례를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물음이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정통 기독교와 다른 분파에 속했던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에, 그에게 다시 세례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일찍이 교회 역사를 보면, 성례에 관해 이와 다른 주장을 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도나티스투파와 종교 개혁 시대의 제세례파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재세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전의 세례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불경건하고 우상 숭배와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받은 세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에 관한 이들의 주장은 정통 교회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와 논쟁을 통해서, 그리고 칼빈과 개혁자들은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말씀으로 이들의 견해를 반박하였습니다. 특히 칼빈은 『기독교강요』(4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재세례를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칼빈과 개혁자들의 반론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서,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을 대신코자 합니다. 


첫째, 세례의 효력은 세례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힘을 받아 그 분의 은혜 어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주님의 사람이 되기로 약속하는 것을 표시하며 인치는 것’(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94문) 을 확인하는 일종의 표징입니다. 세례에서 사용되는 물은 깨끗함과 정결과 정화를 나태나는 상징적인 요소입니다(민 8:7; 18:20; 19:13; 시 51:7; 겔 36:25). 그런데 우리의 내적인 더러움은 자연적인 물로 씻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물세례와 더불어 성령 세례를 함께 언급합니다. 즉 물세례는 성령을 통하여 죄의 오염과 죄책으로 더러워진 영혼을 씻어내는 성령 세례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즉 물세례는 ‘중생의 씻음’(딛 3:5)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고전 6:11)을 나타내는 외적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례식에서 물을 사용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진정 깨끗케 하고, 거듭나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능력이 물 자체나 혹은 물로 행사하는 종교적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물을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 즉 물을 머리에 뿌리거나 물 속에 들어가거나 하는 것은 세례의 본질적인 성격을 놓치지 않는 이상, 구원의 본질적인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세례에 참여할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약속된 모든 영적 은택들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세례 행위 자체에서 나온 힘 때문이 아니라, 세례와 관련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례는 집례자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례를 집례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개혁교회는 사적 세례(개인적으로 베푸는 세례)나 그릇된 세례(세례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베풀어지는 세례)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례는 말씀 선포와 권징과 더불어 교회의 공적 성역(聖域)에 해당하기 때문에 세례는 이 성역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가르칠 의무를 지닌 목사(성직자)에 의해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세례 시행자를 ‘합법적으로 임직된 말씀의 사역자’로 국한시키고 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4절, 대요리문답 176문답).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세례의 효력이 세례 집례자에게 나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칼빈은 이르기를, “성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이 점에서 우리는 성례를 집례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의 본질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성례를 집례하는 사람을 편지 배달부로 비유합니다. 편지가 전해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필적과 서명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세례시에도 베푸는 사람이 누구이던간에 그 일로 우리 주의 필적과 인을 확인할 수 있는 예식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기독교 강요 4권 15장 16절). 이러한 비유은 보다 경건한 사람에 의해 시행되는 세례만이 유효하기 때문에 재세례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 오류인가를 잘 증명해주는 좋은 설명입니다. 첫번째 이유에서 설명드렸듯이 세례의 효력은 세례 행위 자체에서 나올 수 없듯이, 세례 집례자의 능력이나 공로에서 나오는 것역시 아닙니다. 


비록 세례를 베푼 사람이 세례에 의미를 잘 몰랐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불신앙을 가진 사람이 베푼 세례라고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혹은 다른 이름으로 베푼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으며, 세례에 첨가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증거하고서 베푼 세례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유효합니다. 세례의 외적 표징(형식)은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표징이 무시되거나 반박된다고 해서 세례에 담긴 하나님의 실상(언약, 약속) 자체는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로서 죄를 사하고 영으로 다시 살리시고, 그리스도께 접붙임 바 되도록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경에서 세례를 두 번 받으라고 권면한 적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세례와 같은 의미에서 시행된 예식이라면, 할례를 들 수 있습니다. 할례는 은혜의 상징으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요구된 율법적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은혜의 표상을 바르게 지키고 보존한 역사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할례는 종교적 관습 정도로 여겨질때도 있었고, 우상 숭배자들의 영향으로 미신적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음. 또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나 그릇된 제사장에 의해 시행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실 때에, 할례를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들이 받은 할례의 외적 증거가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에게 할례를 다시 받도록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세례를 주도적으로 베푼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세례를 베푸는 것을 매우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그 어디에도 사도들이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거듭해서 세례를 베풀거나 요구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사도들이 세례를 시행할 때에,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신앙 수준에 도달해 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세례 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경건하고 영적이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도 세례를 베푼 장본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이후에, 그는 더 큰 신앙적 회의와 근심 가운데 빠졌습니다. 


이렇듯 세례를 베푼 사람들은 늘 불완전하고 모순이 많은 존재였지만,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푼 그들의 세례를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세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에 의해 세례의 외적인 표징이 시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례와 관련된 모든 은혜의 은택들을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를 것입니다. 비록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베푼 세례라고 하더라도, 그 세례의 권위와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보증해 주시는 한, 그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세례로 여겨야 합니다. 


넷째, 불충분한 세례였을 경우, 진정한 회개와 함께 마음을 돌이키면 됩니다. 

혹자들은 세례 행위 자체를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카톨릭 교회나 정교회가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 교회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가 아닌 경우에는 그 어떤 세례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언급한 도나티스트파와 재세례파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세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갖는 가장 일반적인 정서는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혹은 다른 교회보다 거룩성과 경건성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에서 그들은 자신들은 구원의 정답을 알고 있는 채점관이고,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험생 식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단들도 근본적으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세례를 이해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비성경적인 발상입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에, 전적으로 성화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베푸신 세례에는 우리가 져야 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이 완전히 용서되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당연히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례 이후에 죄와 투쟁하며, 극복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성도의 노력이 가치없거나 무용한 것처럼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안에는 우리 안에 죄의 흔적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싸움 역시 우리의 힘과 지혜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최후 승리를 얻는 그 순간까지, 성령과 말씀에 더욱 의지하여 싸워나가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믿음과 정직과 확신으로 고백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받는 외적 세례를 결코 구원을 위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됨에 대한 자각과 기쁨과 감사를 고백하는 행위요, 그로써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기를 바라는 소원을 공포하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명료한 성경적 이해 없이 받은 세례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지이나 교만이나 거짓된 확신이나 무분별등 그 어떤 이유였든간에 과거에 행한 잘못된 신앙적 행위에 대해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그런데 진실함 회개와 회복은 오직 참된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실현됩니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늘 바른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또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례를 시행하기 이전에, 세례의 참된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세례 예식만을 염두한 일시적인 교육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말씀을 통해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에 관해 성경적으로 잘 풀이해 주어야 합니다. 이는 분명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항상 재교육의 기회가 될 것이며, 그리고 세례를 받을 사람에게는 세례를 준비하는 교육 기회가 될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과거에 잘못된 세례에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바른 깨달음을 주시므로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세례 행위와 상관없이 세례에 대한 언약과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분명한 증거라는 것을. 그리고 세례에 관련된 약속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신실하고 공의로우시며,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유지되며, 성취된다는 것을...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40문. 천주교 세례에 관한 답변 


어느 회원님의 질문

이 책은 장로교단에서는 대부분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 알수도 있습니다. 

“What is presbyterian law"(J. Aspinwall, Hodge) “교회정치문답조례” p.79

144 문】다른 교파의 교회의 세례를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느냐? 

"어느 교파든지 예수의 교회로 인정 할 수 있으면 혹 그 목사는 인정 할 수 없어도, 그 교회의 세례는 합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유니테리언(Unitarian) 교회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도리를 부인하는 무리는 예수 교회로 인정치 아니하므로 그 세례를 부인한다." 


그리고 p.788

"로마교회의 세례는 당회가 제각기 합당하다고 여기면 그대로 인정하거나 다시 세례를 베풀 수도 있다(Ibid., )" 하였습니다. 


질문: 

1. 천주교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는 문제 

위의 책을 보면 천주교의 세례문제에서 해석하기를 당회의 목사가 천주교에서의 세례를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세례를 인정 할수도 있고 안할 수 있다고 보는데...즉 법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로이드죤스 목사님은 "사탄의 가장 제일가는 걸작품이 천주교"라고 했는데 과연 거기서 받은 세례가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2. 모든 이단교회(사이비교회-김기동,이초석,이재록....)가 베푸는 세례와 알미니안교파(감리교, 성결교..)에서 베푸는 세례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정통개혁주의에서는 이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봅니다.


이미 앞서 답변 드린 내용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지만, 좀 더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있어서 보충 답변드립니다. 


1. 천주교에서의 세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용하신 로마 가톨릭에 관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평가를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로마 가톨릭이 성경 진리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종교인가를 설명하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을 기독교 이단 범주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개신교내에서도 많이 이견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이단 논쟁에 대해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Heresies: Heresy and Orthodoxy in the History of the Church)라는 저명한 책을 쓴 Harold. O.J. Brown의 설명이 매우 유익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Harold는 로마 가톨릭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주장합니다. 양자는 고대적 교리(예를 들어, 니케아와 칼케톤 회의 같은 종교 회의에서 작성된) 기준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완전한 이단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와 공유될 수 없는 독특한 차이점들이 존재합니다. 개신교 입장에서 볼 때, 로마 카톨릭의 신앙 형태는 이단적 범주로 묶을만한 소지의 내용들이 다분합니다. 그런데 Harold는 이러한 차이를 양잔 간의 기독교적 기준 안에 있는 근본 구조상의 이단성이 아니라, 영향적인 면에 있어서의 이단성이라고 말합니다. 즉 로마 가톨릭은 믿음의 근본적인 내용에 있어서 개신교와 많은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내용들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상당한 변질과 왜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선포하지만, 화체설을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실지로 종교 개혁 당시에는 종래에 기독교 안에서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그들이 정통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너무나 정통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종교개혁을 시도한 일은 비록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역사적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칼빈을 위시한 많은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단적 경향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적그리스도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칼빈과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 자체를 완전한 이단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패와 타락으로 점철된 로마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택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회를 부패한 교회의 전형으로 확신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개혁자들이 세우고자 하는 교회가 이 세상에 유일한 완전한 교회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교회적 순결성과 거룩성을 추구하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 사명이라는데 추호의 의심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상에서는 부패가 전혀 없는 완전한 교회란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졌습니다. 즉 지상의 교회 안에는 언제든지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들이 최후의 심판 날까지 공존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로마 교회의 잘못된 성례를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교회에서 시행한 세례 자체를 전혀 무익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지하고 사악한 사제에 의해 시행된 세례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세례의 효력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패한 로마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받은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장된 약속의 실체들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앞서 있었던 답변에서 말씀드린대로 세례의 효력은 세례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세례는 구원의 직접적인 조건이나 원인도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세례와 관련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 중에서,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거나 구원을 못받는다든가(롬4:11; 행10:2,4,22,31,45,47), 또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중생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행8:13,23) 세례 의식에 은혜와 구원이 불가분하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28장 5절)라는 내용은 이러한 세례의 본질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세례 의식은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오직 한 번만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다’라고 못박고 있습니다(28장 7절). 


그러나 장로교단이라고 할지라도 이 부분에 대해 약간의 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J. Aspinwall Hodge 박사가 초안한 『교회정치문답조례』(What is presbyterian law?)에서는 “어느 교파든지 예수의 교회로 인정할 수 있으면 혹은 그 목사는 인정할 수 없어도, 그 교회의 세례는 합당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진술하는 동시에 “로마 교회의 세례는 당회가 제각기 합당하다고 여기면 그대로 인정하거나 다시 세례를 베풀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다소 모순된 내용처럼 들립니다. 저는 후자의 내용은 저자가 선교적 혹은 상황적 관점을 고려하여 사족을 붙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엄밀성 면에서『교회정치문답조례』는 모법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비해 덜 개혁된 성격이 잔존하는 형태의 문서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문서에 적힌 후자의 내용을 전혀 인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천주교회라고 해도 동일한 교회가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회 중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복음적인 성격을 담지하고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전반적으로 미신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진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개종을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세례에 대해 당회적으로 고민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회가 신앙 고백과 신앙 양심으로 충분한 검토와 협의를 거쳐 재세례를 판단한 것이라면, 그러한 결정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받은 세례라고 하여 무조건 경시하고, 재세례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에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혁교회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2. 이단 교회의 세례와 알미니안교파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알미니안 교파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에 관해서는 위 설명으로 충분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단 교회에서 시행하는 세례입니다. 우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이단 교회에 관해 간단한 정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단 교회라 함은 정통 기독교가 강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신학과 교리 체계에 관해 명백하게 그릇되고 다른 주장을 하는 기독교적 이단 집단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있어서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과 완전히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질문하신 ‘유니테리언’(Unitarian)을 비롯하여 ‘영지주의’, ‘아리우스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사벨리우스주의‘, ’단성론주의‘, '소시니안주의’, ‘반삼위일체주의’,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전형적 이단 교회들은 기독교와 상관없는 이단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형태적으로는 기독교 사상을 주장하는 것 같으나, 실제적으로 반기독교적 단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삼위일체적 신앙고백도 없는 최악의 변형된 형태의 신학과 저질스런 신앙 구조 속에서 어떤 교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형태로 시행하는 세례는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례에는 세례의 표징과 실체에 대한 성경적 함의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세례를 다시 베풀 수 있습니다. 수세자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재세례가 아니라 첫 번째 세례가 되는 것이겠지요.  




41문. 신학 관련 학위에 관한 답변 


로우에나】님 질문

뭐 별 중요한 것은 아닌데^^ 

제가 비신학도라 좀 궁금해서 그럽니다.ㅎㅎㅎ

신학을 전공했는데 학위는 신학박사가 아니고 왜 철학박사를 주나요?

조직신학, 신약학, 구약학 교수님들이 대부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더군요

목회학인가 설교학인가는 신학박사라고 하고... 왜 그런건가요?


답변 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신앙 생활하는데 필수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알아 두면 좋을 내용입니다. 박사 학위에 국한해서 질문해 주셨습니다만, 신학 학위와 관련해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함께 정리해 드리지요. 


보통의 경우 학위는 학사, 석사, 박사 학위로 구분됩니다. 일반적으로 학사는 정규 대학졸업자에게 수여되며, 석사와 박사는 학사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법령에 의하여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한해, 석사 및 박사 학위 과정이 개설된 대학원에서 정규 수업 과정과 해당 심사를 수료한 사람에게 수여됩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신학 관련 분야에 한정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문과 계열의 학사 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는 B.A(Bachelor of Arts, 문학사)에게 수여되지만,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B.D(Bachelor of Divinity) 혹은 B.Th(The Bachelor of Theology)라는 신학사 학위가 주어집니다. 


한편 대개 신학대학원에는 석사와 박사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데, 학위의 성격에 따라 전문학위(prfessianl degrees)과 학술학위(academic degrees)로 구분됩니다. 전자가 교회에서 요구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개설된 학위라면, 후자는 보다 전문적인 신학 연구를 위해 개설된 학위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대학원에서 수여하는 석사 학위는 이학 계열의 경우 M.S(Master of Science, 공학사), 인문학 계열은 M.A(Master of Art, 문학사)라고 불리지만, 신학대학원에서의 석사 학위는 M.Div(Master of Divinity)라는 전문학위와 Th.M(Master of Theology)이라는 학술학위로 구분됩니다. M.Div 과정은 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학이 가능하지만, Th.M은 M.Div 보다 심도있는 학업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B.Th 이나 M.Div 과정을 거친 사람에게만 제공됩니다. 이외에 신학 분야에서도 M.A(정식 명칭: Master in theology)과정이 있는데, M.Div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대개 M.A 과정은 1-2년 정도 소요되지만, Th.M 과정은 3-4년(논문 작성 기간 포함) 정도 걸립니다. 그밖에 외국 신학대학원에는 Th.M 뿐만 아니라 S.T.M(Master of Sacred Theolgy)이나 M.R.E(Master of Religious Education)등의 석사 전문 과정이 있는데요. 대개 이 과정들은 박사 과정을 목표로 개설되었으며, 한국 유학생의 경우에는 M.Div나 M.A 학위 소지자에게 입학 자격을 줍니다. 외국의 석사 과정은 한국처럼 시간이 정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학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능력(집중력)에 따라서 소요 기간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학 박사 학위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신학 박사는 신학이라는 학문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에게 수여되는 학위입니다. 신학 박사 학위 명칭도 여러 가지로 사용됩니다. 


우선, 대표적인 신학 박사 전문 학위로는 D.Min(Doctor of Minister, 목회학 박사), Ed.D(Doctor of Education, 교육학 박사), D.Miss(Doctor of Missiology, 선교학 박사) 과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박사 전문 학위는 목회와 교육과 선교의 전문성이 고려된 실천적인 성격의 학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 들어 한국 교회 내에도 위에 언급한 박사 전문 학위를 가지신 목회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학위들이 부쩍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만큼이나 부작용이 커 보입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D,Min 학위를 두고서 볼썽사나운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정부 교육 연구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 목회자들이 소유한 D.Min 학위가운데 상당수가 가짜라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목회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목사라면, 돈만 있으면 딸 수 있는 박사 학위라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주 거짓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껏 제가 만나 본 D.Min 학위 소지자들도 거의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외국의 무인가 신학교에서 정식학위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영어에 문외한이거나, 심지어 한글 논문에다 대필 의혹까지 있는 논문인데도, 학위를 수여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항간에는 미국의 신학교들 중에는 재정 충당을 위한 고육지책의 방편으로 한국 목회자들에게 목회학 박사 학위를 내다 팔듯이 하는 곳도 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사역하던 어느 선배 목사가 개척 교회에 부임받아 간 지 얼마되지 않아서 제게 부탁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습니다. 내용인 즉, 이랬습니다. 향후 좀 더 좋은 담임 목사 자리(?)로 부름 받기 위해서는 박사라는 꼬리표가 필수적인데, 그래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제 기억으로는 한국에 그 신학교 목회학 박사 과정 대행 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 합니다)의 D.Min 학위 과정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한글로 쓴 자기 소개서를 영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자신은 중학교 영어 수준도 안 된다고 자백하면서요.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만,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 선배 목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와 또한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목사라는 직책보다 박사라는 타이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한국 교회의 엄연한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결코 D.Min 학위를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D.Min 학위를 비롯해서 진짜 신학 박사 전문 학위는 박사 과정인만큼 고도의 학문성과 학습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한국이나 외국에 있는 나름대로 전통과 명성을 지닌 신학교에서는 철저한 자격 심사 과정을 거쳐서 수여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정상적인 학업 과정을 통해 박사 전문 학위를 취득한 분에게는 신학적 주제와 성격을 떠나서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더 높음을 받을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박사 학위를 따려 한다면, 그것은 본인 뿐 아니라 교회와 성도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로 남는 다는 사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이제 질문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 신학 박사 학술학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적인 학위로 Th.D(Doctor of Theology)와 Ph.D(Doctor of Philosophy)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 교수 중에 후자 학위를 가진 분이 있더라고 궁금해 하셨는데요. 여기서 Ph.D는 철학박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Ph.D에서 ‘philosophy'라는 말은 철학 뿐 아니라 학문 일반을 뜻합니다. 


대개 신학교(seminary)나 신학대학원(graduate school of theology)와 같이 신학 분야 연구를 위해 별도로 세워진 교육 기관에서는 신학의 권위를 존중하여 Th,D 학위를 줍니다. 반면에 신학교나 신학대학원이 일반대학원에 속해 있는 경우에는 신학을 일반 학문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여, 일반 학술 분야의 최고 학위를 나타내는 Ph.D 학위를 수여하곤 합니다. 이때에 신학 분야와 관련해서 수여되는 Ph.D의 정확한 명칭은 Doctor of Philosophy in theology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Th.D와 Ph.D라는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는 추세입니다. 


아무튼 신학 박사 학술 학위는 신학 분야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위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 많은 시간, 물질, 체력, 엄청난 학습량이 요구되며, 또한 개인적인 절제와 주변인(특히 가족)들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Th.M 이나 Ph.D 학위는 평생 동안 오로지 평생 동안 정밀한 신학 탐구와 신학교 교수 사역에 뜻을 둔 학자적 은사를 지닌 분들에게 적합한 학위 과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으로 보다 활력 있는 개혁신학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국 교회에 이런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면서, 답변을 맺겠습니다. 





42문.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화(擬人化)에 관한 답변 


<kimmanho365> 님의 질문

먼저 저의 부족한 생각을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동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의 몸체에 동물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동화나 어떤 물건(판촉물, 캐리커쳐)을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에서 이를 의인화라고 하는데 교회에서만은 이러한 동화를 아동들에게 읽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고, 교회에서 아동들에게 나누어 주는 선물도 이러한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산타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어머님의 교육 방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평생을 이러한 생각을 버린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하여 체계적으로 다른이에게 설명은 잘 하지 못하고 단지 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 자식들에게는 의인화된 책이나 물품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고등부 교사를 맡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학생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기에 부끄럽지만 목사님께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신에서 자라고 현재는 진해침례교회(강대열 목사님 시무)를 섬기고 있습니다.목사님의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초에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답변이 조금 늦었습니다. 

먼저 좋은 물음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님의 질문과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비인격적 사물이나 사물의 의인화(擬人化) 현상은 성경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에 대해 중대한 오류와 왜곡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교육에서 동식물을 의인화한 도구를 사용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이런 형태의 상품은 아무리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신앙 안에서 일체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덧붙여서 님의 생각의 옳고 그름에 대해 성경적인 평가를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인 답변을 드리기에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라 사료됩니다. 질문과 관련하여 성경 이해와 관련하여 짚어 보아야 할 몇 가지 사안들을 생각해 본 후에, 최선의 답안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화란 무엇인가?

우선 ‘의인화’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의인화’란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에 비기어 표현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의미에서 ‘의인화’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유비 관계를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인간의 특성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영어로는 ‘anthropomorphism'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로 '사람'을 나타내는 ‘안드로포스’(anthropos)와 '형상'이라는 뜻의 ‘모르페’(morphe)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말로는 ‘의인화’와 함께 ‘의인론’(擬人論), 또는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이라고 번역되곤 합니다. 


대개 신학적 범주에서는 ‘신인동형동성론’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의인화는 두 가지 유형으로 표현됩니다. 첫째, 하나님을 인간의 몸의 형태로 표현할 하는 경우. 둘째, 하나님을 인간의 특성(personality)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할 경우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두 가지 유형을 '육체적 신인동형동설론’과 ‘인격적 신인동형동성론’이라고 구별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님께서 사용한 용어와 성경과 신학상에서 사용되는 용어 간의 개념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님께서 지적하는 바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에, 이제부터 저 역시 의인화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사전적 개념에 비추어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2. 성경의 의인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경에는 무수히 많은 의인화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신인동성동형론’적 의인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하나님의 존재성과 행위를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 즉 음성, 시력, 교제, 일하심, 만족 등의 형식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창세기 초반부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마치 성대를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시는 분으로(창 1:3), 눈으로 사물을 보는 분을 가진 분으로(창 1:4), 동산을 산책하는 분으로(창 3:8),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시는 분으로(창 3:21)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처럼 육체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기에 육체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과 탁월하며 완전한 지성과 인격적 속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물질적인 우주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이 세계 속에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목적에 따라 능력과 관심과 활동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목적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모습과 형태와 속성으로, 즉 의인화로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의인화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되었으며, 그로써 우리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공의와 용서와 같은 그 분의 존재성과 속성을 아는 정당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의 속성과 인격성을 자연 속에 있는 사물의 특성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 ‘상급’, ‘요새’ ‘피난처’, ‘분깃’, ‘힘’, ‘방패’, ‘노래’, ‘목자’, ‘왕’, ‘재판장’등 다양한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어린 양’, '생명‘, ‘길’, ‘포도나무’, ‘참감람나무’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표현 양식은 ‘의인화’라기 보다는 ‘상징’과 ‘비유’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상징’과 ‘비유’에서 사용된 사물은 그 자체가 목적물(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이 아니라, 목적물의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에 있어서 인격적 피조물 뿐만 아니라 비인격적 피조물까지 당신의 속성을 이해하는 재료로 사용하시는데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의인화가 성경 안에서 사람의 특성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예는 훨씬 다양하고 풍부합니다. 사람과 관련된 문학적 기교(예를 들어, 비유와 직유와 은유와 풍유와 우화등)의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의인화는 동물과 식물, 심지어 곤충에까지, 거의 자연의 모든 대상을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지혜 문학에 속하는 잠언서와 전도서의 경우에는 사물을 동원하여 사람을 의인화한 표현들이 현저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동물이나 식물이 사람처럼 말하는 모습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발람과 나귀 이야기(민 22장), 요담의 나무 우화(삿 9), 요하스 왕의 우화(왕하 14),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각종 짐승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자연 혹은 초자연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인격적 존재와 형상들을 가지고서 인간의 본질과 속성을 구상적 실체로서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의인화라는 표현 방식을 통해 성경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의도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보다 다채롭고 풍성한 지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저는 성경에 언급된 다양한 의인화 용법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우매한 인간을 위해 고안하신 효과적인 교육 방법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 안의 의인화는 결코 가볍게 여겨지거나 간과되어서는 안 될 주제입니다. 성도라면 성경 범주내에서 그 본의(本意)를 바르게 찾고 이해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이 아닌 실제 삶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비인격적 사물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해서는 안 될인가?

이제 비로소 님께서 제기하신 물음의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바로 앞 진술을 통해 성경 안에서 의인화 표현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라는 것과 이것은 성경을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의도, 즉 계시의 내용과 목적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람을 동식물로 비유 혹은 상징해서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두 가지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 의인화 표현이 있는 만큼 사람을 동식물로 묘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보는 긍정적인 견해와 성경에 기록된 의인화는 계시 목적을 위한 표현 수단이지 사람을 비인격적 사물로 묘사하는 데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님의 입장은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안을 이해함에 있어서 양비론 혹은 양시론적 관점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찬성, 무조건 반대식의 의견은 불필요한 의견 충돌과 비생산적인 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사안의 관건은 ‘형상’과 ‘의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 대한 의인화가 하나님의 형상적 개념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단연코 반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의인화의 목적이 성경적 형상적 개념에 대한 의도적인 반대가 아닐 경우에는 사용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드리지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을 반대하는 경우는 두 가지 형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이 있는 존재처럼 신격화하거나 혹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고유의 인간성을 박탈함으로써 동식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저열화한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 타락과 죄악의 심각성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면, 후자는 인간이 도덕적, 영적 존재로 지음 받은 고유의 사실에 대한 반란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극단의 사례는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필연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고유 특질을 비인격적 자연적 형상에 전적으로 귀속시키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동일한 목적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한 의인화라면 거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사물로도 의인화하여 표현할 수 없다는 주장 역시 그리 설득력있는 주장은 아닙니다. 의인화로서 사람의 고유의 본성이 파괴되는 것은 의인화의 의도 자체가 그릇된 경우입니다. 의인화는 비유와 상징일 뿐입니다. 부연해서 말씀드리자면,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물질적 육체로 환원해서 해석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영혼과 영성과 인격, 지성, 도덕성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의인화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다분히 하나님의 형상을 물질적 개념에서 이해하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의 육체는 무의한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몸(신체)은 불멸적 영혼을 위한 기관이며, 살아 있는 동안 영혼과 몸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육체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됩니다. 이 점을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는 정신과 마음과 영혼과 그것들의 능력에 있지만 … 사람의 외형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전시된다. 진실로 외형도 우리를 하등 동물들로부터 구별하고 분리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함을 부인할 수 없다”(기독교강요 1권 15장 3절). 


그럼에도 이러한 설명을 근거로 사람의 육체를 비인격적 대상으로 절대로 비유 혹은 상징하여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성격과도 배치됩니다.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동식물을 이용한 의인화의 방편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일반은총 안에서 이러한 행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형상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해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일이나 형상을 예배에 도입하는 일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하였지만, 그렇다고 형상화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서 형상화를 허용하였습니다. 첫째, 은사적 측면에서 순수하고 합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둘째, 역사와 사건을 위한 가르침과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 셋째, 예술적 즐거움을 향유하거나 미학적 차원의 목적에서 만들 경우입니다. 교회 내에서 혹은 일반 사회에서 시행되는 사람의 의인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답변의 목적은 님의 생각을 비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님을 양지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적 의미를 자못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사람을 동식물로 묘사하는 것을 반대하는 마음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본인이 이런 마음을 지니고 신앙 생활을 하는데 전혀 갈등이 없다면, 굳이 강제로 생각을 바꾸라고 권할 내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색과 경험으로 인한 사례를 절대적인 진리의 문제로 여기거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앙의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강요나 지시의 문제로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님께서 본인이나 자녀가 의인화된 책이나 물품을 사지 않거나 영화나 TV를 보지 않는 것은 신앙의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지, 다른 사람들도 님과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요구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타크로스를 어떻게 여길 것인가 하는 물음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산타크로스의 실존성 여부를 떠나서 그와 관련된 전반적인 관점 자체가 성경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측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동식물의 의인화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능하거나 혹은 가능하지 않은 측면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답변을 맺겠습니다. 설령 교육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동식물의 의인화를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손치더라도,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이상, 교회와 신앙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혹 어린이들에게 친근하고 쉽게 말씀을 전한다고 설교대신 의인화된 도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은혜의 수단입니다. 교회는 이 거룩한 은혜의 수단을 바르게 활용해야 할 영적, 도덕적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즉 말씀을 말씀대로 바르고, 정직하고, 신실하게 증거하는 일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최고와 최선의 길입니다. 부디 주일 학교 교사로서 풍성하고 부요한 은혜의 말씀으로 학생들과 교회를 잘 섬기는 주의 종이 되시라는 소원을 전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43문. 알파 코스에 대한 신앙적 대처 방법에 대한 답변 


<복음에만 순종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목사님~

저는 얼마 전에 번영신학에 대해 인터넷을 찾다가 여기 사이트를 우연히 알고 가입한 청년입니다. 

알파코스라는 프로그램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문의 드립니다. 

현재 우리교회 새 목사님은 알파세미나 과정을 마쳤고, 청년 사역만 10년 이상 하신 분입니다.

앞으로 교회에 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부흥 발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설교를 통해 많이 얘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 저기 인터넷을 찾아보니 알파코스가 매우 비성경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요.

이러한 프로그램을 저희 교회에 접목 시킬때, 저는 어떠한 태도로 판단해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그냥 교회를 떠나야 되는지? 아니면 교회에 알파코스의 문제점을 알려야 하는지?

번영신학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책을 없나요? 인터넷 카페에서만 문제점을 찾아야 되는지요?

옹호하는 자들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풀어주어야 할지 힘드네요~

도와 주실 수 있으면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답변드립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알파코스 프로그램에 올인한 교회에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장로교 총회가 주최한 알파코스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알파코리아라는 단체에서 주도하는) 한국산 알파코스는 영국본산의 알파코스보다 내용면에서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운동이나 조직을 이단으로 판정한 교단은 없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이단성이 농후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합니다(본 카페 <이단에 대하여> 코너에 있는 관련 자료 참조 바람). 따라서 아무리 교회 성장과 불신자 전도에 탁월한 성과를 가져오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도, 신학과 교리와 적용 측면에서 성경과 정통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현저하게 벗어나 있는 만큼 대단히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님이 처한 교회 형편은 이 일을 대처함에 있어서 결코 녹록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일단 담임 목사가 주도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경우라면 더욱 어려운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혹시 속해 있는 교회가 어떤 교단에 속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다행히도 장로교회라면 그나마 조금 희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작년, 재작년에 걸쳐서 예장 합동과 예장 합신에서 교단적으로 알파코스의 이단성 문제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양 교단 신학교에 속한 명망있는 신학 교수 분들에 의해 매우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과 논평이 있었습니다. 만약 님께서 출석하는 교회가 장로교회고, 담임 목사님이 장로교단에서 안수받은 목사라면, 두 장로 교단의 이름으로 작성된 알파코스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 자료를 참조해 볼 것을 권면해 드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혹시 교회와 목사님이 장로교와 상관없더라도 한번쯤 이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경험상, 아무리 객관적인 자료를 내민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관과 경험에 몰입해 있는 분들에게는 마이동풍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각한 문제임에도 전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경우에 일반 성도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님의 질문의 요지라고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먼저 지금 시점에서 님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교회를 향해 주님의 마음을 품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세워지기 위해 눈물과 근심으로 기도하고 애통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와 중직들이 바른 판단과 안목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일이라도 필경 인간적인 부패함의 기만과 속임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와 더불어 이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과정에서 님이 취할 수 있는 두번째 중요한 태도는 교회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성경적 분별력을 갖는 일일 것입니다. 지레짐작이나 감상적인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연 교회에서, 담임 목사에 의해 진행되는 알파코스의 성격과 형태에 대해 되도록 면밀한 분석과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먼저 말을 내놓기 전에, 객관적인 정보에 의해 확신을 구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신학서적이나 인터넷을 활용하면 충분히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급함과 조급함은 배제하고, 겸손과 인내로 문제의 핵심에 정확하게 다가가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확신이 들면 문제 제기를 해야 할 단계에 이르게 될 텐데요. 이 부분에서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타락한 교회라도 본질상 교회의 속성 아래 머물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교회에게 주어진 고유한 질서와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 교회의 문제를 공론화할 때에, 사회에서처럼 폭로, 비방 식으로 해도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른 명분이라도 공명심과 의협심과 자기 방어적 심리가 끼어들면, 본말이 전도되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나 교단마다 교회 문제를 다루는 헌법적 규정이 있습니다. 적어도 교단의 헌법을 존중한다면, 교회와 관련된 문제 제기와 권징과 시벌은 교회법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신앙 양심적인 대응이 없다면, 정말 부패한 교회와 부패한 목사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님이 처한 현실이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일들 교회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앞서 말씀드린 모든 과정과 조치를 취하였음에도, 교회와 목회자가 지속적으로 아무런 신뢰와 믿음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신앙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보다 개혁된 교회로 적을 옮기든지, 아니면 교회에 남아서 개혁을 시도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런 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개인이 생각하고 결정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 경건한 목회자나 연륜 있는 성도와 함께 기도하고 논의하며, 조언과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님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가늠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님과 님의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44문. 롬 16:7과 관련된 바나바의 사도권 물음에 대한 답변 


로우에나(learmorch)님의 질문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교회의 사도로 즉 복음 전도자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보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는 바울만 그리스도의 사도로 보고, 바나바는 교회의 사도 즉 말씀 전도자나 교사로 보시던데... 


로마서 16장 7절 -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niv 성경] Greet Andronicus and Junias, my relatives who have been in prison with me. They are outstanding among the apostles, and they were in Christ before I was. 


그런데 ~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기고~ 란 부분이 해석에 따라서는 "사도들중에 유명한" 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문맥상 더 어울리는 해석이구요...즉 유니아와 안드로니고도 사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도직이 그것도 유니아는 여자이름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에는 한 번의 언급도 없는 자들이 베드로나 바울같은 사도일 수는 없다면서...


따라서 이들은 복음전도자란 의미의 교회의 사도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맞는 말인지요??? 

 

답변 드립니다.


님께서는 롬 16:7와 관련된 존 스토트의 해석을 근거로 바나바를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복음 전도자라는 의미에서 교회의 사도라고 보아야 할지를 물으셨습니다. 


먼저 답변을 드리기 전에 이 부분에 관한 존 스토트 박사의 해석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롬 16:7에 언급된 ‘사도들’(한글 개역성경에는 ‘사도’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음)이란 단어를 주목하면서, 과연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첫째, 흔히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바울 및 야고보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사도’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에 본절에 ‘사도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라는 표현은 ‘사도들이 보기에 뛰어난’ 혹은 ‘사도들에 의해 매우 존중을 받는’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존 박사는 이러한 번역은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번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둘째, 따라서 본절의 ‘사도들’은 ‘교회의 사자들’(apostles of the churches)라는 호칭으로 사용되는 ‘교회의 사도들’이라는 번역이 더 나은 번역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라기 보다는, 오늘날 개념으로 본다면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라는 직분에 알맞은 사람들로서 본절에 소개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비롯해서 빌립보 교회의 에바브로디도나 안디옥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존 박사가 본절의 ‘사도’라는 표현을 구태여 구별하여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닌 ‘교회의 사도’라고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로우에나 님께서는 존 박사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기고’라는 구문을 해석에 따라서는 ‘사도들중에 유명한’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존 박사의 ‘로마서 강해’(BST 시리즈) 해설 부분에는 그런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되었습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첫 번째 해석은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감안할 때, 님의 설명이 존 박사의 의도에 어느 정도 부합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본절의 ‘사도에게’라는 번역의 헬라어 원문은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제 컴퓨터의 원문 성경 텍스트가 깨져서 인용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입니다. 그런데 존 박사는 이 원문은 ‘사도들 중에’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그럴 경우에, 유니아와 안드로니고는 ‘사도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 정도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대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곳에서만 한번 언급될뿐더러, 성경 어디에도 이들 부부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같은 종류의 사역을 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박사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구별되는 ‘교회의 사자들’ 즉 교회에서 파송한 ‘교회의 사도들’이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존 박사의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바나바 역시 이들 부부와 다를 바 없는 ‘복음전도자’란 의미의 ‘교회의 사도’가 되는데, 님은 이 견해의 타당성에 대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존 박사의 해석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존 박사의 해석은 충분히 공감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존 박사는 문법적으로 본절의 ‘사도’라는 표현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적용된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대등한 지위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설령 이들이 사도라고 불리어졌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야고보와 동일한 사도였다고 보는 것은 억측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존 박사의 해석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헬라어 원문 해석에 관한 그의 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 테면, 존 박사는 본절의 헬라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를 ‘사도들 중에서’라고 번역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 구문은 문법적으로 복수 여격을 취하고 있음을 볼 때, 이 말은 ‘사도들 중에서’ 보다는 ‘사도들에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에게’라는 말에서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셔서 세우신 열두 사도와 바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협의적인 사도의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이 부여된 사례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갈 1:19; 2:9)와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행 9:27; 14:4, 14)와 실루아노와 디모데(살전 2:6), 그리고 본절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있습니다. 즉 본문에 인용된 ‘사도’는 이 두 종류의 사도들을 포괄하여 나타낸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칼빈도 본문 주석을 통해서, 본절의 제자들의 개념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 모든 노력을 바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해서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본절의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라는 표현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주님이 직접 세운 사도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사도로 불리워지는 또다른 제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존 박사가 본절의 ‘사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아니라 ‘교회의 사도들’로 번역하여야 타당하다는 지적은 ‘사도’의 보편적 개념보다는 협의적 의미에 치우친 본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나바 사도권에 관한 두 가지 쟁점에 대해 제 의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바나바는 예수님에게 직접 택함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약 성경에는 열 두 사도 외에 다른 사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를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닌 ‘교회의 사도’라고 단정짓는 존 박사의 견해는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도에 대한 이러한 구분이 사도들의 특성을 설명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인 동시에 ‘교회의 사도’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바나바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존 박사의 해석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존 박사가 바나바와 같은 이를 ‘교회의 사도’로 규정하는 근거로서 고후 8:23에 언급된 ‘교회의 사자들’이라는 호칭을 언급하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적절한 예인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고후 8:23의 ‘사자들’(아포스톨로이)은 바나바와 같이 복음 증거 목적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기보다는, 교회와 관련된 특수한 목적, 즉 구제금 모금 사업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교회의 사도들에게 준하는 역할과 사명이 부여되었고, 교회와 성도로부터 신임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후 8:23의 ‘교회의 사자들’이 존 박사가 말하는 ‘교회의 사도들’과 동일 인물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좀 더 숙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45문. 목사로서의 소명에 관한 답변 


진진(qpspcldk1296) 님의 질문 

안녕하십니까? 강성운형제입니다.

예전에 저희 고모부(목사님)제가 목회자 사명을 있다고 합니다. 현재 저희 고모부께서는 하나님께 여러 은사도 받으시고 목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은사를 받았지만 신앙의 관점으로 봤을때 목회자의 길을 가기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야 된다며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은사적인 부분을 가지고 어떤 특정인에게 은사적 믿음을 가지고 목회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지명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잘못 판단이 될수 있을듯해서 조심스럽게 물어 봅니다.


현재 지금 많이 고민을 합니다. 제가 목회의 길을 가야 하는 게 맞을지 모르지만  살아 가기위해 부딪치는 문제가 목회자를 통해 회피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목회자의 길을 간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의 탁월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강성운 형제님께...

비록 짧은 글입니다만 마음이 많이 가네요. 그래서 다른 일을 제쳐두고 답장을 드립니다. 


님이 처한 독특한 상황이 있을 줄로 압니다. 고민이 묻어나는 글 행간 사이로 얼마나 많은 생각과 물음이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님의 상황을 좀 더 가까이서 전해 들을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만, 남겨 주신 글을 근거로 제 생각을 전해 드리지요.  


현재로선 님은 자신이 목사로서의 사명이 있는가 여부를 두고 고민을 하고 계시지만, 기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물음이 필요할 듯 합니다. "목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목사가 되기도 전에, 어떻게 목사를 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목사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하게 답하는 일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정입니다. 목사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단추를 맨 꼴과 같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참으로 무모하고 위험한 도박같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목사라는 직분이 갖는 엄위로운 성격 때문입니다. 요나단 에드워즈는 목사를 가리켜 성도들의 영혼 지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목회자에게 성도들의 영혼을 맡기겼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물며 영혼을 책임지는 목사는 어떠하게 생각해야겠습니까? 더군다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증거하고, 그로써 교회와 성도를 진리의 푸른 초장으로 이끄는 목자와 같습니다. 목자 없는 양떼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씀으로 섬기는 목사 없는 교회와 성도 역시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목사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딤전 3:1-7입니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에 관해서는 본 카페 <성경적 목사론> 코너의 '제직의 제 역할과 사명'이라는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상 위에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존속하고, 그러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모으시는 섭리가 지속되는 동안 목사라는 직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중요한 연장(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목사에 대한 최소한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동감을 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란 누구인가"라는 중차대한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목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목사로서의 소명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사항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목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내, 외적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 소명이란 말그대로 주님께로부터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주관적인 판단과 확신입니다. 이것 없이 섣불리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적 소명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외적 소명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적 소명보다 더 분명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주변인(특히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 믿는 가족들)으로부터 객관적인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목사로서의 소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결정할 일이 아니라, 공교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조금 강하게 말씀드리자면, 어떤 사람이 외적 소명에 대한 아무런 확신없이 그저 내적 소명만으로 목회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극구 말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둘째, 목사로서 섬길 수 있는 달란트 소지 여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님께서 언급한 은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달란트는 소위 오순절 계통의 교회나 은사 운동주의자들이 말하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어떤 능력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형식의 체험 신앙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아예 목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갖지 말라고 조언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말씀과 관련된 일입니다. 목사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지키는 일에 생명을 내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성적, 인격적, 정서적, 영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경과 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져야 하며, 성품과 생활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인격성을 갖추어야 하며, 자신보다 타인에게 배려와 아량을 아끼지 않으며 항상 겸손하고 품위있는 정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분별력과 안목과 함께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제 안에 이런 달란트가 있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하다고 생각되어도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를 준비하는 과정에 임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달란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득 수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쓴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제목이었지요.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물음을 자신 안에 늘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답을 하게 될까요?


"주님, 제가 그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갈만하니 부르신 게 아닙니까?"라고 되묻게 될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 목자의 길을 제 능력으로, 제 실력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겠지요.


또한 그 길을 자신있게 걸을 수 있을만큼 모든 준비와 자격 요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겠지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담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대해 미련하며, 약하며, 천하며, 멸시 받고, 없는 자를 택하사 영광과 거룩의 도구로 삼으시는 주님의 주권과 섭리 앞에 감사와 찬송과 송축을 올려 드리는 일입니다. 

고민이 되더라도 심사숙고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기에...

그리고 주님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간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간구를 들어 주시며, 가장 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님이 가야 할 가장 선하고 바른 길을 깨달으시거든, 진리와 더불어 그 곳으로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급한 마음으로 두서 없이 쓴 글이지만, 님의 어깨 위에 놓인 근심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소원하며... 


Jun 11, 2009


캘거리에서, 주나그네 목사(드림)





46문. 고린도전서 방언에 관한 답변 


하얀곰 님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조그만한 도시 고신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청년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알파코스를 도입하셔서 저희 교회는 매주일 성령님을 초청하며 은사가 풀어지기를 고대하는 교회에서 고민하고 신앙생활하는 중에 말씀을 읽다가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21절~22절의 방언에 대한 사도방울의 해석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현대 교회가 방언을 긍정적 은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나 합니다. ‘방언이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다’와 21절이 적절하게 연결이 되지 안네요.^^ 그리고 사도행전의 방언들과도 적절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추천도서가 있으시면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파코스를 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단회적으로 보지 않고 연속적으로 보는 관점이 오히려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본문을 깊이 있게 보지못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게 되 사도행전 강해를 듣지만 항상 아쉬움이 있어서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사역자가 사라지는 오늘날에 목사님의 설교와 복음 메세지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청년의 행실을 깨끗게 한다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좁은길을 가는 말씀의 사역자가 있어서 먼 학국땅에서도 인터넷으로 말씀을 함께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님에게...

답변 드립니다.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 간단하게 묘사하였지만, 은사주의 관점에서 알파코스를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는 전형적인 교회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알파코스의 신학적 문제점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저희 연구회 카페를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 혹시 한국의 장로교단 중의 하나인 고신측에 속한 교회여서 고신교회라고 소개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알파코스는 한국의 주요 4대 교단(합동, 통합, 합신, 고신) 총회에서 불건전한 프로그램으로 규정하고 자체적으로 이단사이비연구협의회를 구성하여 면밀하게 조사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쓴 ‘개혁신학 관점에서 본 현대 교회의 은사주의 실체’(부제:현대 교회 은사주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이라는 글을 꼭 참조해 보시길 바랍니다. 본 카페 <2차 공개강좌 : 교회론> 코너에 포스트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카페 검색창을 활용하시면 알파코스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각설하고, 님의 물음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님은 고린도전서 14장 21절과 22절 내용이 본문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들과도 상호간의 의미 연결이 잘 안된다는 고충을 토로하셨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 을 가지고서 두 절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제기할만한 의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 전체 문맥과 이 두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원의적 메시지를 고려하면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방언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며, 나아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의 실체에 관한 허구성을 여실히 확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먼저 고전 14:21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이사야서의 일부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8:11, 12에서 따 온 것인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사야서 히브리어 본문 자체를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직접 번역하고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도 바울이 방언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주장은 22절 내용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하나의 근거와 예증으로서 21절에서 이사야서에 언급된 한 구절을 임의적으로 삽입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본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 앞에서 패역해가는 유다를 향해 북이스라엘의 비참한 멸망을 경계 삼아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는 경고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이스라엘과 동일한 태도로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급기야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 즉 유다의 압제자였던 앗수르의 말로서로 그들을 교훈하셨습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이 앗수르 언어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와 히브리인을 향해 이방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담은 신적 행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배역과 배도를 일삼는 유다에게 장차 나타나게 될 심판에 대한 일종의 표적이었습니다. 


혹자는 21절을 마치 하나님께서 방언, 그것도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뜻을 알 수 없는 신비하고 이상한 방언을 허용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로 설명하곤 하는데, 이사야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의적 해석입니다. 유명한 구약 성경 주석자 레스키(Lenski)도 밝혔듯이, 이사야 히브리어 원문은 ‘방언의 은사’와도 하등 상관없는 구절입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본문을 ‘방언’과 관련해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방언은 무아지경의 뜻 모를 말이 아니라 뜻과 의미가 분명한 외국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2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언급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방언에 대해 율별난 관심을 가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를 질책하기 위하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방언에 관한 지나친 남용과 왜곡으로 교회의 본질적 자태로부터 멀어져 가는 교회를 향해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선지자의 글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방언을 가리켜,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이 바로 앞 절에서 인용한 이사야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방 언어를 통하여 계시를 전하신 것은 유대인든, 비유대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불신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신약 교회에 나타난 방언도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도 방언을 하나님의 뜻을 전달코자 하는 강력한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곧 신약의 방언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섭리가 혈통적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차별없이 미치고 있음을 기적적으로 보여주는 은사였습니다. 방언으로 인해 이제 모든 민족에게 모든 언어로 복음이 선포되고, 이해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방언과 신약의 방언과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방언은 불순종한 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표적이었다면, 신약의 방언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자들을 향한 축복의 상징으로서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방언은 구약에서 신약 시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방언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변화의 징표로서 방언은 표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에 나타난 방언은 곧 그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도 시대가 끝남에 따라 방언도 마감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명료한 계획과 뜻이 표적이 아닌 말씀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기록되기 전까지 교회에 부어주신 잠정적인 은사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표적들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표적는 표적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분명한 뜻이 전달되어지면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잠정적인 수단이기는 하였지만, 표적 자체가 항구적인 계시로서 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과 정통 교회 역사를 조금만 면밀히 살피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방언을 이해하였습니다. 칼빈은 방언과 신유와 같은 기적적인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 같이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한 것들이었으며, 사도 시대 이후에 사라졌다고 봅니다. 또한 사도행전이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의미를 구별할 수 있는 외국 언어로 봅니다. 따라서 통역의 은사 역시 신비한 언어를 해석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방 언어를 번역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방언은 모든 민족들이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고, 복음을 선포하고 믿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과시와 허영에 빠져서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고린도전서 주석).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은사로서 예언을 강조합니다. 방언 은사의 종결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고전 14:22절의 ‘예언’마저도 가까운 장래나 먼 미래의 일을 거침없이 예고하는 초자연적 은사로서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는 이러한 방식의 예언 행위를 방언과 더불어 오늘날 교회에 가장 중요한 은사로 여깁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방언과 대비하여 강조하는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한 언어로 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일을 말합니다. 칼빈은 고린도 전서 주석을 통해서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 당시까지만해도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은사로서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는 없거나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주석 12장, 기독교강요Ⅳ.3.4). 


오늘날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예언은 교회에서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즉 설교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선포됨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며, 믿음이 바르게 자라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좋은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저는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관점을 가장 좋은 성경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 방언에 대하여는 그들과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신약 시대에 경험했던 방언이 완전히, 전적으로 사라졌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방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은사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확신을 갖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표적이 계시를 대체할 수 없듯이 방언이 예언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방언의 은사가 희미하게나마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본래적 역할과 기능을 절대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오늘날 현대 교회에 열풍처럼 번져가는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유심히 관찰해 볼수록 성경에 묘사된 방언과 그 어떤 의미있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현대 교회 안에 방언에 관심 있는 무리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러한 은사를 통하여 어떤 종류의 교회와 신학과 신앙을 추구해 가는지를 살펴보세요. 그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겸손하게 진리 앞으로 나아와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지를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착념과 영적 분별과 영적 성숙이 동일한 믿음과 고백 가운데 교회와 성도를 하나 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살펴보세요. 그리고 어떤 은사라도 자신의 의와 자랑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의 덕과 성도간의 유익을 위하여 활용하는지 지켜보세요. 만약 이런 열매를 하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면... 그건 백프로(100%) 가짜 (방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참고할만한 추천도서를 소개해 달라고 하셨는데요. 찾아보는 중입니다. 조만간 별도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더불어 늘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Jun 17, 2009


주나그네 목사





47문. 불건전한 가르침을 전파하는 현대 교회에 관한 답변 


하얀곰(wbsfc) 님의 질문

저의 질문에 장문으로 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드리기 전에 전 고신측 00교회에 출석하는 청년입니다. 고신측임에도 불구하고 피터와그너의 책(일터교회가 오고있다)이 소개되네요 ㅠㅠ


저희 교회 청년회 목사님께서는 '보수신학이 신약교회에는 방언과 치유같은 표적이 그쳤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한 신학이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게 한 원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그렇다면 선교지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적과 그러한 일들로 인해 복음이 퍼져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요한계시록의 기록이 완성되면서(정경이 완성되면서) 은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교회사를 다룬 책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은사의 역사는 면면히 내래오고 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기록들이 있으면 추천을 부탁드렸더니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도 은사의 기록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만 강조하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잘못이해하는 것 아니냐?'


'성령의 은사는 구하면 주시는 분이다. 방언이라도 구해봐라. 주신다. 방언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아디아 포라와 관련해서도 '성령님께 뭎어봐라 답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일일이 여쭤보지 않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는 것 뿐이다.' YM 같은 선교단체들에게서 들을 법한 말씀을 하시더군요...그런데, 저는 이 질문을 드리면서도 환상으로 보여 주시는 사역이 있지 않나 혼란해 지기도 합니다. YM 맴버들이 전국 선교를 하면서 저희 지역에 와서 하룻밤 지낼곳을 기도하는 중에 저희교회 큰 나무가 보였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런것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성경으로 부터 멀어지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라지만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겠고, 그렇게 말했다간 저희교회에서 신앙생활 못할 겁니다^^


최근 말씀하신 어록 들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강도 높게 말씀하십니다.

이 카페에도 바나바의 사도권 질문이 있었지만, 청년회 담당 목사님은 '우리가 사도하면 제자들과 바울만으로 아는데, 성경에는 바나바도 사도이다. 우리가 사도직이 임시직이라 하는데, 이 사도적 직분이 회복되야 한다. '  목사님은 사도적 직분이라는 것은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을 행하고) 복음의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직분을 말한다고 하시네요. 그 근거로 피터와그너가 그렇게 지적한다고 하시더군요. 이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바나바의 사도권을 통해 제한된 사도권을 넓히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요. 저도 좁은 식견에 사도는 열한제자+맛디아+바울 로만 알고 있던터라...


저희 목사님의 이런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최근 청년회 목사님께서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천주교로 부터 회복은 잘하였지만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성령의 은사를 거부했다. 그 원인이 칼빈은 성경에 하라고 하는 것만 해라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 화가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개혁교회에서 찾은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답은 '현재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무기력하게 된것은 칼빈의 가르침에 부족함이 아니라 칼빈이 성경에 하라고 한 그 가르침을 전심으로 쫓기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가르침이 충분치 못해 다른 곳에서 외식을 하는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언제 끝날지 앞길이 안보여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얀곰 님에게...   

'혹시나'하는 마음이 들어서 교회 이름을 물었던 것인데, '역시나' 라는 답을 들으니, 마음이 더 무겁고 갑갑합니다. 말로는 한국 장로교회 원조 교단이라고 하고, 보수 개혁 신학의 요람이라고 하는 교단 내부에서조차 정통 개혁신학에 반하는 이런 류의 주장들을 당당하게(?) 거론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부지기수인 이 모순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저 역시 난감합니다. 


장로교회 간판을 달고서, 장로교회 목사라는 직함을 갖고서 피터 와그너 부류의 책을 추천하고, 현대 은사주의자와 오순절주의자와 다를 바 없는 주장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이 참담한 교회 현실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 또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근거로 '열심이지만 아둔한' 생각에 사로잡힌 수많은 목회자와 목회자 후보생들이 매년마다 한국 교회 마당에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님의 교회 목사님 개인을 판단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님이 전해 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목사님은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혹 자신이 소경인데 다른 이를 인도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무지로 인한 무모함을 뜨거운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깊이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지금과 같이 장로교 신학과 교리에 대해 만족이 없고, 오히려 비정통 신학과 신앙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장로교회 간판과 장로교회 목사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고 타교단으로 전향(?)하는 것이 그나마 정직한 목회자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요즘 들어 님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사례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이는 현대 교회의 배도의 흐름이 그만큼 거세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그리고 갈수록 더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배도의 흐름에 몸을 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마지막 때가 가까와진다는 의미이겠지요. 


많은 목회자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처한 어둡고 불리한 전망에 대한 책임을 성도들에게 돌립니다. 그들이 목회자 생각대로 잘 따라오지 않아서라고 쉽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이토록 암매하게 만든 책임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잘못된 신학과 거짓된 확신 속에서 영적 혼돈과 무질서와 분열을 조장해 가는 나쁜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스스로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더욱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영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은 목회자만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이 추구해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불온한 은사주의가 교회 갱신과 부흥이라는 탈을 쓰고 신종인플루엔자(H1N1)보다 더 빠른 기세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영적 전염병에 걸린 사람마다 비슷한 현상을 보입니다. 무지와 교만과 이중성과 속임수와 허풍과 사기를 낳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말하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사실에 대해 놀랄만큼 집착과 고집을 부립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마음에 담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고 하였습니다. 


부디 님의 교회와 목회자가 이러한 은혜의 말씀으로 각성과 변화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님에게도 격려와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반 성도로서 부딪혀야 하는 교회 현실이 결코 녹록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보다 더 좋은 은혜를 사모하며 늘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진리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성령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주나그네 목사(드림) 





48문. 성경공부 리더에 대해서~


샬롬! 목사님~


저는 청년부에서 성경공부 리더를 올해부터 사역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시작할때 말씀만 보자!라고 조원들에게 말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상반기가 끝나는 시점에~

교제와 친목 위주로 되어 있는 저희 교회 청년부를 보면서 많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질 수 있는 성경공부 시간에~말씀보다는 세상 살면서 지내온 이야기와 세상적 이야기를 주로 하기를 원하는 우리 청년 형제 자매들을 보면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하반기 때는 성경리더자로만 나서고 싶습니다.

쉽지만은 않은 걸 알고 있습니다.


영적리더쉽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나 교재좀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청년 시절에 상당 기간동안 비슷한 처지와 고민을 가졌드랬습니다. 어느때인가는 청년 구역 전체를 맡아 말씀을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성경 공부는 늘 용두사미로 끝나곤 하였지요. 성경 배움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청년들에 대한 실망과 영적 리더십의 한계를 가진 제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안은 채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어쩌면 그러한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올바른 성경관도 없이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습니다. 그저 다른 청년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리더가 되었고, 그것으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만한 영적, 지적인 준비 과정과 권위없이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무모한 도전(?)는 좋지 못한 열매로 드러났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엄밀한 의미를 찾고 묵상하기 보다는, 삶의 정황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못된 습관이 생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청년들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게 되거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정죄받는 느낌이 들 수 있는 발언을 무시로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커녕 도리어 영적 우월감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비로소 신학교에 입학하여 개혁신학을 만난 후에야 이런 중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요. 


성경 공부 리더가 되기 위해서 꼭 신학교에 들어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른 신학과 교리에 대한 이해없이는 성경 공부를 제대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씀 사역자로 평생을 살아야 할 소명이 있다면 반드시 신학교에 들어가야 겠지만, 그런 소명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신학 공부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성경 공부에 필요한 재료들(예를 들어, 성경 사전, 원어 사전, 주석, 강해서..)을 구입하고 탐구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심과 소원이 있다면, 누구든지 사도 바울에게 칭찬들은 베뢰아 성도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님에게도 이런 은혜와 기회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성경 공부와 관련된 외부적인 여건의 문제일 수 있겠는데요, 교회나 담당 교역자가 강조하는 내용과 같은 관점에서 성경 공부가 진행되어지는 좋습니다. 청년부 담당 교역자와 청년 리더 사이에 신학적인 공감대나 신앙적인 신뢰가 없다면 성경 공부가 목적한 바대로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님이 청년부 담당 교역자를 신뢰하고 존중한다면 그 분을 통해 지도와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한 현실이라면, 좀 더 신중하고 사려깊은 생각과 태도가 요청되겠지요. 더 많은 기도와 인내도 필요하겠고요. 여하튼 님의 신앙 환경이 영적으로 힘과 소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합니다. 


세째, 청년들의 삶을 보다 깊게 이해하려는 배려심이 필요합니다. 군기반장 보다는 섬기는 자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 청년들에게 더 큰 공감과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칫 신앙의 바른 것을 강조하는 자세를 완고한 고집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비난 받는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릴 뿐입니다. 말씀으로 섬기는 사람은 말씀이신 주님의 성품이 그 가운데 묻어나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교훈을 기억하십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런 마음으로 청년 회원들을 시종 대한다면, 언젠가 그들 역시 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겨서 여기까지만 말씀드려야 겠네요. 주 안에서 건승하길 바랍니다. 





49문. 반칼빈주의에 대한 답변 


복음에만 순종님께...

방금 질문 마지막 부분에 링크된 카페에 들어가서 해당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카페에 실린 글이 언급하신 '기독교의 죄악서'라는 책의 일부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참을 읽어가다보니 불현듯 '황색 언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황색언론이란 대중들의 원초적 본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보다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를 위주로 하는 천박한 상업주의 저널리즘의 형태를 가리키지요. 요즘 시쳇말로 '막장 언론', '찌라시 언론'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적어도 그 카페 글 내용 중에서 칼빈과 칼빈주의에 해당하는 부분은 전형적인 '황색 저널리즘' 의 구도 속에서 쓰여진 글입니다.   


이런 '찌라시' 기사 보다 못한 잡문(雜文)에 대해 신학적 논평을 해야 할 필요성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만,


이런 글들이 인터넷 공간 속에서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하고, 복음에만 순종님같은 성도들에게 당황과 충격을 준다고 하니 괘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몇 자 적습니다. 


항간에 눈에 보이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원성과 불만이 높아지다보니, 기독교 비판 서적들이 날개돋힌 듯 팔리는가 봅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저지른 만행과 비극에 대해서 파헤친 책들이 일반인들에게조차 적지 않은 관심과 호응을 불러 일으키는가 봅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기독교의 주류적 흐름을 보면 이러한 형태의 반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요즘 한국 기독교의 형국이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사회가 어지러운데, 교회 너 마저...'라는 불편한 심기가 여론화되는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기독교에 대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비난과 독설이 난무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목사인 저로서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죄악사 혹은 기독교 잔혹사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역사 자체가 마치 그러한 불행으로 점철된 것처럼 확대, 해석하려는 시도는 세속적인 황색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악의적인 태도와 다를바 없습니다. 


기독교는 세상 종교들과 달리 죄악과는 상관없는 순수 결정체로서의 종교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어느 종교들보다 죄악의 문제를 가장 정직하고 신랄하게 지적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해서 죄를 짓지 않고, 기독교라고 해서 죄악과는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한 신자라고 하더라도 영화에 단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죄악의 본성과 문제로 인해 갈등하고 싸우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죄성을 깨닫고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성도는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경건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팔복 설교을 인용한다면, 이 세상에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며, 의에 주리며, 긍휼하고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자태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으며, 그 성품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비록 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품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런 복음적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 죄악사 혹은 기독교 잔혹사에 언급된 기독교와 관련된 죄악상은 참된 기독교인, 참된 교회가 행한 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했다고해서 그 모든 것들이 진짜 그리스도와 진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치하고 졸렬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주의 이름으로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마녀사냥식 종교 재판을 하고, 약한 자를 억압하고, 남의 나라를 강탈하고,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그 모든 일들은 주님 앞에 심판 받아 마땅한 불법을 자행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에,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불법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법은 주님의 뜻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교회와 신앙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역사 속에서 빚어진 수많은 불법적 행위는 거짓 교사, 거짓 그리스도인, 거짓 교회의 소행입니다. 그럼에도 혹자들은 이러한 불법적 행위를 마치 기독교의 본질의 문제로 다루려고 합니다. 마치 기독교의 복음 안에 파괴적인 야수성과 야만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호도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자칭 신자라고 할지라도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신념으로 충일하게 될 때에, 얼마만큼 심각하고 커다란 죄악을 담대하게 저지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악은 기독교가 지향하는 참된 신앙과 교회,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무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님의 구체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그 카페 글(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칼빈에 대한 혹독한 비난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그 글에 적시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칼빈이 남긴 공헌을 떠나서 칼빈은 이중인격자였거나 거짓 선생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칼빈을 비난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 글에 언급된 칼빈에 대한 행적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진실에 기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십 수 년동안 칼빈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신앙의 양심을 걸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칼빈주의 안에서도 칼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가 있습니다. 관점에 따라 신학적으로도 상이한 비평과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이성과 상식선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글입니다. 원한 사무치는 개인 감정이 없는 한, 역사적인 한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이렇게 악의적인 태도로 일관된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이 글에 달린 제목을 한번 보실까요? 

 

"흑인을 잡아다 노예를 삼고 죽이는 청교도(칼빈주의자)들의 역사",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잔혹한 고문을 가한 칼빈과 그의 종교국", "상상을 초월한 칼빈과 칼빈니스트의 악마적 살인 행각", "칼빈과 칼빈 추종자들의 광란의 역사"

 

이러한 주제는 지난 사백 오십여년 동안 적어도 교회사적으로 인정받는 범주에 있는 신학자과 목회자들에 의해 시도되어왔던 칼빈에 대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비평과 평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주제 하에 쓰여진 모든 내용들이 구구절절 근거없는 맹목적인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지적해 보겠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누가 그 글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빈을 비난하는 중요한 대목마다 Stefan Zweig(1881-1942)가 쓴 『The Right to Heresy: Castellio against Calvin』에서 자료를 인용하고 있더군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기껏 칼빈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의 비밀을 밝힌다고 것이 밑도 끝도 없이 오직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해 맹목적인 불신을 표출하고 소설가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다니. Stefan Zweig는 유대교인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세계 일차 대전을 경험하면서 유대교적 신앙마저 포기하였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견디다 못해 결국 두번째 아내와 동반 자살로서 생을 마감짓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칼빈을 유럽의 전쟁을 낳은 원흉정도로 취급하고 칼빈에 반기를 든 카스텔리오는 자신과 같은 신실한 약자로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칼빈에 의해 정죄받는 카스텔리오를 변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카스텔리오 역시 칼빈에 대해 분노어린 심정으로 『이단은 박해 받아야만 하는가』(De non Puniendis Gladio Haereticis, 1554)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당시 카스텔리오는 나름 인정받는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고학으로 꽤 이름있는 언어학자가 되었습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 체류할 당시에는 칼빈과 함께 하숙한 일도 있고, 칼빈과 함께 제네바에 돌아와서 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카스텔리오의 신학적 편향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성경 중 일부 문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칼빈과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카스텔리오가 목사가 되겠다고 청원하였을 때, 칼빈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게 됩니다. 칼빈의 입장에서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드러난 그를 목회자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스텔리오는 칼빈과 칼빈과 뜻을 함께 한 동료들을 향해 인신 모독적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세르베투스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빌미로 칼빈을 마치 세르베투스를 죽은 살인자로 몰아부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앞서 소개한 책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카스텔리오의 태도 변화는 칼빈과의 신학적 견해 차에서 비롯된 것이며, 칼빈이 제시한 엄격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을 글로써 표출한 것입니다. 과연 이런 개인적인 심정에서 쓰여진 글에서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이 담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나마나지요. 물론 종교개혁 이후로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해 몹쓸 반감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의 책은 열광적인 필독서가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관점에서 칼빈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와 같은 책을 주요 텍스트로 인용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칼빈을 살인자로 모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세르베투스 사건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본 카페의 1223(자유게시판), '칼빈의 이단정죄 오점으로 남아 -펌글)에 달린 댓글과  1239('세르베투스 비엔나 공판 : 존 칼빈의 관련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참조해 보세요.》하지만 세르베투스 사건 역시 반칼빈주의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왜곡된 측면이 많다는 사실만큼은 지적하고 싶군요. 그리고 칼빈이 생전에 수많은 사람을 고문했고, 목매달아 죽였다는 식의 주장들은 설득조차 불필요함을 느끼는 잔인한 낭설들입니다. 오히려 칼빈은 정적들에 의해서 수차례 암살 당할 뻔 하였습니다. 실제로 칼빈이 제네바에 있을 때에 칼빈의 치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페렝이라는 사람은 칼빈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우리는 칼빈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칼빈의 신학을 말하고 칼빈주의를 언급하지만, 칼빈과 칼빈주의를 우상화하면 안 됩니다. 어느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처럼 칼빈주의를 받아들인다고 하여 칼빈을 교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칼빈과 칼빈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가장 좋은 종교개혁의 선물이 그와 그 사상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칼빈뿐만 아니라 칼빈의 신앙에 공감하는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성경을 가장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거대하고 정밀한 신학적 체계를 선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칼빈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칼빈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칼빈은 누구보다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있게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전 생이 그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칼빈의 생애에 관한 전기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칼빈의 믿음의 동지였으며 칼빈이 섬기던 제네바 교회의 후임자이기도 했던 데오드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쓴 전기를 읽어보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베자 역시 칼빈 못지 않은 훌륭한 종교개혁자였습니다. 그는 무려 16년 동안 칼빈 곁에서 동고동락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열매를 거두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칼빈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 위대한 결과를 남겼습니다. 수많은 설교와 성경 주석,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기독교 강요 증보와 완성이 이 기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칼빈의 생애는 그가 말씀 연구와 기도와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가질 시간조차 없는 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와 영광을 위해 교회 개혁에 전심을 다하였습니다. 칼빈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었던 베자는 칼빈에 대한 마지막 감상을 그가 쓴 칼빈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칼빈의 생활을 16년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더 이상 첨가할 수도, 더 이상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그리고 칼빈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해가 지는 그날, 지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던 가장 큰 빛이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다. 존 칼빈, 그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a minster of the word of God)였다."

 

복음에만 순종님의 궁금함에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님과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께 감히 부탁 한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생애 남은 시간, '황색 언론'과 '황색 신학'에 휘둘리지 말고, 진리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정도(正道)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50문. 세례요한 구절인 눅 7:27~28절에 관한 답변 


복음에만 순종님의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복음에만 순종님께서 올려 주신 질문은 이단들이 성경을 얼마나 왜곡하며, 거짓되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실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만 순종님의 생각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전형적인 견강부회식 성경 해석입니다. 다시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는 악의적이고 불온한 성경 이해입니다. 


하지만 마귀가 휘하에 있는 거짓 무리들을 이용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니고 있으며, 신앙이 있다고는 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여 이들에게 곧잘 유혹당하는 무지하고 유약한 성도들이 넘쳐나는 교회 현실을 직시할 때에, 이 질문은 충분히 반면교사적 가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진리에의 경각심과 분별력을 갖게 한다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사안이라 사려되어, 이미 진합태산님과 켐제이님께서 의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음에도 덧붙여서 몇 자 적습니다. 


복음에만 순종님의 물음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눅 1:15의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라는 표현에서 '큰 자'가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눅 7:28에 언급된 '극히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보다 ‘큰 자’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점과,


둘째, 눅 1:20에서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의심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인가?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항부터 말씀드리지요. 


눅 1:15에 묘사된 '큰 자'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눅 7:28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마 11:11에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는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나 주의 천사가 세례 요한을 가리켜, '큰 자' 혹은 '큰 이'라고 묘사한 데는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세례요한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된 그리스도의 역사적 출현(오심)을 최종적으로 예비하고 확증하는 인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암흑 같은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회복될 하나님의 왕국의 성격과 또한 그 분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선지자요, 선견자'로 불릴만 하였습니다(눅 7:29; 마 21:26, 32). 


2) 세례요한은 그 시대에 누구보다도 성령이 충만한 성도였으며, 진리 앞에 겸손한 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푼 이후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고백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가식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려는 사람들의 유혹을 단호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영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큰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눅 1:15에서는 그를 가리켜, 그냥 '큰 자'라 하지 않고, '주 앞에 큰 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 앞에' 라는 수식어는 그가 '큰 자'로 여김을 받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큰 자'가 된 것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비범함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례 요한의 '큰 자'됨은 오직 주님의 은총이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눅 7:28에서 주님께서 요한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이 말씀에서 '극히 작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은 이단적인 이해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눅 1:15의 '주 앞에 큰 자'라는 표현을 '주와 비교하여 큰 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 하면, 눅 1:32에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저가 큰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라는 증거한 구절만 보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 가브리엘 천서는 요한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주 앞에 큰 자'라는 제한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지극히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크심은 무엇과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며 유일한 성격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 절(33절)을 보세요. 그리스도를 가리켜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합니다. 이러함에도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 보다 '작은 자'로 운운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눅 7:28 본문으로 돌아 와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분명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본 절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작은 자'라고 표현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셨거나, 논리적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구절 안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세례 요한을 '주 앞에 큰 자'로 보십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속한 마지막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를 목격했고, 그 분의 길을 예비했으며, 심지어 그 분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에서 그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도 '탁월하고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었고,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일로서 부름을 받은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현시될 완전한 계시와 하나님 의 나라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시의 판명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다시 오심의 약속을 받은 신약 시대와 그 시대 이후의 성도들보다 '작은 자'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한창 사역을 하고 계실 때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교제를 나눌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님이 참된 메시야인지 아닌지에 대해 당혹스런 의문을 제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겠지만, 계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세례 요한보다 더 복된 사람들입니다. 눅 10:23-24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완성된 계시가 전달된 (성경 기록) 이후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고 깨닫는 성도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임금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큰 복을 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질문 사항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지요. 


사가랴는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자녀를 주시겠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대해 증거를 요구하며 끝내 의심어린 투의 답변을 늘어놓습니다(눅 1:18). 이는 그가 현직 제사장이었음에도 천사의 메시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제사장인 사람 역시 하나님의 사자 천사의 말에 대해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어두운 영적 상황의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어찌되었든 천사는 의심하는 사가랴에게 자신이 전한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을 알리는 동시에, 그것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형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단순한 재앙으로만 보아선 안 됩니다. 비록 사가랴는 불신앙적 태도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육신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영적 축복을 함께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죄에 관하여는 간과하지 아니하시지만, 긍휼히 여길 자에게 무한한 긍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결국 그로하여금 하나님께서 천사로 하여금 전한 메시지가 이루어지기까지 말을 못하고 심지어 들을 수도 없는 처지로 만들었지만, 그는 그 긴 침묵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을 철저하게 고백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다시 말을 하게 하셨을 때에,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서 놀라운 고백(예언)을 하게 됩니다(눅 1:67-80).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님께 한 가지 권면을 드리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님께서 전해 주신 질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이단들의 주장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주의해야 할 대상임에 분병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엡 5:6,7)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이단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받지 않은 이상, 진리를 의도적으로 속이는 사람이나 집단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누구이든간에 성경을 거짓되게 해석하는 일과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일은 변명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죄악이며,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이 참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교훈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짧은 성경 구절이지만 다소 긴 설명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차제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보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 정통 신앙으로 돌아서시길 부탁드립니다. 온전한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의 생명과 성도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는 일에 지혜와 힘을 다하는 생이 되시기를 바라며...





51문. '과거죄 현재죄 미래죄가 사해지는가'에 대한 답변 


포청천(mks0691) 님의 질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과거죄, 현재죄, 미래죄까지 사해진다고 하는데 성경적인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과거죄, 현재죄, 미래죄까지 사해진다”라는 진술에 대해 성경적인 답변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진술만으로는 ‘그렇다’, ‘아니다’를 단정적으로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술은 어떤 신앙 고백적 입장에 근거해서 말하느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진술로만 본다면, 펠라기안이나 알미니안, 심지어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에게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지요. 이 진술은 구원파에 속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정통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 중에 이 진술 자체를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혼돈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인 양비론 혹은 양시론적 답변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근거로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궁금해 하시는 내용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과 정통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은 분명하게 ‘Yes'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모든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히 9:26).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은 모든 사람과 족속과 민족의 죄를 완전히 덮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구원의 근거요, 능력이었습니다(히 9:4).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인해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 그리고 믿기 전(과거)과 믿은 후(현재와 미래)에 지은 모든 죄악들이 깨끗케 되었으며,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 앞에서 흠없는 존재로 신실하게 보존함을 받게 되었습니다(히 7:22, 9:15,17; 롬3:24-25).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는 진술은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성경의 가르침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 진술과 관련해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두 가지 중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첫째,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받는 이들은 누구인가 는 질문에 해당하는 이해입니다. 


첫 번째 물음과 관련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 믿음을 의롭게 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의롭게 하는 믿음은 죄인의 마음 속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은총이다. 즉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사람은 죄와 비참한 처지를 깨달으며,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아무 피조물도 자신을 그의 상실된 처지에서 회복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아, 복음이 말하는 약속이 진리임을 인정(받아들임)할 뿐 아니라,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72문답)


즉 이 믿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그로써 구원받기에 합당한 모든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거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일(칭의)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 일을 자신의 사색과 판단과 경험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이라는 말을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과 주도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 편에서 이 조건을 충족할 때에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예수를 믿어야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과 배치되는 이단적 사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의 모든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빼앗는 행위요,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생각할 때에, 늘 속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쉽게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죄인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인해 정함과 의롭다함과 구원을 얻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과 목적 가운데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 


이것은 도르트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할 때에, 개혁자들은 단호하게 ‘오직 하나님의 택자만을’ 위하여라고 답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으로부터 추론되고 증명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성도)에게 창세전에 그리스도와 맺으신 은혜 언약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거룩한 은혜의 수단(말씀, 성례, 기도)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로써 하나님의 택한 받은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입어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 보편구원론(혹은 만민구원론) 입장에서 “예수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는 진술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잘 생각해 보신다면, 님께서 인용한 진술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대충 감을 잡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말씀 한 가지만 드리고 마치지요. 매번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질문을 대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 안타까움과 회한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는 분들 중에(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좋은 신앙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를 제대로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평생 신앙의 난제로 안고 끙끙대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이런 분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현실의 열악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체험신앙과 신비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와 세속주의의 범람으로 인해 ‘이 보다 더 가벼울 수 없는 교회와 신앙’이 봇물터지듯 하는 괴이한 현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 진리조차 ‘이 보다 더 가벼울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취급되는 현실 속에서 깊고 오묘하고 부요한 진리로서 뿌리 깊은 나무처럼 든든하게 서 가는 성도들이 되어 가십시다!





52문. 존비비어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할렐루야! 

저는 수원에 있는 통합측 장로교회에 다니는 안수 집삽니다.


얼마전 교회의 추천으로 존비비어의 책 (순종, 마귀의 출입구를 차단하라)를 구입 했는데 존비비어의 신앙교리가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찿아보았는데 구원교리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 정도만 찿을 수 있었는데 자세하게 알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조지포스터의 레노바래운동에 대하여도 개혁신앙 입장에서 알고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아실만한 분들이 계실 듯 하여, 저도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데... 감감하니 저라도 아는 대로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존비비어(John Bevere)는 작금에 한국 교회에 유행이 되고 있는 이른바 신사도 운동 혹은 늦은 비 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영성주의자입니다. 항간에는 피터 와그너로부터 신사도 기사로 임명받았다는 소식도 있고요. 기괴한 성령 운동을 펼치는 베니힌과 동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유명 기독교 출판사(아마, '두란노'지요?)에 의해 번역 소개된 덕택에 그의 책들이 늘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습니다. 워낙 달변인데다, 지성과 감성을 터치하는데 탁월한 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특히 젊은 기독인들에게 큰 반향을 얻고 있지요. 


하지만 그의 신학 사상은 잡다한 현대 영성 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직통계시와 사도 직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사도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상당히 공감되는 내용도 있지만 신학적 전제와 고백 자체가 기독교 정통 신앙과 동떨어져 있는 만큼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언급하신 이는 '조지포스터'가 아니라, '리처드 포스터'(Richard J. Foster)입니다. 초교파적 미국제 영성 운동의 대변자이기도 하고, '레노바래' (Renovare)영성 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레노바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창안한 묵상, 성결, 성령, 사회정의, 복음전도, 성육신 등 6가지 영성훈련 방법으로, ‘새롭게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름난 대면 알만한 대형 교회와 유명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선진 교회 갱신 프로그램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기만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노바래' 영성 운동의 신학적 근거는 매우 위험하다 못해 이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종교적, 초교파적, 초신앙적, 초월적인 내용에 관심을 둔데다, 기독교 뉴에이지 운동과 신비적 은사주의 운동의 강조점과 일맥 상통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알파코스, G12, 관상기도(훈련)등도 '레노바래' 운동의 다른 버젼에 불과합니다. 


존비비어와 리처드 포스터는 말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복음을 파괴하는 전형적인 가짜 사도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자들과 그들이 만든 비성경적인 사상을 이 시대 교회를 위한 새로운 대안인양 소개하고, 그런 짓거리로 유명세를 얻으려 몸부림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두려움마저 듭니다. 멋모르고 들여 온 외국산 황소 개구리와 베스가 우리 나라의 생태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듯이,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스러운)같은 이들과 프로그램들이 한국 교회 신앙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목회자치고 성도들에게 이들의 책을 소개하고, 관련 프로그램을 적용함에 있어서 특별히 나쁜 목적을 가진 이가 있겠습니까? 나름 성도와 교회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순수한(?) 바람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집을 짓는데 아무리 좋은 설계도와 흡족한 복안을 가졌다손치더라도, 질나쁜 자재와 망가진 도구로 집을 짓는다면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수 백 년을 바라보고 건물을 짓는 匠人의 정신이 진리 안에서 살며, 진리와 더불어 세워지는 성도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53문. '이단에도 진리가 있나요'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복음에만 순종>님의 질문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곳에서도 진리가 나올 수 있는 건가요?

우리가 들어보고 진리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만 골라서 우리가 듣고, 새기는게 바른 신앙관인지 알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성경으로 풀어나가면 좋겠지만, 저희같이 평신도들은 신학을 모르기에 주석과 인터넷 성경 사전을 볼 때도 많은데, 이것 또한 위험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던데, 휴~ 어렵네요^^


답변 드립니다. 


이단이라 하여도 좋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늘 부분 복음, 부분 진리에 대해 경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는 '처음 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된 것이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통(通) 진리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은 언제나 성경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부분적으로 끄집어냅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대단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거짓과 속임의 악한 영이 배후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밀한 신학 지식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면, 이단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도 디도에게 '이단에 속한 사람에게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권면하였습니다. 


이단의 실체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치열하고 치명적인 영적 싸움인 지 모릅니다. 이단과 싸우려면(이단의 내용을 반박하거나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을 잘 활용하는 기술과 담대함을 키워야 합니다. 


님이 알고 있는 곳이 확실한 이단이라면 가까이 하기 보다는 바른 교회와 목회자와 더불어 성경을 올바르게 아는 일에 더욱 착념하십시오. 그리고 평신도(저는 이 표현을 별로 좋아 하지 않습니다만)라고 한탄하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을 옳게 분변하기 위해서라도 바른 신학을 정립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라는 권면과 도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경과 신학을 바르게 알아가는 일은 비단 목회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소중한 사명이며, 성도로서의 책임입니다. 힘을 내세요!^^ 





54문. 추도예배에 관한 답변 


jalovemh 님의 질문 

 

추도예배의 성경적 관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저희 집안은 안 믿는 집안이었는데(저만 빼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부분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형님을 설득하여 아버지 기일날 제사가 아닌 추도예배로 드리고자 하였는데, 제사가 아닌 추도예배라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을 감사해야할지 아니면, 추도예배 자체도 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답변 드립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성경적인 개혁을 부단히 추구해 가야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예배에 관한 개혁은 정말 시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로 드리는 답변이니만큼 되도록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성경적으로 볼 때, 추도예배 혹은 추모예배란 말 자체가 어폐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추도'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함'이고 '추모'란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절한다'는 성경적인 예배의 정의로도 예배와 관련해서 '추도'와 '추모' 란 표현을 사용하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을 기리거나 흠모하거나 높이는 예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구사님 답변처럼 추도 예배를 부모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런 형식이나 행사에 굳이 '예배'라는 말을 끼워서 사용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추도식 혹은 추모식이라고 하는 것이 상식적인 표현입니다. 


기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는 예배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데나 예배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열린 예배', '기념 예배', '은사 예배', '치유 예배', '사이버 예배', '찬양 예배', '무슨 무슨 감사 예배', '성전 건축 예배', 결혼 예배', '개업 예배', '돐, 백일, 칠순 (잔치) 예배' 등등... 온갖 단어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고 그것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예배'라는 말을 붙였다고 다 '바른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예배라는 용어는 기독교적 문화가 변형된 토착화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배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대개 '교회 정치'에 대한 잘못된 오해나 적용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예배와 교회 정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정치를 '몸'에, 예배(의 내용)을 '영혼'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와 교회정치의 성경적 개혁을 교회 개혁의 시작과 마지막 내용으로 보고 부단한 개혁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혁자들은 예배 모범을 신앙고백서의 한 형태로 채택하여 모든 공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이 예배 모범을 통해서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안에 있는 예배 모범에는 예배의 대상과 방식과 자세와 시간과 장소 등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혁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역사적 신앙고백서들 역시 성경적인 예배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사람이 만든 '자의적 예배'를 지양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예배는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창주주'시요, '구속주'시요, '심판주'로 인식하는 주의 백성들이 주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사모하며 경외하며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배에 참여할 때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짐작컨데, 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 중에도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여길 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저런 예배에 별다른 고민없이 참석한 분은 고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정서와 거슬리지 않고, 또 토착화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참된 성도라면 '예'와 '아니오'를 구별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예배나 주일 예배(주일에 드리는 감사예배)이외에 예배에 다른 말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정 예배는 한 가지 예외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 교회를 이루는 기초라는 의미에서 (공예배와 구별된) 가정 예배라는 말은 사용 가능합니다. 


아무튼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진 행사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도를 비롯해서 장례나 결혼이나 여타의 행사는 그냥 '~식'이라는 말로 하고 그 가운데 말씀이나 기도나 찬양의 시간을 갖는 것은 무방합니다. 


추도식과 관련해서 한 말씀만 덧붙이자면, 죽은 사람 앞에서 제상을 차리거나 묵념이나 무릎 꿇는 것이나 헌화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불신자로)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비성경적입니다. 요즘 백주년교회인가 하는 교회의 담임 목사께서 죽은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 줄 수 있다고 해서 말들이 많은데, 이것은 성경과 명백하게 배치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이즘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이왕에 모든 가족이 추도 모임에 모일 기회가 된다면, 간단하게 가정 예배를 드리든지 아니면 신앙에 대해서 유익한 덕담을 나누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합니다. 구사님 견해처럼 이 시간에 목회자를 초청하여 성경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안이겠다 싶습니다. 가족들 중에 불신자가 있다면 이 일을 계기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미리 주의 은혜와 지혜를 구하는 일을 잊지 마시고요. 


한 말씀 더... 왼쪽 목록 중에서 <2차 공개강좌> 코너의 '교회개론(7) '교회개혁의 시작과 마지막으로서의 예배' 라는 자료를 살펴보세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55문. 예배 찬송에 관한 답변 


tmhboy 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늘 좋은 글들을 읽기만 하다가 이렇게 글을 남기려니 살짝 떨리기도 하네요. 

저는 강원도 속초의 합동측 교회에 출석하는 한 청년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과 화요일 저희 교회에서 정기노회가 열립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새 찬송가를 사용하지는 않기에 순서에 들어가는 악보 파워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순서지를 보다가 그동안 앓던 것들이 드디어 터져버렸습니다.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것입니다. 찬송이 620장 '이 믿음 더욱 굳세라'와 420장 '너 성결키 위해'인데, 이것이 예배 찬송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식이 없고 단순하여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닌지 싶지만, 위의 두 곡에서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시원스레 노래하는 찬송시는 없는 듯 합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의 한 노회가 정기 노회를 열면서 하는 예배의 찬송으로 저 두 곡이 과연 적합한가요? 


솔직한 저의 생각은 620장의 경우, 하나님을 높이기보다는 단합을 꾀하고 그 모임 가운데 주님께서 당연히 함께 하신다는 묘한 암시를 나타내는 찬송인듯 하며 420장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라는 설교의 주제에 맞춘 찬송이긴 하지만 그 찬송시의 내용들이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중심에서의 접근인 듯하여 고민스럽습니다. 


여러모로 미숙하여 혼돈 가운데 있는 저에게 신앙의 선배님들의 조언을 구합니다.


저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세요. 정말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은 외로운 심부름꾼이랍니다. 


사랑하는 주의 청년에게...


님의 고민이 남 일 같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귀한 물음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회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이고, 그 일이 형제님에게 요구된 것이라면 지금으로서는 순응하는 것이 최선이라 보여 집니다. 노회 목사님들이 형제님의 지적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또 형제님 역시 그 일에 대해 성경적 반론과 개혁의 성격을 현저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원치 않는 감정과 오해로 본말이 전도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노회 목사님들이 찬송에 대해서 좀 더 명료한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노회 자체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찬송가 한 두 곡을 순서지에 넣을까, 말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 전반적으로 (교단, 교파를 떠나서) 예배 찬송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이 부족한 때문이고, 찬송에 대한 역사적 개혁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 인식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찬송 형태는 그 자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습니다. 곧 이로 인해 예배 자체가 큰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문제에 대해서 정당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개혁의 시작입니다. 


어쩌면 노회 목사님들보다 형제님은 이러한 교회 개혁의 출발점에 약간 앞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 개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개혁의 출발은 자기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부단한 배움과 확신과 인내가 요청됩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형태로의 개혁은 늘 또다른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야기한대로 형제님이 지적한 두 곡은 예배 찬송에 적합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예배 중에 부르는 일은 개혁의 대상이 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개혁은 무조건 안 된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과 대안이 함께 주어져야 합니다. 


두 곡을 순서지에 넣지 않는다고해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부의 권위에 순종하여 하는 일이지만, 그러한 과정에서도 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을 염두하며, 진리 가운데 굳게 서는 기회로 삼는다면 보다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위의 어부님의 권면처럼, 이 카페에 올려져 있는 찬송과 시편 찬송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잘 살펴보길 바랍니다. 우선 큰 틀에서 찬송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안목을 갖게 되면, 찬송 분류와 채택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 역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고 해결방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님에게 주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56문. 입신에 대한 답변 


착한사랑 님의 질문

요즘 어느 큰 교회에서 입신을 통해 청년부의 부흥을 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입신(쓰러짐)을 경험케하며 그것에 대해 성령의 체험으로 이야기하며...

또 굳이 입신이 안일어나도 상관없다. 그러나 하면 좋다...는 식으로 애매모하게 말을 하더라구요. 

이런 입신을 성령의 체험이라고 말하는 그들이 말하는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개혁주의 입장에서 입신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잘 설명을 하지 못하겠네요. 


이 입신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정리해 주시면 안될까요? 


답변 드립니다.


말씀하시는 모 큰 교회(변 모 목사 담임)가 제가 알고 있는 교회가 맞다면, 이단 중에서도 심각한 이단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보수 교단 총회에서도 하나같이 이단 판정이나 접근 금지 요청을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물밀듯 모여든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주장이나 행하는 모습은 전혀 새로운 일들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성경 진리를 훼파하려는 자들에 의해서 늘 주도되어 왔고, 지금도 거짓된 교회들을 통해서 증거되는 일들입니다. 입신이 성령의 체험이라는 근거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는데요, 입신을 말하는 개혁주의는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개혁주의 신학에 능통한 분이 아니라면, 괜한 관심을 갖지 마세요. 


워낙 성경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궤계에 능하다 보니, 웬만해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내용을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신학이나 논리나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자기 체험'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화 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아집을 채워주지 않는 신학과 신앙은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며, 모두가 단 칼에 죽여 없어져야 할 원수입니다. 


어떤 연고로 관심을 가지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올바른 성경 이해와 신학적 지식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본 카페에 그 교회와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극단적인 은사주의에 관한 비평 자료들도 있습니다. 또 개혁주의적 관점에서의 성령론에 관해서도 여러 자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나시는대로, 꼼꼼히 살펴보시다보면 궁금증도 해소되고 더 굳은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님에게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57문. 아사셀의 염소와 관련된 질문입니다. 


속죄일 때 이스라엘 회중의 속죄제물로 여호와를 위한 염소하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 두마리를 바쳤는데요. 이 두마리 염소의 제물이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아사셀"을 광야귀신, 즉 사탄이라고 믿었다고 하던데요...

즉 이스라엘 회중의 죄를 염소에게 지우고 광야로 보내 사탄에게 피값을 치루고 죄를 없앤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아사셀이 사탄을 의미하는 거라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도 제물을 바치게 하셨다는 거잖습니까? 십자가 대속제물로서의 예수님이 속죄일의 두 염소을 뜻한다면 예수님께서 아사셀에게 바쳐진 염소 즉 사탄에게도 배상을 하셨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십자가 대속으로 한편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로써 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는다는 의미고 사탄에게 바치는 제물로써 죄 자체를 없애서 완전한 구원을 이룬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게 아닌가 싶은데요.


사탄배상설이 왜 비성경적인지 검색해봐도 "사탄은 범법자라서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라는 내용만 있고 아사셀의 염소와 연관지어서 해석한 글은 찾을 수가 없어서 질문드립니다.



질문의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ryun0421 님의 설명은 다락방 이단측의 '사단배상설'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잘 아시듯이 다락방 측의 '사단배상설'은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배상하기 위해 사단에게 보상을 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그 근거로서 이 본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질문의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ryun0421 님의 설명은 다락방 이단측의 '사단배상설'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잘 아시듯이 다락방 측의 '사단배상설'은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배상하기 위해 사단에게 보상을 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그 근거로서 이 본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아사셀에게 보내진 염소'를 그리스도롤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염소가 광야로 간' 이유가 사단에게 바쳐지기 위함이라는 주장은 본문 그 어디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 시대에도 오리겐과 같은 교부에 의해 유대 전승에 따른 속죄이론으로 제기되었습니다만 곧 정통 교부들에 의해 반박, 폐기되었습니다. 위의 소개해 드린 어떤 견해를 대입하여 설명한다고 해도 핵심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그 죄짐을 지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광야로 끌려간 아사셀의 염소 역시 모든 죄를 홀로 담당하고 성문 밖 골고다로 향하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사탄배상설'의 견해를 유추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기본 원리인 '적정과 절도의 원칙', 즉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데서 서는 이해'를 변형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파심에 카페지기로서 한 말씀만 더 드립니다. 

이것은 질문을 하신 분에게만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곳에 출입하는 모든 분들께 드리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상식적으로 '사탄배상설'과 같은 주장이 현저하게 이단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의문을 더하기 위해서나 저를 시험하기 위하여 하는 미끼성(?) 질문이라면 앞으로는 정중히 사절합니다. 





58문. 웨슬리안에 대한 답변 


ryun0421 님의 질문 


제가 교리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첨으로 가입한 기독교 카페가 감리교 카페였습니다...지금은 탈퇴를 했습니다.  카페매니저님이 이단과 싸우는 분인데 넷상에서는 아주 유명한분인거 같습니다.


그곳에서 성경과 교리 이단에 대해 많은걸 알게 되어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죠.  장로교나 감리교나 교리는 좀 달라도 실지로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들어보면 다 같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제가 R.C 스프룰 교수님의 '알기쉬운 예정론', '자유의지와 믿음' 을 읽고나서 예정론이 진리란 생각을 갖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됐단 말이죠... 


그 카페에서 알미니안과 웨슬레안은 다르다면서 올려놓은 글도 보고 이리저리 웨슬레안에 대한 글도 찾아 읽어봤는데 알마니안이나 웨슬레안이나 그게 그거인거 같고 자꾸만 웨슬라안이 이단이란 생각이 강해지는 겁니다.


정작 장로교나 감리교는 예정론 때문에 서로가 이단이면서 누구보고 이단이라 하느냐는 글이 왠지 수긍이 가더라구요...


이단정죄 문제에 있어서 이단의 교리는 정통과 "틀리다"라고 하면서 왜 예정론인 장로교와 반예정론인 감리교의 교리는 단지 "다른"것이 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ryun0421 님의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답신이 조금 늦었습니다. 우선 순위 사역에 의해 약간 지체되었음을 양해바랍니다.  


감리교 교리 입장에서 본다면 R.C 스풀론 교수님의 예정론과 관련된 의견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정통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와의 신학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요즘같이 신학과 교리의 변별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에는 개신교 내의 교파들 간의 신학적 차이와 갈등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만,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기원에 있어서부터 신학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웨슬레를 ‘감리교’의 창시자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만큼 웨슬리가 ‘감리교’ 형성에 끼친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감리교’의 영어식 표현인 ‘Methodist’ 라는 말은 웨슬리가 그의 동생 찰스와 몇 친구들과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에 조직했던 ‘신성클럽’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말은 엄격한 청교도식의 경건 생활을 위해 매우 까다로운 규칙을 준수하고 서로 감독하는 것을 보고서 ‘지독한 규칙주의자’ 혹은 ‘열정적 조직주의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감리교의 시초가 되었던 ‘신성클럽’도 스스로 착안한 것이 아니라, 경건주의자 ‘슈페너’의 ‘경건학당’이라고 불리는 조직을 본따서 만든 것이고, 나중에 이 협회의 구분 방식에 따라서 조직을 구성하게 된 것이 오늘날 ‘감리교회’의 정치 제도로 자리잡히게 된 것입니다.


웨슬레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그가 처해 있던 영국 교회 상황과 그의 신학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8세기 초기 영국에서는 한, 두 세기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의 불길이 거의 소멸해 가고 있었습니다. 상층 계급에서는 이신론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신학이 새로운 유행처럼 교회 안에 퍼져나갔고, 영국 국교회(‘고교회’라고도 부름)의 강단에서는 활력없는 고백주의적 도덕 담론만 되뇌여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타락을 일삼았고, 일반인들은 신종 오락과 유흥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웨슬레가 보기에 그들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열매가 전혀 없는 죽은 믿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청교도적인 도덕생활과 거룩함에서 떠나 있는 삶이었습니다. 


웨슬레는 자연스럽게 부패하고 불경한 삶으로부터 신앙의 새로운 각성과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의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목적에서 대학교에서 신성클럽 활동에 전념하던 중에, 동생 찰스와 함께 미국 개척지(조지아주) 선교사로 자원하여 떠납니다. 


배를 타고 죠지아로 가던 도중에 웨슬리 형제는 일생일대의 큰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폭풍에 파선 직전의 배 안에서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는 모라비아파 선교사들을 보면서 영적으로 큰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되지요. 


모라비아파는 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kolaus Von Zinzendorf)이란느 사람에 의해서 설립된 경건주의 신앙 단체인데, 광신적 혹은 급진적 경건주의와는 달리 복음적인 신앙지상주의(antinominan)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많은 부분에서 정통 개혁주의의 신학 노선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주관적 묵상과 감상적 확신, 십자가와 고난과 관련된 신비적 체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만남과 계시 등을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리는 2년간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모라비아파인 ‘헤른후트주의’(Herrnhutism)와 깊은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의지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기초를 이룬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웨슬레의 감리교적 각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1738년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면서부터였습니다. 웨슬레는 루터의 <로마서주석>을 낭독하다가 심령의 뜨거운 변화를 경험하였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진정 믿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생 찰스도 이와 비슷한 회심을 체험하였습니다. 


회심 이후,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는 웨슬레 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친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행을 구원을 위한 예비 조건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영국 국교회의 가르침으로는 완전한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후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죄용서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에 대한 즉각적이고 의심없는 확신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체험으로 여기고 이 내용을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레의 초기 설교사역은 상당히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친숙한 상류층 사람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엄청난 공감과 감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웨슬리는 여세를 몰아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야외 대중 집회와 수십만 마일의 전도 여행을 강행하였습니다. 1739년에 처음으로 수천명 앞에서 행해진 야외설교를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습니다. 


이 때,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가 웨슬리의 초청을 받고서 그의 야외 설교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조는 얼마 가지 못한 채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보편적 은혜를 선포하는 동시에 신적 유기(reprobation) 사상을 전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이트필드는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에 따르는 이중 예정주의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분열 이후에 웨슬레는 전적으로 아르미니안의 신학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저서에 깊은 감명을 받고서 수년간 <아르미니안>이라는 책자를 편집했습니다. 이렇게 아르미니안 신학의 기반 위에서 웨슬리는 자신 만의 독특한 신학을 구성해 갔습니다. 


‘선행적 은총 교리’와 ‘완전 성화론’이 그것입니다. ‘선행적 은총’이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무능한 인간을 고쳐 주심으로써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교리입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처럼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인간 의지(행위)로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그는 결국 행위가 칭의에 대한 필요조건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아르미니안의 주장과 거의 동일합니다. 


두 번째, 웨슬리는 ‘완전 성화론’을 주창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이란 절대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완전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화론의 핵심은 인간의 의지를 선하게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웨슬리가 인간의 자력적인 의지로서의 완전만을 강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지를 중용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약간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적 입장을 한 단계 성숙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성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으며, 성령의 사역에 의해 수행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점은 고전적 아르미니안의 주장보다는 복음주의적 색채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웨슬리의 완전 성화론은 영국 교회뿐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와 사회 안에 신선한 충격과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금주(禁酒)와 노예제도 폐지 등의 사회적 도덕주의 운동에 종교적 추진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웨슬리 신학에 대해 조심스런 평가를 답변의 결론으로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웨슬리 신학은 절충적, 혼합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웨슬리는 다양한 개신교 종파(청교도주의, 경건주의, 영국 국교회주의, 아르미니안주의 등등)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학 배경을 감안할 때, 그의 신학이 오늘날 복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내용입니다. 그중에서도 아르미니안주의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웨슬리 신학은 역사적 개혁주의와는 확연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둘째, 웨슬리 신학은 적극적 행동주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신학과 교리의 엄밀함보다는 믿음과 성결의 생활을 위한 성화론적 관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신학의 출발점은 신학적인 탐구나 교리적 논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삶의 불일치가 성행했던 당시 교회의 부패상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는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믿음과 행위의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생동력있는 전도와 사회 복음주의 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점은 칭찬받을만하나, 그 신학적 방향과 결과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관점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셋째, 웨슬리 신학은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지지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의 상당 부분은 정통 교회의 강조점과 일맥상통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구원론에 있어서는 행위가 칭의와 구원의 필요조건임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펠라기안적 만인구원설에 동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온건한 복음주의(신칼빈주의)와 수정 칼빈주의(웨슬리안 칼빈주의)는 다양한 장점을 내포하고 있는 웨슬리 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세계 교회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성격의 신학과 교회와는 궤를 달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정통 개혁주의의 예정론을 배격합니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예정론은 행위를 동반한 믿음에 의한 구원에 모순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은총으로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택이나 신적 작정에 의한 구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신학적인 정밀성에서 유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인식과 막연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정통 개혁주의와 견해차이가 있다고해서 웨슬리안을 이단으로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태도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다양한 웨슬리 신학의 파편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은 동의하더라도 복음주의를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작금의 복음주의가 그러하듯이 웨슬리 신학에는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내재해 있습니다. 성경과 신학의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 안에 감추인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개선해 감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펠라기안주의'와 '아르니미안주의'와 '웨슬리안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개혁신앙이 안고 있는 과제인 동시에 목표입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59문. 이상한 성경 해석 메일에 관한 답변 


복음에만 순종님께...

개인적인 사정으로 답변이 좀 늦어진 점에 대해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본격적으로 답변을 드리기에 앞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드려야겠습니다. 근래 들어 연구회 카페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이멜, 쪽지, 그리고 전화로 문의를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인 관심과 사정에 따라서 질문 내용과 사연 역시 다채롭습니다. 그런데 게중에 제가 가장 곤혹스럽게 여겨지는 질문 양태가 있는데, 아쉽게도 님의 물음이 그렇습니다. 불분명한 의도, 불명확한 출처, 단답형 물음과 강요조의 어투... 나중에 님이 단 댓글을 통해서 질문 의도를 파악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해할 뻔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모두가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질문과 답을 나누면 좋겠다는 일반론적인 생각에서 드린 말씀이니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님이 받았다는 메일 내용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면이 많습니다. 이 글의 출처를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이 글을 쓴 이가 이단과 연관되어 있다고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글 내용으로만 본다면 한국의 여느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전하는 복음 전도 메시지라고 해도 믿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어느 이단의 교묘한 위장글이라고 해도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님이 직접 언급한 <신천지>라는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복음을 왜곡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반 성도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떡밥용(?) 복음을 던지는 이단들의 습성을 생각해 보면, 이(메일)보다 더 복음적인 내용이라도 그들에게서 나오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만으로 이단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리일 뿐 아니라, (만약 이 글이 이단에 속한 이가 보낸 것이라면) 자칫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여 그들이 기대하는 효과에 부응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출처와 글쓴이를 확증할만한 증거가 없는 이상, 깊이 있는 분석과 논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글과 관련해서 님이 지적하신 두어가지 의구심을 해소시켜 드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소회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글에 대해 님이 가장 주목하여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이 글쓴이의 성경 풀이(해석)의 방법론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보기에 매우 도식적이고 작의적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요 3:5에 언급된 ‘물’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든지, 마 7:21의 ‘내 아버지의 뜻’을 구체적인 설명없이 요 6:28-29의 본문과 연결시켜서 해석한다든지, 눅 6:43-49에 있는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에 대한 유추적 해석은 이단들이 즐겨하는 풍유적 비유 해석이라는 오해를 살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 같이 이 내용만으로 글쓴이를 ‘이단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정죄는 글쓴이가 확실하게 이단으로 판명되고 난 후에 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류의 성격 해석과 이해는 오늘날 일반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쉽게 접하게 되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 글을 바르게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글에 인용된 성경 구절 하나 하나를 지적하는 것보다는 이 글의 전체적인 의도를 파악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다면 이 글은 개혁주의적 신학을 가진 이가 쓴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신앙)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 같아 보입니다. 인용된 성경 구절도 천편일률적으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되는 관련 성경 구절들을 나열하고 있는 전형적인 주제 메시지(설교?)의 한 형태로 보여집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성경 이해와 기술(전개)은 님이 지적한대로 행위구원론주의자이든지 혹은 펠라기안주의나 아르미니안에 속한 이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이미 설정하여 놓은 주제나 의도를 증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련 성경 구절을 늘어놓은 식의 성경 해석은 이단적 교회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라 자처하는 많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친숙한 방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글쓴이는 성경 해석의 기본조차 잘 모르는 이 같아 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성경 해석의 기본이란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구절)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성경 구절은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 구절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는 데만 급급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되는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쓴이가 인용한 성경 구절 중에서 한 가지 내용만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의 생각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쓴이는 행위적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아는 마 7:16-21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이 구절 속에서 특히 ‘열매’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내용을 끄집어 내어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본문과 주장이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본문 자체의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견강부회식 인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목적에서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이유에서 주신 말씀입니다(마 7:15). 본문은 눅 6:43-44과도 평행을 이루는데 두 곳 모두 거짓 선지자의 행태를 지적하고 성도에게 주의를 요청하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 7:15절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주의를 요청하는 말씀이라면, 16절은 거짓 선지자들을 판별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7, 18절은 거짓 선지자들의 행동과 관련해서 근본적인 원리를 비유적으로(긍정, 부정의 방식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부분이고요. 19절에서는 심판의 현실과 20절에서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거짓 선지자들의 판별 원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진술 가운데 핵심적인 단어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 열매는 ‘우리가 열심히 믿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의 열매’를 맺는 일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할만한) 겉으로 보이는 열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경고와 그러한 현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에 대한 강조의 말씀입니다. 


그 다음 절(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라고 하는 내용도 실제로는 진실성이 결여된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 23절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말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내어쫓고 많은 권능도 행하였습니다. 행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모습으로만 평가해 본다면 아주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은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로 열심을 내거나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복음을 전하거나 이적을 행하는 등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무조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본문의 참 의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님이 한 가지 더 지적하신 그리스도의 중심의 본문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 주제이라는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어떠한 구절 속에서도 무조건 그리스도를 찾아내어 설명해야 한다고 하면 잘못된 주장입니다. <다락방 >였나요? 이런 식으로 억지로 성경 해석을 하는 이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본문의 의도와 상관없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주제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적 복음과 설교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분들의 성경 강해와 설교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 글로만 봐서는 글쓴이가 성경 구절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려 했는지, 모든 성경을 억지로 그리스도에게 맞추려고 했는지 여부를 판가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인용한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이 위에 설명드린 것 같이 본문에 대한 신중한 사려없이 그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충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말하는 이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경 해석과 성경 인용에 대해서 성경적인 구분과 안목이 없거나 주관적인 체험과 과도한 자기 확신에 몰입해 있는 사람의 경우, 이러한 우(愚)를 자주 범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글도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곧 성경을 이해하는 관(觀)입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바른 신학의 절실함을 깨닫고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며 참 진리 안에서 부요롭고 자유한 생을 사시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갈무리하겠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님이 직접 언급한 <신천지>라는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복음을 왜곡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반 성도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떡밥용(?) 복음을 던지는 이단들의 습성을 생각해 보면, 이(메일)보다 더 복음적인 내용이라도 그들에게서 나오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만으로 이단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리일 뿐 아니라, (만약 이 글이 이단에 속한 이가 보낸 것이라면) 자칫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여 그들이 기대하는 효과에 부응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출처와 글쓴이를 확증할만한 증거가 없는 이상, 깊이 있는 분석과 논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글과 관련해서 님이 지적하신 두어가지 의구심을 해소시켜 드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소회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글에 대해 님이 가장 주목하여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이 글쓴이의 성경 풀이(해석)의 방법론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보기에 매우 도식적이고 작의적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요 3:5에 언급된 ‘물’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든지, 마 7:21의 ‘내 아버지의 뜻’을 구체적인 설명없이 요 6:28-29의 본문과 연결시켜서 해석한다든지, 눅 6:43-49에 있는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에 대한 유추적 해석은 이단들이 즐겨하는 풍유적 비유 해석이라는 오해를 살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 같이 이 내용만으로 글쓴이를 ‘이단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정죄는 글쓴이가 확실하게 이단으로 판명되고 난 후에 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류의 성격 해석과 이해는 오늘날 일반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쉽게 접하게 되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 글을 바르게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글에 인용된 성경 구절 하나 하나를 지적하는 것보다는 이 글의 전체적인 의도를 파악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다면 이 글은 개혁주의적 신학을 가진 이가 쓴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신앙)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 같아 보입니다. 인용된 성경 구절도 천편일률적으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되는 관련 성경 구절들을 나열하고 있는 전형적인 주제 메시지(설교?)의 한 형태로 보여집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성경 이해와 기술(전개)은 님이 지적한대로 행위구원론주의자이든지 혹은 펠라기안주의나 아르미니안에 속한 이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이미 설정하여 놓은 주제나 의도를 증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련 성경 구절을 늘어놓은 식의 성경 해석은 이단적 교회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라 자처하는 많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친숙한 방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글쓴이는 성경 해석의 기본조차 잘 모르는 이 같아 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성경 해석의 기본이란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구절)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성경 구절은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 구절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는 데만 급급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되는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쓴이가 인용한 성경 구절 중에서 한 가지 내용만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의 생각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쓴이는 행위적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아는 마 7:16-21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이 구절 속에서 특히 ‘열매’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내용을 끄집어 내어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본문과 주장이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본문 자체의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견강부회식 인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목적에서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이유에서 주신 말씀입니다(마 7:15). 본문은 눅 6:43-44과도 평행을 이루는데 두 곳 모두 거짓 선지자의 행태를 지적하고 성도에게 주의를 요청하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 7:15절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주의를 요청하는 말씀이라면, 16절은 거짓 선지자들을 판별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7, 18절은 거짓 선지자들의 행동과 관련해서 근본적인 원리를 비유적으로(긍정, 부정의 방식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부분이고요. 19절에서는 심판의 현실과 20절에서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거짓 선지자들의 판별 원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진술 가운데 핵심적인 단어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 열매는 ‘우리가 열심히 믿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의 열매’를 맺는 일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할만한) 겉으로 보이는 열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경고와 그러한 현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에 대한 강조의 말씀입니다. 


그 다음 절(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라고 하는 내용도 실제로는 진실성이 결여된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 23절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말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내어쫓고 많은 권능도 행하였습니다. 행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모습으로만 평가해 본다면 아주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은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로 열심을 내거나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복음을 전하거나 이적을 행하는 등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무조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본문의 참 의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님이 한 가지 더 지적하신 그리스도의 중심의 본문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 주제이라는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어떠한 구절 속에서도 무조건 그리스도를 찾아내어 설명해야 한다고 하면 잘못된 주장입니다. <다락방 >였나요? 이런 식으로 억지로 성경 해석을 하는 이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본문의 의도와 상관없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주제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적 복음과 설교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분들의 성경 강해와 설교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 글로만 봐서는 글쓴이가 성경 구절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려 했는지, 모든 성경을 억지로 그리스도에게 맞추려고 했는지 여부를 판가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인용한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이 위에 설명드린 것 같이 본문에 대한 신중한 사려없이 그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충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말하는 이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경 해석과 성경 인용에 대해서 성경적인 구분과 안목이 없거나 주관적인 체험과 과도한 자기 확신에 몰입해 있는 사람의 경우, 이러한 우(愚)를 자주 범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글도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곧 성경을 이해하는 관(觀)입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바른 신학의 절실함을 깨닫고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며 참 진리 안에서 부요롭고 자유한 생을 사시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갈무리하겠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60문. '웨슬리안이 이단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ryun0421(kangu3683)】님의 질문


제가 교리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첨으로 가입한 기독교 카페가 감리교 카페였습니다...지금은 탈퇴를 했습니다.


카페매니저님이 이단과 싸우는 분인데 넷상에서는 아주 유명한분인거 같습니다.그곳에서 성경과 교리 이단에 대해 많은걸 알게 되어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죠. 


장로교나 감리교나 교리는 좀 달라도 실지로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들어보면 다 같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제가 R.C 스프룰 교수님의 '알기쉬운 예정론', '자유의지와 믿음' 을 읽고나서 예정론이 진리란 생각을 갖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됐단 말이죠... 


그 카페에서 알미니안과 웨슬레안은 다르다면서 올려놓은 글도 보고 이리저리 웨슬레안에 대한 글도 찾아 읽어봤는데 알마니안이나 웨슬레안이나 그게 그거인거 같고 자꾸만 웨슬라안이 이단이란 생각이 강해지는 겁니다.


정작 장로교나 감리교는 예정론 때문에 서로가 이단이면서 누구보고 이단이라 하느냐는 글이 왠지 수긍이 가더라구요...


이단정죄 문제에 있어서 이단의 교리는 정통과 "틀리다"라고 하면서 왜 예정론인 장로교와 반예정론인 감리교의 교리는 단지 "다른"것이 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ryun0421 님의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답신이 조금 늦었습니다. 우선 순위 사역에 의해 약간 지체되었음을 양해바랍니다.  


감리교 교리 입장에서 본다면 R.C 스풀론 교수님의 예정론과 관련된 의견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정통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와의 신학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요즘같이 신학과 교리의 변별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에는 개신교 내의 교파들 간의 신학적 차이와 갈등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만,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기원에 있어서부터 신학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웨슬레를 ‘감리교’의 창시자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만큼 웨슬리가 ‘감리교’ 형성에 끼친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감리교’의 영어식 표현인 ‘Methodist’ 라는 말은 웨슬리가 그의 동생 찰스와 몇 친구들과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에 조직했던 ‘신성클럽’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말은 엄격한 청교도식의 경건 생활을 위해 매우 까다로운 규칙을 준수하고 서로 감독하는 것을 보고서 ‘지독한 규칙주의자’ 혹은 ‘열정적 조직주의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감리교의 시초가 되었던 ‘신성클럽’도 스스로 착안한 것이 아니라, 경건주의자 ‘슈페너’의 ‘경건학당’이라고 불리는 조직을 본따서 만든 것이고, 나중에 이 협회의 구분 방식에 따라서 조직을 구성하게 된 것이 오늘날 ‘감리교회’의 정치 제도로 자리잡히게 된 것입니다.


웨슬레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그가 처해 있던 영국 교회 상황과 그의 신학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8세기 초기 영국에서는 한, 두 세기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의 불길이 거의 소멸해 가고 있었습니다. 상층 계급에서는 이신론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신학이 새로운 유행처럼 교회 안에 퍼져나갔고, 영국 국교회(‘고교회’라고도 부름)의 강단에서는 활력없는 고백주의적 도덕 담론만 되뇌여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타락을 일삼았고, 일반인들은 신종 오락과 유흥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웨슬레가 보기에 그들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열매가 전혀 없는 죽은 믿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청교도적인 도덕생활과 거룩함에서 떠나 있는 삶이었습니다. 


웨슬레는 자연스럽게 부패하고 불경한 삶으로부터 신앙의 새로운 각성과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의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목적에서 대학교에서 신성클럽 활동에 전념하던 중에, 동생 찰스와 함께 미국 개척지(조지아주) 선교사로 자원하여 떠납니다. 배를 타고 죠지아로 가던 도중에 웨슬리 형제는 일생일대의 큰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폭풍에 파선 직전의 배 안에서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는 모라비아파 선교사들을 보면서 영적으로 큰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되지요. 모라비아파는 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kolaus Von Zinzendorf)이란느 사람에 의해서 설립된 경건주의 신앙 단체인데, 광신적 혹은 급진적 경건주의와는 달리 복음적인 신앙지상주의(antinominan)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많은 부분에서 정통 개혁주의의 신학 노선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주관적 묵상과 감상적 확신, 십자가와 고난과 관련된 신비적 체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만남과 계시 등을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리는 2년간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모라비아파인 ‘헤른후트주의’(Herrnhutism)와 깊은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의지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기초를 이룬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웨슬레의 감리교적 각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1738년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면서부터였습니다. 웨슬레는 루터의 <로마서주석>을 낭독하다가 심령의 뜨거운 변화를 경험하였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진정 믿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생 찰스도 이와 비슷한 회심을 체험하였습니다. 회심 이후,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는 웨슬레 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친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행을 구원을 위한 예비 조건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영국 국교회의 가르침으로는 완전한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후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죄용서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에 대한 즉각적이고 의심없는 확신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체험으로 여기고 이 내용을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레의 초기 설교사역은 상당히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친숙한 상류층 사람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엄청난 공감과 감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웨슬리는 여세를 몰아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야외 대중 집회와 수십만 마일의 전도 여행을 강행하였습니다. 1739년에 처음으로 수천명 앞에서 행해진 야외설교를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습니다. 이 때,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가 웨슬리의 초청을 받고서 그의 야외 설교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조는 얼마 가지 못한 채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보편적 은혜를 선포하는 동시에 신적 유기(reprobation) 사상을 전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이트필드는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에 따르는 이중 예정주의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분열 이후에 웨슬레는 전적으로 아르미니안의 신학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저서에 깊은 감명을 받고서 수년간 <아르미니안>이라는 책자를 편집했습니다. 이렇게 아르미니안 신학의 기반 위에서 웨슬리는 자신 만의 독특한 신학을 구성해 갔습니다. 


‘선행적 은총 교리’와 ‘완전 성화론’이 그것입니다. ‘선행적 은총’이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무능한 인간을 고쳐 주심으로써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교리입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처럼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인간 의지(행위)로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그는 결국 행위가 칭의에 대한 필요조건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아르미니안의 주장과 거의 동일합니다. 


두 번째, 웨슬리는 ‘완전 성화론’을 주창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이란 절대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완전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성화론의 핵심은 인간의 의지를 선하게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웨슬리가 인간의 자력적인 의지로서의 완전만을 강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지를 중용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약간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적 입장을 한 단계 성숙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성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으며, 성령의 사역에 의해 수행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점은 고전적 아르미니안의 주장보다는 복음주의적 색채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웨슬리의 완전 성화론은 영국 교회뿐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와 사회 안에 신선한 충격과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금주(禁酒)와 노예제도 폐지 등의 사회적 도덕주의 운동에 종교적 추진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웨슬리 신학에 대해 조심스런 평가를 답변의 결론으로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웨슬리 신학은 절충적, 혼합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웨슬리는 다양한 개신교 종파(청교도주의, 경건주의, 영국 국교회주의, 아르미니안주의 등등)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학 배경을 감안할 때, 그의 신학이 오늘날 복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내용입니다. 그중에서도 아르미니안주의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웨슬리 신학은 역사적 개혁주의와는 확연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둘째, 웨슬리 신학은 적극적 행동주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신학과 교리의 엄밀함보다는 믿음과 성결의 생활을 위한 성화론적 관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신학의 출발점은 신학적인 탐구나 교리적 논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삶의 불일치가 성행했던 당시 교회의 부패상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는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믿음과 행위의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생동력있는 전도와 사회 복음주의 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점은 칭찬받을만하나, 그 신학적 방향과 결과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관점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셋째, 웨슬리 신학은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지지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의 상당 부분은 정통 교회의 강조점과 일맥상통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구원론에 있어서는 행위가 칭의와 구원의 필요조건임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펠라기안적 만인구원설에 동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온건한 복음주의(신칼빈주의)와 수정 칼빈주의(웨슬리안 칼빈주의)는 다양한 장점을 내포하고 있는 웨슬리 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세계 교회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성격의 신학과 교회와는 궤를 달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정통 개혁주의의 예정론을 배격합니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예정론은 행위를 동반한 믿음에 의한 구원에 모순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은총으로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택이나 신적 작정에 의한 구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신학적인 정밀성에서 유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인식과 막연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정통 개혁주의와 견해차이가 있다고해서 웨슬리안을 이단으로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태도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다양한 웨슬리 신학의 파편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은 동의하더라도 복음주의를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작금의 복음주의가 그러하듯이 웨슬리 신학에는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내재해 있습니다. 성경과 신학의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 안에 감추인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개선해 감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펠라기안주의'와 '아르니미안주의'와 '웨슬리안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개혁신앙이 안고 있는 과제인 동시에 목표입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61문. 영혼(일원론과 이원론)에 관한 답변 


ruserose 님의 질문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에서 인간론을 보게 되면 영혼 이분설, 삼분설을 애기하고 몸과 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이 때 일원론과 이원론을 나누어 설명을 하는데요... 일원론에 대해서 좀 자세하고 쉽게 설명 부탁드릴게요. 무슨 유물론, 절대적 관념론 등 어려운 용어가 나와서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아서요... 그리고 이것을 주장하는 학자 등도 궁금합니다. 


 두번째로 이원론에서도 여러가지로 나뉘는데 기회 원인론, 병행론, 실재론적 이원론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하는데요, 여기서 실재론적 이원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론적 이원론이 성경적 이론인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드립니다. 


이는 모두 몸과 혼(영)에 관한 신학적 주제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주장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원론은 몸과 혼이 실제에 있어서는 구별되지 않는 실체라는 개념이고, 이원론은 양자의 개별성과 상호관련성을 전제로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일원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견해로 유물론과 절대적 관념론(유심론이라고 불리도 함)이 있는데, 몸과 혼을 따로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설명 방식에 있어서는 완전 반대입니다. 즉 유물론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상정하여 정신(혼, 영)은 물질의 현상과 작용의 결과물로 봅니다. 


반대로 유심론은 실제의 세계는 오직 정신만이 존재한다고 보며,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실제로는 정신이 현시된 현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두 가지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궁금해 하셨는데, 철학 관련 서적이나 철학 사전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수고는 하셔야 자신을 위한 공부가 되리라 생각하고 생략하겠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 책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몸과 혼(영)이 개별적인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할 뿐 아니라 두 실체 간의 상호 작용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재론적 이원론은 성경의 관점과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무리 좋은 철학적 개념을 함의하고 있더라고 진리 자체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혁신학과 조직신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시니 한 가지 조언을 드립니다. 루이스 벌콥의 책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조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반드시 일반 철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기왕에 루이스 벌콥 책을 보신다니, 한 손에는 성경과 다른 한 손에는 철학 사전을 들고 꼼꼼하게 공부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성에 안 차면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겠지요? 


허나 목회자나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먼저 저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아무튼 조직신학은 신학의 뿌리와 같으므로 기회가 되는대로 열공 하시기 바랍니다. 





62문. 성령과 예배에 관한 답변 


<사막의태양> 님의 질문 


개혁주의에 관심이 많고 장로교에 다니는 청년입니다

항상 궁금했던 것인데 여쭈어봅니다. 교회 안에서 참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

또한 찬양 가사에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분명히 성령은 중생할 때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떠나가지 않으시고 성화하도록 견인하신 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때마다 이런 찬양을 부르고 기도할 때도 이렇게 말하는데 조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마치 무당이 귀신을 부르듯 하는 느낌이 납니다. 또 불과 바람으로 비유하다보니 어떠한 에너지로 착각할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몇몇은 눈물과 뜨거움을 성령충만의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제가보기엔 드럼비트와 베이스가 빨라지고 감미로운 신디사이져에 흥분된 거 같은데...


캘거리를 통해 좋은 정보를 얻고 있지만 아직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도움을 구합니다 ^^


신학적인 명쾌한 답을 얻고 싶습니다^^

또한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는 무엇이 다른지도 알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교회안에 시편찬송이 울려퍼지고 온 회중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높이는 날을 꿈꾸며..



답변 드립니다. 


한국 교회에서 부르는 (통일)찬송가의 가장 큰 특징은 초교파적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찬송가공회와 교단간의 정치적인 이해가 맞물린 결과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애초에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일관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굳이 설명조차 필요없는 대목입니다. 


특히 현 찬송가는 부흥운동과 전도와 예배의 분위기 고취를 위해 만들어졌거나 개인적인 신앙체험과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곡들이 많기 때문에 예배 사용에 있어서는 깊은 주의가 요청됩니다. 


님이 지적하신 찬송 이외에도 성령에 관한 찬송 중에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들이 여러 곡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성령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성령의 단독적인 사역인양 언급하거나 또한 성령을 양태론적인 단일신론적으로 표현하거나 심지어 성령을 물질적인 대상으로 개념화(힘, 능력, 기적 등)해서 표현한 가사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곡들이 버젓이 찬송가에 삽입되어 있고, 또 예배 중에 불러진다는 것은 아무리 무지를 핑계삼더라도 안타깝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곡들을 부를 때에 감정과 체험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시끄러운 악기음을 낸다든가, 감상적인 음률과 의도적인 멘트로서 청중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사로잡으려 태도는 최악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음악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라 많은 교회들이 청중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으로 승부를 걸려고 하는데, 타락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 예배의 부패와 전횡이 가져올 영적 참담함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대상과 방식과 자세와 시간을 규범화한 예배모범을 작성하고 이로써 성경적 예배를 실현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배 개혁의 가장 정점에 있었던 일 중의 하나가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시편찬송은 가장 성경적인 찬송의 형태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입니다. 진정한 예배와 찬송 회복을 통하여 진리 위에 선 교회를 열망하는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시편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배에서 시편 찬송이 회복된다면, 현대 교회의 무분별한 찬송 문화도 어느 정도 일소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찬송을 교회의 외적인 성장의 도구나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이상, 참된 예배로의 회복은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 가운데 주님의 선한 뜻대로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는데, 일전에 이 주제로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성찬 설교> 가운데 '임마누엘되신 예수 그리스도,마 1:23; 28:20,'이라는 설교를 청취해 보시길 바랍니다. 필요하시다면 설교 원고를 보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유익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63문. 여성 안수에 관한 답변 


어린양(pksp12) 님의 질문


여성목사제도 어떻게볼것인가? 라는 글 을 보고난 후 참으로 당황스럽고 난감했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한지35년~ 개인적인 사정으로 개척교회부터 다녔던 교회를 떠나 시골의 작은교회에 등록하고 섬긴지 2년정도 지났읍니다. 


문제는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카페 가입하면서 이곳저곳의 글을 읽고 학습하는 과정 중에 ‘여성목사제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읽은 후에 몇 가지 의문점이 저를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첫번째, 제가 다니는 작은교회(성도수가20여분됩니다.) 목사님이 여성목사님이라는점임니다. 그 글대로라면 성경적이지 않은 목자 앞에 어린양인 처지가 된 꼴이지요. 여성목사님은 진정 성경적이지 않은건지요?


둘째로, 제가 다니는 작은교회도 전에33년간 다녔던 교회와 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입니다. 단지 이제 시작한 개척교회라 아직은 장로님도 안계시고, 단지 목사님과 그 자제분인 여전도사님 그 외 몇몇 집사님이 전부인데요.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도 여성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성직인 직분을 주셨는데 왜? 성경적이지 못한 것인지요?


세째로, 성경적이지 못한 여성목사님을 모시는 우리 어린양들은 여성 목자로 인하여 성경적이지 못한 예배와 성찬 성례를 하고 있는 것인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합당한 어린양들이 될 수 없는 것인지요?


네째로, 성경적이지 못한 여성목자의 말씀과 성례의식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것인지요?


끝으로, 남성목자가 계신 곳으로 이제라도 옮기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할른지요?


이상과 같이 알고 싶은 것들로 매우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됩니다. 어찌해야 할른지요?


여러분들의 조언과 지도를 꼭 부탁드립니다. 특히 카페지기님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질문 순서대로 간단하게 답변드립니다. 


1.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여성 목사 제도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여성 목사 제도(여성 안수)는 성경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배치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안수 문제는 과거 30년 간 많은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쟁점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 내의 여러 교단들은 여성 안수를 시행하여 오고 있습니다. 작금에는 자유주의 신학에 동조하는 교회들, 신비주의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주도하는 WCC(세계 교회협의회)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교단(한국의 경우, KNCC 소속 회원 교단들)을 중심으로 여성 안수를 적극 도입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보수주의 신학을 주창하는 교단 소속 신학자(김세윤 박사등)나 목회자들(이종윤 목사등) 중에서도 이 사안에 대해서 적극적인 수용을 외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전통적인 개혁신학을 지지하는 교단(CRC, 미국기독교개혁교회)에서도 여성 안수를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여성 안수에 대한 교회적 관심과 지지가 전세계적 교회 추세인 양 보여지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 안수를 찬동하는 대부분의 교단의 성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이 주장하는 여성 안수의 논거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오직 성경' 사상과 배치됩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여성 안수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하다 보니, 성경을 시대의 특정한 상황이나 사회적 관점이나 성적 차별이나 형평성과 민주성의 원리에 맞추어 억지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일일이 말씀드리기에는 몇 편의 논문으로도 부족하므로, 이 카페에 올려놓은 두 분 교수님의 글을 소개합니다(129, '여성교역 어떻게 볼 것인가' 김성수 교수, 290, '여성 목사 제도, 어떻게 볼 것인가' 서창원 목사).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입장을 잘 전달하고 있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두 분의 견해를 제 입장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다만 좀 더 세밀한 언급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차후에 다시 질문하시길 바랍니다. 

 

2.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님이 출석하는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인데 여성에게 왜 목사 안수를 주었는가 물으셨습니다. 원래 역사적인 개혁신학을 모태로 하는 장로교회라면 여성 안수는 불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이유는 작금의 여성 안수 찬성 논리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위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 안수에 찬성하는 많이 이들은 자유주의 해석적 방법과 파괴적 비평설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장로교단들 중에는 이러한 시대사적 조류에 영향을 받고 있는 교단들이 많습니다.그중 대표적인 교단을 고르라면, 통합측과 기장측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학적 근본을 찾을 수 조차 없는 군소 장로교단(특히, 오순절 교단과 구별되지 않는 교회들)들이 수십개(일설에는 백개도 넘는다고 합디디만) 이상이 됩니다. 아마도 무허가 교단수까지 포함하면 한국에 존재하는 장로회 소속 교단 숫자만으로도 또 하나의 교단을 세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님의 교회 여성 목사님은 어느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장로회 소속이라고해서 여성 안수를 반대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역으로 말씀드리면,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한국 장로교단과 교회들이 엄밀한 장로교회적 전통과 유산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분별점을 소개해 드리자면, 일단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은 장로교든, 비장로교든 상관없이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서 벗어나 있거나 그럴만한 개연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시면 거의 정답입니다. 일례로 부흥회 광고 전단지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여성 목사(특히 신유와 치유등 초자연적 은사를 가졌다고 소개되는)로 소개되는 분은 위에 말한 바처럼 신학적 근본을 알 수 없는 교단 출신일 확률이 높습니다. 주의가 요구됩니다. 

 

3. 세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 

여성 목사의 말씀과 성례 집례의 합법성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습니다. 위에 언급한 바대로 저는 여성 목사 제도는 성경의 권위와 바른 해석에 위배된 주장이며, 제가 추구하는 역사적 개혁신앙과 신앙 양심에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고로, 여성 목사의 말씀 증거와 성례 집례를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 목사 제도에 대해서 성경적인 판단과 확신을 갖지 못하여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을 정죄할 수도 없거니와 정죄할 마음도 없습니다. 또한 여성 목사로서 사역하는 분들의 사역의 열매들이 전적으로 무시되거나 매도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사역과 열매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비록 제게는 검증된 일이 아니지만) 이런 현상들이 여성 목사 제도를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또한 여성 목사에 의해 주도되는 말씀과 성례가 성경적 권위에 근거한 추천할만한 일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생각하면 고달프지만, 이럴 때일수록 말씀 앞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언급하는 신앙적 철저함과 담대함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안은 분명 성경적으로 반드시 해석되고 설득되어야 하는데, 저의 신학과 신앙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임을 다시 말씀드리며, 이 정도에서 남은 고민과 선택은 다시 님의 몫으로 남겨 놓고자 합니다. 네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님의 보다 지혜로운 판단을 기대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64문. 테마 예배에 관한 답변 


<사랑이> 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귀한 글과 가르침으로 수고해 주시는 주나그네 목사님과 섬겨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고 그에 대한 성경적인 답도 듣고 싶기에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소위 말하는 ‘테마예배’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1년에 3번 정도 주기적으로 하고 있고, 이번이 12번째라고 합니다. 과연 ‘테마예배’라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지요?


감이 오시지요? 한마디로 불신자 초청예배입니다. 공연과 영상미디어, 간증과 말씀 등으로 꾸며진 예배인데, 이번에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 크리스챤의 간증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테마예배라는 용어가 성경적인지도 의문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테마예배가 주일 낮예배에 드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이면 모르겠지만 주일 공예배(11시)에서 ‘테마예배’가 진행된다는 것은 기분이 굉장히 나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할 주일예배에 웃고 떠들고 요란한 불신자들 눈치나 보는 예배로 대체한다는 것이 화가 납니다.


한두달 전부터 교회의 설교와 많은 에너지가 테마예배를 준비하고 독려하는데 쓰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잘 몰라서 성경적 근거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요. 혹시 간략하게만이라도 말씀해 주신다면 그 내용을 토대로 전도사님을 통해서든 목사님께 직접이든... 메일을 정중하게 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변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향후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건강을 위해서도 말씀드려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영혼들은 모두 전도해야 하는 전도자로 변모된 느낌입니다. 물론 저도 신앙생활을 오래 해왔고, 많은 봉사도 했지만 여전히 말씀이 필요하고 갈급한 것이 비단 저뿐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담임목사님이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고 미국에서 박사까지 하고 오신 분인데도 성경에 입각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카페를 통해 귀하신 분들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분별력이 생기고 있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섬기시는 목사님들의 사역과 삶에 의의 열매가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모두 너무 멋지십니다. 힘내시구요.. 끝까지 외로운 길이지만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걸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민이 되시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있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하려는 성도님의 분별력과 담대함을 보게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쉽게 답변 드릴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쉽지 않다는 말은 바른 예배에 대한 옳고 그름을 모르거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님의 처한 교회 형편을 고려해 볼때, 과연 정답을 들어도 정답으로 여기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님의 교회 목회자들이 님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서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신앙 환경이라면, 제가 보기에는 님께서 정답을 전해도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갈등과 오해만 야기될 확률이 높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목회자들의 인격성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지향하는 신학적 경향성입니다. 바른 신학을 지향하는 목회자라면 현대 교회에 횡행하는 이와 같은 비성경적 예배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학에 대해 분별력과 관심이 없는 목회자라면 교회(예배)가 세상 유행에 따라 가는 일에 대해서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경험상, 바른 신학에 의거하여 성경적 예배상을 추구해 가는 일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목회자를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변화시키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현대적인 목회적 방법론과 기술에 목숨거는 목회자들은 그것이 곧 교회 부흥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야 교회와 성도가 산다고 확신합니다. 


이 무모한 확신은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회 철학과 신념이 이러한 확신 위에 서 있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이런 확신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회에 대한 일종의 부정이나 포기가 되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집착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세속적인 예배 형태를 현대 교회 부흥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나 방안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슬프지만 매우 실제적인 현상입니다. 


하여, 한 가지만 여쭙니다. 님이 속한 교회는 어느 교단에 속해 있습니까? 교회 목회자들은 이 사안의 중대함을 알고서 다른 견해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일만큼 소통이 가능한 분들이라고 생각됩니까? 답변 주시는대로 좀 더 구체적인 의견을 전해 드리지요. 


일단 그 사이에 저희 카페에 올려진 '성경적 예배'에 대한 자료들을 검토해 보시길 권면드립니다. 아마 그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보신다면,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한 해답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위의 검색창을 활용하시면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님에게 주의 더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중략)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염려했던 이상의 현실 같습니다. 온** 교회가 지향하는 형태의 예배를 그대로 답습하는 전형적인 교회 같아 보이는군요. 그런데 온** 교회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의 윌로우 크릭 처치같은 곳에서는 자신들의 신앙 접근 방식에 대해서 잘못을 표명하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한국에서는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예배가 변형되어 가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경험에 근거해 말씀드린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님과 같은 교회 환경에서 개혁주의 예배를 경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저로서는 이런 교회 환경에서 님과 같은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입니다. 


하지만 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몇몇 성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담임 목회자의 신학과 교회 정치 구조가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 한, 개혁주의 예배로의 전환은 실상 어렵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정하고 싶으시겠지만 이것이 교회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내용과 형태는 곧 신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님의 교회의 상황을 볼 때, 교회적으로 개혁주의와 상반된 정치와 예배에 몰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개혁신앙의 핵심과 관련된 부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님의 교회의 소속 교단과 목회자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궁금해 하였던 이유도 이 부분을 확인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님의 교회 목회자들이 온** 교회가 지향하는 신학과 예배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절치부심으로 각성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님의 교회 예배 환경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 성도들이 계시다니, 그나마 희망을 말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이 분들도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정견과 성경적인 확신을 갖고서 목회자를 설득해 내지 못하는 한, 교회 내에서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는 불만 세력(?) 정도로 비춰질 가능성이 큽니다. 예외적인 상황을 말씀드리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갑갑해 보입니다. 


하지만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님에게 상심을 드리고자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열악한 신앙 현실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럼에도 님에게 진리 안에서 희망어린 제안을 드린다면, 님께서 이 교회에 속해 있기를 원하시는 한, 우선 교회적 개혁보다 자신에 대한 개혁을 보다 엄밀하고 부단히 추구해 가라고 권면드리고 싶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 앞에 선 성도 개인으로서 말씀에 의한 바른 신학과 예배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라고 님의 교회가 지향하는 신학과 예배가 왜 문제인지, 성경적인지 못한지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적어도 교회 전체를 개혁할 수는 없어도 자신은 말씀 앞에 개혁된 성도로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장성한 믿음과 분명한 분별력을 소유하기 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습니다만, 말씀 안에서 끈기와 용기를 가지고 진력하신다면, 어둠의 교회 현실 속에서 진리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저희 카페와 저를 비롯하여 개혁신앙에 특심한 여러분들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진리 안에서 건투를 빕니다. 





65문. 칼빈도 자신을 사도라고 했습니까?


저희 청년회 담당 목사님께서 그분께서 신학교 다닐 때 사도직분은 계승되지 않는다고 배워왔고 그렇게 알았는데 기독교 강요 3장에 사도직분이 계승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특정한 역사가운데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고 그러면서 칼빈이 루터를 위대한 사도라고 했고, 자신도 사도라고 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날 사도직분이 계승되지 않는다고 못박는 것은 너무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날도 선교지에 선교사님들을 통해 사도적 사역(초대교회와 같은 말씀+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네요. 


여기서 드는 의문이 정말 칼빈이 자신을 사도라고 했는지, 그렇다면 사도적직분이 계승되지 않는다고 배웠던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조금 혼란스럽네요... 


그리고 사도적 직분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복음과 기적을 통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사도의 역할인 것이라고 저희 목사님은 말씀하시네요.  그리고 저희 목사님은 사도적 직분이 계승되지 않는다 하여도 이러한 사도적 사역은 교회를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에배소서에 언급된 바나바의 사도성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데살로니까전후서에 바울자신만을 사도라고 하지 않고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까지 사도들이라고 언급된 부분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지 궁금합니다.


전체적으로 계혁주의 신학에서의 사도성, 또는 사도적 직분에 대한 개념이 정리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도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님의 교역자님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런 식의 해석을 견강부회라고 합니다. 아마도 급한 마음에 기독교강요 각주에 달린 짧은 글을 읽고서, 전체 내용은 대충 짐작하셨나 봅니다. 그 분께 다시 기독교 강요 4권 3장(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의 내용을 꼼꼼히 다시 읽어보시라고 권면해 드리세요. 님도 직접 확인해 보시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앞으로 공개 강좌 시간을 통해서 보다 자세하게 강의할 예정에 있습니다. 그때 자세하게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되고요. 다만 도움이 되는 자료를 소개해 드립니다. <2차 공개강좌(교회론)> 코너에 올려진 '교회개론(5) 교회의 사역과 직분 Ⅰ', '교회개론(6)교회의 사역과 직분 Ⅱ' 자료를 살펴보세요.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두 번째 '바나바의 사도성'에 대한 질문인데요, Q&A란에 이와 유사한 질문과 답변이 올려져 있습니다. Q&A 코너에서 <1538 롬 16:7과 관련된 바나바의 사도권 물음에 대한 답변>을 확인해 보세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66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관한 답변 


어린양(pksp12) 님의 질문


영국 성공회의 개혁을 위하여 1643~47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장로주의에 입각한 신앙고백서 전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의 시대적 상황으로 으로 보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병자호란을 격은후 효종의 청나라에 대한 북벌론이 대두되던 시기입니다. (참고로 인도의 이슬람 무굴제국시대 자랑인 타지마할이 완공된 시기) 참으로 오래된 360년 전의 사건이요 신앙고백서요 개혁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  하나님의 진리는 무오성과 영원성 절대성과 불변성의 진리인지라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서 를 기초로 하는 현재 장로교회의 예배 역시,  변치않고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1) 주일예배중에 세례식과 성찬예식이 있는데 지금은 부활절날과 성탄절날 에만 세례식과 성찬식을 (저희교회만그런지?)행합니다 맞는지요?  2) 웨스트민스터본문에는 예배 말미에 연보(헌금)을 드리면서 "가난한자들을위하여" 라는 명목으로 구제헌금을 드렸는데, 지금의 헌금은 주일헌금 주정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십일조헌금 작정헌금 ....이있읍니다. 정작 구제헌금은 없어졌는데(?) 각종의 헌금은 올바르게 지켜지는건지요? 3) 무지하고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정말로 성경에 합당한 답안이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인지요? 좋으신말씀을 청합니다.



질문 순서에 따라서 간단하게 답변 드립니다. 


1)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성찬 횟수와 관련하여 '성찬 혹은 주의 만찬은 자주 거행해야 한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는 목사와 개혁교회 당회원들이 저희 손에 맡겨진 사람들의 위로와 건덕에 가장 편리한 대로 결정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칼빈의 경우에는 성찬을 매주일 행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는 칼빈이 오기 전부터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1년에 4번 시행하고 있었는데, 칼빈역시 그 관행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성찬에 관한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가르침의 핵심은 횟수보다 내용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에는 성찬을 합당하게 시행하고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유형의 사람들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찬은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보전하는 중요한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성찬이 갖는 근원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성찬을 말씀에 따라 분변치 못하고서 시행하는 일이란 결국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일(고전 11:28)임을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예배모범의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헌금에 대해서 구체적인 규정이 적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헌금('헌상'이라는 말이 더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만)을 예배의 부분으로 여겼습니다. 헌금은 구별된 물질을 드리는 의식인 동시에 예배에 있어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분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를 고백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헌금을 하는 행위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헌금에 대해서 정립하는 일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한국 교회는 참으로 모자람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을 바치라는 강조는 있지만 헌금을 어떻게 드리는 것이 성경적인가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한국 교회 안에 잘못된 헌금의 유형을 본다면, (제가 보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적 강제주의와 자유주의적 방임주의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헌금을 구약의 의식법의 연장인 것인양 설명하여 마치 율법을 지키듯이 강제적으로 헌금을 바칠 것을 강요하는 경우입니다. 후자는 헌금에 대한 아무런 성경적 기준이 없이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대로 하도록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두 가지 모두 성경에서 제시하는 헌금의 정신에서 벗어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헌금에 관한 또 다른 한 가지 무분별하게 제정된 헌금의 종류입니다. 질문에서 열거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명목과 상황에 따라 헌금의 종류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개혁교회를 보면, 헌금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기 위한 예배 헌금과 이웃을 위한 구제헌금의 형태입니다. 이 헌금에 동참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조항으로 여깁니다. 


다양한 형태의 헌금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 다양한만큼 헌금의 종류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사와 또한 교회나 기관의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도모하기 위한 특별 헌금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헌금의 형태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원성취를 위해서나 목회자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나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방편으로나 경쟁적으로 혹은 자랑하기 위한 목적에서 헌금의 종류가 다양하게 제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계 어느 교회를 보더라도 한국 교회만큼 헌금 종류가 다양한 교회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 다양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일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헌금을 명분으로 성도들의 양심과 물질을 억압하는 형태로 변질되는 부정적인 현실은 결코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기형적인 헌금관의 실질적인 예가 다양한 종류의 헌금 중에서도 이웃을 위한 구제 헌금은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을 구제하는 일까지 관심을 가지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실행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은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교회 재정을 운영할 수 있는 처지의 교회라면 이 일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뿐만 아니라, 미자립 교회나 목회자들, 열악한 재정 압박속에서도 해외 선교에 여념없는 분들을 위해서 폭넓은 의미에서의 구제 사역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야 합니다. (저희 기관도 이 귀한 사역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날을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개혁교회에서 시행하는 헌금의 또다른 특징에 대해서 짧게 한 말씀 드립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헌금을 할 순서가 되면, 목회자가 먼저 헌금이 사용되는 용도와 목적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래서 대개 개혁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드리는 헌금이 어떻게 사용될지를 알고서 합니다. 그리고 헌금 사용 내역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보고합니다. 이런 전통은 한국 교회에서도 충분히 적용가능한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3) 세번째 질문은 장로교회와 장로교 신자에 국한된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는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과 같이 무오하거나 완전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진술이며, 공교회를 위한 성경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장로교 신앙의 요체이고, 특징입니다. 


그리하여 개혁주의적 장로교회에 속한 성도라면 누구를 막론하고(목회자나 직분자는 예외없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과 일치하는 교회의 표준 문서로 받아 들이며 이 내용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 평생 가르치며 배울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교회 현실 속에서는 장로교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중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귀하게 생각하여 그 신앙 정신을 엄밀하게 추구하는 교회를 찾기 힘든 실정입니다. 목사 안수나 직분자 임명을 받을 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의 가르침이 요약된 것으로 알고 가르치고 배우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절차를 위한 하나의 요식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일뿐 아니라, 교회 역사를 통하여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된 진리의 선물을 교회 가운데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기만적인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7문. 목회자 소명에 관하여 고심하는 분을 위한 답변 


<바람처럼(kensiroo7400)>님의 질문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근데 하면 할수록 소명이 무었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드네요,,,

과연 내안에 소명이 있는지에 관해서,,,,


공부하는 건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하고 싶은데 소명함이 무엇인지 많이 헷갈리네요.



목회자의 소명에 대해서 고심하는 님에게...


현재로선 님은 자신이 목사로서의 사명이 있는가 여부를 두고 고민을 하고 계시지만, 기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물음이 필요할 듯 합니다. "목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자는 목사가 되기도 전에, 어떻게 목사를 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목사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하게 답하는 일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정입니다. 목사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단추를 맨 꼴과 같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참으로 무모하고 위험한 도박같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목사라는 직분이 갖는 엄위로운 성격 때문입니다. 요나단 에드워즈는 목사를 가리켜 성도들의 영혼 지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목회자에게 성도들의 영혼을 맡기겼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물며 영혼을 책임지는 목사는 어떠하게 생각해야겠습니까? 더군다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증거하고, 그로써 교회와 성도를 진리의 푸른 초장으로 이끄는 목자와 같습니다. 목자 없는 양떼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씀으로 섬기는 목사 없는 교회와 성도 역시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목사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딤전 3:1-7입니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에 관해서는 본 카페 <성경적 목사론> 코너의 '제직의 제 역할과 사명'이라는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상 위에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존속하고, 그러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모으시는 섭리가 지속되는 동안 목사라는 직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중요한 연장(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목사에 대한 최소한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동감을 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란 누구인가"라는 중차대한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목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목사로서의 소명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사항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목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내, 외적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 소명이란 말그대로 주님께로부터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주관적인 판단과 확신입니다. 이것 없이 섣불리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적 소명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외적 소명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적 소명보다 더 분명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주변인(특히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 믿는 가족들)으로부터 객관적인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목사로서의 소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결정할 일이 아니라, 공교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조금 강하게 말씀드리자면, 어떤 사람이 외적 소명에 대한 아무런 확신없이 그저 내적 소명만으로 목회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극구 말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둘째, 목사로서 섬길 수 있는 달란트 소지 여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님께서 언급한 은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달란트는 소위 오순절 계통의 교회나 은사 운동주의자들이 말하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어떤 능력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형식의 체험 신앙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아예 목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갖지 말라고 조언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말씀과 관련된 일입니다. 목사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지키는 일에 생명을 내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성적, 인격적, 정서적, 영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경과 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져야 하며, 성품과 생활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인격성을 갖추어야 하며, 자신보다 타인에게 배려와 아량을 아끼지 않으며 항상 겸손하고 품위있는 정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분별력과 안목과 함께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제 안에 이런 달란트가 있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하다고 생각되어도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를 준비하는 과정에 임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의 부르심에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달란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득 수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쓴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제목이었지요.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물음을 자신 안에 늘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답을 하게 될까요?


"주님, 제가 그 길을 가겠습니다" 라고 하든지, 아니면  "갈만하니 부르신 게 아닙니까?"라고 되묻게 될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 목자의 길을 제 능력으로, 제 실력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겠지요.


또한 그 길을 자신있게 걸을 수 있을만큼 모든 준비와 자격 요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겠지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담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대해 미련하며, 약하며, 천하며, 멸시 받고, 없는 자를 택하사 영광과 거룩의 도구로 삼으시는 주님의 주권과 섭리 앞에 감사와 찬송과 송축을 올려 드리는 일입니다. 


고민이 되더라도 심사숙고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기에...


그리고 주님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간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간구를 들어 주시며, 가장 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님이 가야 할 가장 선하고 바른 길을 깨달으시거든, 진리와 더불어 그 곳으로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68문. 요 3:16-17 본문 해석에 대한 답변 


juicecream 님의 질문 


우선...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꽤나 죄송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한 청년과 그 청년이 속해 있는 교회 교인들의 영적 건강을 생각하신다는 마음으로 꼭 좀 답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제가 아는 목사님이 아래와 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원래는 들은 내용 중 궁금한 부분만 올리고자 했으나, 원활한 이해를 위해 녹취한 내용을 올리고자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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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 3:14~17



자 오늘 이 말씀에... 오늘 좀 마귀 얘기를 좀 해야 되지 않아요? 뱀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하나님은 성경 속에 아주 함축적으로 단어 하나를 던지고도 매우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하세요. 그래서 여기에 뱀, 놋으로 만든 뱀을 장대에 매달았다. 이게 뭘까? 이것이 시사하는 것이 뭘까? 뱀은 보이는 동물이고, 놋뱀도 보이고 만져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는 것을 가지고 안 보이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있을까요? 사람들은 알쏭달쏭 생각해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 ‘모세가 뱀을 들었다.’ 이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면은 장대에 단다는 것은 저주 받았단 것이거든요. 저주 받은 것이지 절대로 뱀을 추앙하거나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장대에 달아 죽이는 거죠. 예수님도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대에 달린 이 뱀은 저주받은 뱀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 장대에 달려서 뱀이 죽게 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도 나무에 들리고 나무에 매달려, 예수님이 어찌 됐어요? 죽었잖아요. 똑같은 현상이에요. 뱀도 나무에 달려 죽어야 되고, 예수님도 나무에 달려 죽는다는 거죠. 모양새가 똑같지만은 내용은 다르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놋뱀은 뭘 말할까요? 잘못하면은 이걸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달려 죽는 것은 같은 모습이지마는, 뱀은 예수님이 아니에요. 맞습니까? 자 그러면 모세 시대에 불뱀이 뭐 했어요? 사람들에게 뭐 진주 물어다 줬습니까? 에? 물어 죽였잖아요, 사람들을. 맞습니까? 에. 그러니까 이 마귀를 가리켜서 사망 권세자라는 겁니다. 사망권세자. 마귀는 죽이는 것이 그의 권리예요. 죽이는 것이 그의 특징이고. 마귀는 죽이는 것이 그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바로 뱀인데, 이는 뱀을 죽여야 사람이 사는 거에요.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을 죄 짓게 하고 죽게 하는 자가 누구요? 뱀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모습이 똑같아요. 에덴동산에서 뱀이 와서 아담, 하와로 죄짓게 해서 죽게 한 것이나, 광야에서 하나님 백성을 물어 가지고 그 독으로 죽이는 것 똑같잖아요. 죽이는 이 독사, 죽이는 이 놈을 죽여야 되고, 이 마귀에 속한 자에 대해서, 독사의 새끼들아,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에. 독사의 새끼라고 해서 강도, 사기치는, 뭐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고 그 당시에는요, 예수님이 볼 때 종교 지도자들도 독사의 새끼였어요. 독사의 새끼, 이 다시 말해 마귀의 새끼다 이런 말이거든요. 근데 바리새인만 그러냐, 아니, 일반 백성 중에도 마귀 자녀 많아요.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랬거든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야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 두 종류가 있는 거에요. 하나님 백성이 있고 마귀 백성이 있는 거에요. 여러분 어디에 소속돼 있습니까? 어디에요? 주님께 속한 자,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야 한다는 겁니다. 자, 여기 예수님께서 이제 뱀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함 보십시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모양은 똑같이 장대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하고 예수님의 차이가 뭐죠? 마귀는 죽으면 영원히 멸망 받지마는 예수님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시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은 다시 살기 위해 죽는 것이고, 마귀는 영원히 죽으라고 죽이는 것이죠. 그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바로 이 마귀를 멸하고 마귀를 심판하실 분이 오셨어요. 그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모세가 뱀을 드는 거에요. 모세는 누구 상징? 예수 상징이잖아요.


에. 자, 그런가 아닌가 한 번 보십시다. 히브리서 3장. 오늘은 성경을 좀 찾아 가면서 공부하십시다. 히브리서 3장. 1절. 히브리서 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자 예수님은 사돈데, 자 사도는 이제 보냄을 받거든요. 그러면 보내는 주체, 보내는 자는 누구죠? 자, 예수님에게도 사도 선택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도가 있고 하나님의 사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도는 누구? 예수님. 예수님의 사도는 누구? 열두 사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이제(이들이) 주님이 선택한 사도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이 선택받아서 또은 보냄 받아서, 이런 사람을 선택받은 종이라 그래요. 예수님도 종입니까 아닙니까? 뭐 성경에 종으로 나와 있어요. 에? 하나님이 쓰시는 종으로. 거룩한 종, 하나님이 택한 종으로 나옵니다. 사도 열 두 명도 똑같이 이건 예수님이 택한 종, 또 거룩한 사도라 이렇게 보면 되겠죠. 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이게, 고 다음에 바로 누가 나와요? 모세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모세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 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말이에요. 그런가 아닌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 했어요, 안했어요? 구원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냈잖아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홍해를 건너고. 홍해는 세례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 모세가 하는 일이 백성을 구원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심이라. 마태복음 1장 21절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맞죠? 그러니까 모세가 뱀을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뱀을 들었다 이렇게 해석하면 되요. 이해가 됐죠? 그러니까 이 보이는 불뱀, 또는 놋뱀은 마귀를 보여 주는 동물입니다. 이건 언제 나타났어요? 에덴 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건 또 언제 나타납니까? 계시록에도 나타납니다. 근데 계시록에는 옛 뱀이라는 거에요. 이거 아주 옛날부터 활동한 뱀, 그래서 옛 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뭐, 뱀 파는 집 가면 독사도 있고, 살모사도 있고, 백사도 있고. 뱀탕 잡숴 보였어요? 에. 웃는 사람은 잡숴 본 모양이네. 건강에 좋다 그러더라고. 그 뱀 말하는 게 아니고 옛 뱀이란 것은 마귀를 말하는 거죠. 지금 동물원에 있는 그런 볼 수 있는 뱀이 아니고 옛 뱀, 옛날부터 활동한 그 뱀, 마귀를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에 이렇게 마귀를,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를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잘 이해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뱀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뱀을. 뱀을 가지고 마귀를 설명한다 그런 말이에요. 자 여기에 예수님이, 예수님도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 가지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 일 한 것처럼, 모세도 자기 백성을 구원한 일을 했습니다. 3절에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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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놋뱀을 마귀라고 할 수가 있는지... 그걸 예수님으로 보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지... 제가 보았던 개혁주의 선배님들의 어떤 주석이나 저서에서도 놋뱀은 예수님이라고  나와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민수기에서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더라'라는 건 마귀를 보고 살았다는 말인지...   그래서 이 부분을 가지고 그 목사님께 정식으로 질의를 하려고 하는데, 저도 나름 주석과 기타 설교집을 찾는다고는  하지만 좀 더 철저하게 조목조목 따져보고자 하여 도움을 청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을 저렇게 해석하는 데 대한 문제점과, 히브리서 3장과 민수기 21장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설교한 목사님은 '모세 = 예수님'이기 때문에 '모세가 든 놋뱀 = 예수님'  은 말이 안된다. 성경의 뱀은 마귀를 나타낸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반박을 하실 것 같습니다만...   만일 제 이해에 착오가 있거나 저런 신학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마음껏 지적하셔도 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간단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위 설교에서 놋뱀을 저주받은 뱀이라고 하는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분께서 성경상의 '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봅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뱀에 관한 언급은 약 70여차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3분의 2는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뱀이 언급된 성경 구절마다 문맥에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있어서 '뱀'은 죄와 저주와 사탄과 관련된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모두가 그렇다고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즉, 항상 뱀=마귀 라고 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분처럼 뱀에 대해서 조건없이 획일적인 적용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세가 바로에게 가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뱀으로 만들게 하셨을 때, 그렇다면 모세의 손에 마귀를 쥐어주신 것이겠습니까? 이 뱀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기적의 수단이외의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또 이런 해석이라면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와야'(마 10:16) 한다고 하신 뜻은 우리에게 마귀의 지혜를 배우라는 의미가 됩니다. 과연 타당한 해석일까요? 


이러한 해석을 민 21:9에도 그대로 적용하면, 결국 마귀(불뱀)에 의해서 죽게 된 사람이 또다른 마귀(놋뱀)을 쳐다보게 되므로 살게 된다는 황당하고 불경스런 뜻이 되고 맙니다. 요 3:14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경험한 사건의 참된 (영적)의미를 해석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굳이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모형론적 해석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즉 민 21장의 사건이 모형이라면, 요 3장은 사건의 원형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요 3:14절의 본문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강조점이 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린다'는 말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구약의 놋뱀 사건을 통하여 자신(인자)의 들림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 들려 올려진 것은 모형이었습니다. 이 모형(놋뱀)은 육체적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살리는 데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모형 자체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언급된 원형, 즉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영적인 생명(영생)을 수여받게 됩니다(요 3:15). 또한 그 능력은 그 분에게서 나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들림은 죄에 대한 일시적이고 단순한 구제책이 아니라.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들림없다면 인류는 스스로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요 3:14에서 사용된 '들려야 한다'는 헬라어 동사가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하늘에 오르실 것을 의미할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요 8:28; 12:32,34; 행 2:33; 빌 2:9 etc). 


17세기의 천재적인 개혁신학자로 평가받는 존 오웬(J. Owen)은 요 3:14절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들림의 이유(목적)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기 위함이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라는 말씀의 성취로 봅니다. 사도 바울은 갈3:13를 통해서 이 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 둘째, 구약의 예표를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을 통하여 예표된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는 것을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로써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시고자 하셨습니다(요 12:31).


더불어 요 3:14절과 관련해서 한 가지 설명을 더 드리면, 놋뱀을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해석이 아닙니다. 놋뱀이 장대위에 매달린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한다고는 말할 수 있겠으나, ‘놋뱀=예수님’으로 보는 해석은 자칫 본절의 핵심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했습니다. 이들은 이후에 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또한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뜻하는 의미에서 '느후스단'(왕하 18:4)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개혁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지하는 본문 이해입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히 3:1절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이 본문에서는 모세가 예수님의 모형으로 제시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모형론의 핵심은 그리스도는 모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형은 원형의 그림자이지만 실체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가지고서 모세의 뱀과 그리스도의 뱀을 비교 설명하는 것은 본문의 핵심적인 의미를 염두하지 않은 억측이라고 보아 집니다. 이 분은 이 구절과 마 1:21절까지 동원해서 모세가 뱀을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뱀을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성경에서는 그 어디에서 예수님께서 뱀(마귀)을 높이 들었다는 구절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뱀(마귀)의 상하게 하십니다(창 3:15). 의미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짚밟거나 으깨심으로써 최종 승리를 얻으실 것입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69문. 재테크(증권, 펀드, 부동산, 보험)에 관한 답변 


착한사랑(rokmc763) 님의 질문


개혁주의적 삶을 산다는 것이 아직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부분입니다. 물질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흔히들 하는 재테크(증권, 펀드, 부동산)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보험의 문제입니다. 과연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재테크를 해도 되는 것인지요? 

그리고 보험을 들어도 되는지요?

짧은 소견으로는 재테크는 불로소득이라는 차원에서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고....

보험의 문제는 결국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 보다는 보험이란 돈에 맡기는 샘이되니...


그렇다고 요즘 시대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한 교육보험이나...또 노년을 위한 보험이나...또 어떻게 병이 들지 모르는 상황을 대비 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개혁주의적 삶은 어떤 것인지요? 많은 고민이 됩니다. 



착한 사랑님께... 


개혁주의적 삶을 산다는 것... 평생을 두고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겠지요. 착한 사랑님께서 문의하신 내용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하고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바를 몇 자 적으려 하다가, 생각해 보니 금주(12/6) 산상수훈 스물 아홉번째 강해가 마 6:19-21에 언급된 보물(재물)에 대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한 주 동안 님께서 제기하신 물음과 더불어 말씀 묵상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금주 설교를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 (중략) ---


약속대로 착한사랑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을 지난 주일 산상수훈 강해(29)를 통해서 언급하였습니다만, 음성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착한 사랑님은 성도로서 '재테크'를 하거나 '보험'에 가입하는 일이 성경적으로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물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포괄적으로 보면, 성경적 물질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음으로 연유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실 세상에서 물질을 추구하거나 금융 투자나 보장성 보험 활동을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일로 정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정적으로 이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청빈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물질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종교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안에서 물질과 관련해서 두 가지 형태의 극단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질 우상주의, 또다른 하나는 물질을 가치없는 것으로 대하거나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된다는 물질 무관심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물질에 대한 성경적 견해가 아닙니다. 


큰 틀에서 본다면 착한사랑님의 질문은 후자 편에 속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순한 동기나 부적법한 방식이라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국가적 혹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경제 기관에 돈을 투자한다거나 미래에 일어날 지 모를 사고나 재난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보험을 드는 일은 신앙적으로 위배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선 이 물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물질관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과 관련된 긍정적인 차원의 성경 진술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신 28:1-6) 


2. 부지런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성한 이익을 누리게 됩니다(잠 21:20). 


3. 잠언 기자는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우라고 말합니다(잠 6:6-8). 이 지혜란 장래의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앞으로 쓰여질 것을 미리 준비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4. 주님께서는 달란트(재물)를 활용하여 이익을 남긴 자를 칭찬하십니다(마 25:14-23). 


5.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일을 권장합니다(고후 12:14) 


6. 자손 대대로 재산을 물려주는 이를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잠 13:22). 


7. 물질로 가족과 친척들을 돌아보는 사람을 칭찬합니다(딤전 5:8). 


8. 물질도 감사함으로 잘 사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딤전 4:3-4). 


이러한 말씀들은 성도로서 물질을 어떻게 모으며,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성도는 물질을 포함하여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고백합니다(욥 1:21). 


그렇다면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늘 물질을 주신 이의 뜻을 염두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만큼의 물질을 맡고 있든지간에 근명과 지혜로 물질을 잘 활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적법한 과정과 방식 가운데 실행되는 투자나 보험 가입이나 그외의 경제 활동 참여는 물질을 맡은 자의 근면과 지혜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물질을 사용하고 추구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마 6:19) 행위로서 마친다면,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마 6:20) 마음으로 물질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듣고 싶다면, 산상수훈 강해 中 <성경적 물질관>에 대한 설교를 청취하시길 바랍니다. 


짧은 답변이지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70문. 예정론에 입각한 전도(복음전파)의 필요성에 관한 답변 


jungyeon9450 님의 질문


예정론에 입각한 전도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네요

하이퍼칼빈주의, 반칼빈주의의 의견들이 나올만한 이유를 알듯해요


이 카페에서 예정론과 칼빈주의 개혁주의에 관한 많은글들을 프린트해서 읽고 읽어보았습니다. rc스프롤 이라는 개혁주의 변증가 조직신학자 의 책인 알기쉬운 예정론도 읽어보았구요(마지막장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정론에 입각한 전도의 필요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더라구요. 물론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찾지못한 것일거란 생각을 합니다. 

아, 저는 예정론을 반주장하는자가 아닌 예정론도 아니였고 알미니안주의쪽도 아닌 (조금은 알미니안주의에 가까운, 하지만 요즘 성경을 읽을수록 예정론을 부인하지못하는 이유는..) 평신도입니다.


죄의 시작 (악마부터) 죄의 상속과 그 책임과, 그와 동반되는 주님의 주권과,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변하지 않는 작정, 자유주의를 침해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 무엇보다도 예정론에 입각한 전도, 복음전파의 필요성에 관한 칼빈주의, 개혁주의에서 뭐라고 주장하는지 알고싶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기다리겠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효과와 효율로서 평가되는 오늘날 전도 방식(프로그램)의 관점에서 보면, 예정론은 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예정론은 이교도적 숙명론과 운명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도 성경적인 예정에 대한 잘못된 접근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와 삼위일체적 구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모든 예정의 대상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공의로우신 의지에 기원합니다. 즉 하나님의 근원적인 의지는 인간의 지각에 의해 확립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코 오용될 수 없는 먼 원인의 성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예정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과 판단은 오직 성경을 따라 되어져야 하며,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의 의지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므로, 이 예정을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어떤 이유로서든지 사람 간의 차별을 둘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올바른 구원의 서정과 경륜의 방식을 체득함으로써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대상이 된 것을 감사하며, 또한 우리 자신과 같이 택하신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를 기대하기에 상대방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과 신뢰를 가진 성도는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며, 끝까지 참고 승리하기까지 인내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정 사상을 받는 사람은 교회나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방치하지 아니하고, 성경적 비판 정신으로서 날마다 개혁해 가는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적 가치와 목적을 오직 하나님의 의지 가운데서 지극히 큰 선과 보상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예정론은 인간론적 관점이 아니라, 신론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정론에 대한 인식의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게 되면 섣부른 결과로 가기 마련입니다. 


대개 예정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 부분부터 잘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풍성하고 부요한 은혜의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예정이 가장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심지어 이 단어조차 삭제하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서를 정직하게 살펴보세요. 거의 모든 서신들의 첫 부분은 예정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가 철저하게 예정 사상에 기초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예정에 대한 고백과 복음 전도에 대한 열심이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예정을 먼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고백입니다만, 저역시 한때 예정론을 반대했던 적이 있습니다. 엄말하게 말하자면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에는 항상 예정론을 성경 밖에서의 기준과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과 성경의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예정 사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듯이 예정 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저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예정에 대한 이해와 고백이 없다면, 구원의 기초가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조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정직하게 전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 좁은 길을 가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전 삶을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고 확신하기에, 이 영적 불모지의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나아가는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경적인 깊은 사색이 없다면 저의 설명이 충분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님의 고민은 유일한 것이 아니며, 이미 교회 역사를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통하여 질문되었고 이미 성경적으로 정리된 내용입니다. 모쪼록 개혁 신앙 안에서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도움이 되는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조엘 비키, 개혁주의 청교도 영성, 부흥과 개혁사>라는 책인데요, 개혁주의적 복음전도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카페에 올려진 예정론과 관련된 여러 자료와 이미 답해 드린 내용(Q & A)도 참조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71문. 성경 계시에 관한 답변 


하얀곰(wbsfc) 님의 질문 

 

1. 성경과 같은 계시, 성경에 준하는 계시라는 말이 오늘날 말하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여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들리는 음성으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 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2.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충분하다는 말과 오늘날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다는 말은 모순같이 들리는데, 답변 주실분 없나요??



답변 드립니다.


요즘 신사도 운동이나 오순절 신학의 발흥, 그리고 신비주의 영성 운동과 이단들의 발호로 입신, 꿈, 환상, 예언. 방언등 '직통계시'과에 속하는 현상들이 어느 때 보다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토론회에서 만난 이단 교회 신자들도 그 교회 교주의 '직통계시'를 부정하는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더군요. 이단 교회에 가기 전에 부산의 모 장로교회에서 자랐다는 어떤 이는 직통계시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이단'이라고 하더군요. 또 이곳에서 각 교회에 속해 있는 부녀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정기 기도회 모임이 있는데, 여기서도 직통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칼빈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을 배격하고 직접 계시에 이르려고 하고 성경의 모든 경건의 원리를 파괴하는 광신자'라고 불렀습니다(기독교 강요 1권 9장) 


"더 나아가 성경을 배격하고 난 다음 하나님게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어떤 길을 꿈꾸고 있는 자들은, 오류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광란(狂亂) 상태에서 날뒤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요즘에는 지각없는 사람들이나 나타나고 있느데, 그들은 거만하게도 자신들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혹은 선생'으로 자칭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무시하고 그들이 말하는 소위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른고 있는 자들의 단순함을 비웃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이 영(靈)은 어떤 영이기에 그 영감에 의해 높이 올리움을 받으면서도 성경의 교리를 유치하고 비천한 것이라고 멸시하고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기독교 강요 1권 9장 1절)


앞서 이런 진술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탁으로서의 계시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매일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진리가 성경 안에서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보존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요 5:39). 그러므로 성경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기인되었다고 간주될 때에만 비로소 믿는자들 가운데서 완전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기독교강요 7장 1절) 


칼빈은 이렇게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전한 계시로서 보았으며, 이 계시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3가지 본질적 특성, 곧 성경의 필요성, 명료성, 충족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칼빈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닙니다. 경건한 종교개혁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며, 성경적 진술에 의한 주장입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에, 성경의 이러한 특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그릇되면 성경에 관한 모든 해석과 적용 자체가 잘못된 결론으로 오도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개혁(장로) 교회의 신앙 고백 표준 문서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부분을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1. 본성의 빛(light of nature)과 창조의 섭리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어서,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가 없다.(롬2:14-15, 1:19-20, 시19:1-3, 롬1:32, 2:1)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는 데 있어서 불충분하다.(고전1:21, 2:13-14) 그래서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히1:1), 자기의 교회에 자신의 뜻을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에 대비하여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위로하시기 위해서 바로 그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 두시는 것을 기뻐하셨다(잠22:19-21, 눅1:3-4, 롬15:4, 마4:4,7,10; 사8:19-20). 이같은 이유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딤후3:15, 벧후1:19). 그리하여 하나님꼐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히1:1-2)."(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항)


마지막에 '그리하여...'로부터 시작되는 문장을 주목해 보세요. 


벨직 신앙고백서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7장.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충족성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듯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이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그 속에서 지시하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태도가 그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성경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합당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말씀 외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은 모든 면에서 성경의 말씀이 완전하고 충분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의 글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세상의 관습이나 고대의 제도, 대중의 태도 그리고 사람들 또는 그들의 판결 혹은 규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는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 바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모든 것 위에 존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영이라도 배격하는 바인데, 이는 사도 요한이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10)"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으로서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가, 즉 말씀을 깨닫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될 터인데,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사실은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적 증거란 자의적인 판단이나 심미적인 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방식 역시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신 성령의 증거에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는 언제나 말씀을 은헤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때만이 그 본의를 정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령의 무오한 진리와 그것의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들의 완전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에 의해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온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벨직신앙고백서도 정경의 목록을 열거한 후에 "우리는 이 모든 성경을 우리의 믿음을 규정하며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또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성스러운 정경으로 믿는다. 이 쓰여진 모든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은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거나 승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며, 성경이 그 스스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라 할지라도 예언된 말씀이 성취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말씀을 은혜의 수단으로서 바르게 활용하지 않고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와 조명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고오는 세대 가운데 참된 교회를 지향해 오는 모든 개혁(장로) 교회의 성경 계시관입니다.


전에 올린 기독교 강요1 강독을 살펴보시면 유익할 것 같고요. 기회가 닿는다면, 지난 달에 있었던 설립 2주년 말씀 사경회 설교(1,2,3)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궁금하신 내용에 성경적 답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72문. 술, 담배 (행위)에 관한 답변 


참느린보(hwanil1) 님의 질문 

 

안녕하세요,,목사님!!!! 건강하신지요..

사회에서 전도시 또는 대화시 필요불가분하게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먹는 것은 죄다..그러면 끊고 오겠다..아직은..... 

죄가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도 죄까지는 아니라고 보고 있구요.. 실은 저도 헷갈립니다...


구약의 율법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술, 담배는 끊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몸을 쓸데없는 것으로 해할 수 없으니 끊어라...

많은 목사님께서는 죄다 하시고,,물론 저희 목사님도 그렇게 설교 하십니다.

비신자들에게 명쾌한 답을 줄 수 있는 ,,

더불어 아직도 교인 중에는 끊지 못하고 있는 형제들에게도


이야기해줄수 있는 답을 부탁 드립니다...제가 너무 성경 지식이 없는 건 아닌지요...저도 이곳에 들려 읽다 보면 창피하리 만큼 무지가 들어 납니다,,,

건강하시고요....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일간 신문 웹사이트를 통해서 '술 독에 빠진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보도에 의하면,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술 소비량이 단연 세계 최고라고 하더군요. 술 권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한국 사회의 풍토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금주(禁酒)를 지키는 일이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에는 권주 문화가 직장뿐 아니라 군, 캠퍼스, 심지어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일반화 되어간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고보니 담배도 있었군요. 확실한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담배 소비량도 아마 세계적인 수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금주, 금연에 대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신앙 안에서 이 문제로 늘 힘들어하고 가책을 느끼면서도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입니다. 


우선 한국 교회에 일반화되어 있는 금주, 금연 문화는 조금 독특한 양상을 지녔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외국 교회들보다 매우 엄격하며 때로는 금주, 금연을 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마저 지울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 교회 선교 초기에 활약했던 경건주의적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특히 1900년 초기의 선교사들은 복음으로 한국인들의 무절제한 생활 양식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부흥 운동이 일어난 곳에는 언제나 금주, 금연 운동에 대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일제 강점에 대한 반발과 국가 살리기의 일환으로 금주, 금연 운동이 기독교 단체나 교회를 중심으로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비신자들에게까지 큰 공감과 참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국 교회에서는 금주, 금연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도리처럼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초기 한국 교회의 순수한 의도를 높이 평가하며, 그로 인해 나타난 일들 역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금주, 금연 문화가 한국 교회에 고착해 가는 중에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한 일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주와 금연와 관련된 기독교적 윤리를 너무 협의적인 관점에서만 다루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금주, 금연 = 선이요, 비금주, 비금연 = 악 이다는 식의 이분법적 율법주의가 마치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인 것인양 오도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저는 철저한 금주, 금연주의자입니다. 목사이전에 일반적인 경험에 의해 보더라도 굳이 술과 담배를 해야 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 금주, 금연의 효과와 효율성을 권합니다. 


그러나 '술과 담배를 먹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술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지요. 성경에는 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부정과 긍정의 관점입니다. 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본문도 많지만, 술을 허용하는 본문도 적지 않습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술 자체가 선악의 가치를 가진 물질로 보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 기록 당시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술은 하나의 음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술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라 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행동이 죄악으로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늘 자기편에서 편의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술 애호가들이 성경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먹지 말라'고 했는가라고 따져 묻습니다. 엄밀하게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때에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고 비난하였고, 사도 바울이 감독의 자격에 대하여 논할 때에도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 사람'(딤전 3:3)을 추천하였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되며, 술을 마시는 것은 곧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완전 금주는 비성경적 가르침이며, 술을 적당히 마실 줄 아는 것이 생활의 지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늘 정당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술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적당(?) 수준에서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지킬 수 있을만큼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술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5-16)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술에 대해서 자신 있어 하거나 관심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 이렇게 말합니다. '술은 먹어도 되지만 취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술의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술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은 없지만, 그러므로 술을 (아무 때나) 마셔도 된다는 말씀 역시 없습니다. 오히려 술로 인한 타락과 방종을 경계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술취함'보다 '성령 충만'을 요구합니다(엡 5:18). 또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고전 3:16). 그리고 방탕과 술취함을 피하고 단정히 행동할 것을 강조합니다(롬 13:!3).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을 종합해 볼 때, 술을 절제없이 함부로, 그리고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로 마시는 것은 알고도 죄를 범하겠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대로 술로 인한 부정적인 염려가 있다고 하여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완전 죄악으로 단정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생활의 원칙은 될 수 있어도, 변명할 수 없는 진리나 교리는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설교자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강권적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하기 보다는 말씀과 상식으로 잘 분별하여 더 온전한 은혜 가운데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인내하며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금연에 대해서도 한 가지 말씀드리면, 저는 금주보다 금연을 더 강조합니다. 술이야 의학적으로나 건강상으로 유익이 있는 요소가 있다고 하지만, 담배는 아무리 생각해도 백해무익합니다. 


담배 성분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히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럼에도 외국에 훌륭한 신앙 정신을 가진 교단이나 교회 중에는 전통적으로 담배 피우는 일을 개인의 자유 문제로 허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화란 개혁교회 성도들도 예배 전에 예배당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일을 자주 목격하였습니다. 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신학자 중에서도 파이프를 무는 것을 취미로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목격하였을 때, 얼마나 충격을 크게 받았던지요. 그러나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담배 피는 일을 하나의 문화적 전통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존중하면서 담배의 비효율성과 건강에 미치는 해악성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교인간의 상호 배려와 절제라는 덕목을 통해서도 금연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앙있는 분들 중에 저의 말에 대해서 반박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저는 금연도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는 분들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초신자들이 금주 금연에 대해서 상당한 부담과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좀 더 너그러운 마음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에 무조건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그로 인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목회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면,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술과 담배, 그 무엇보다 신앙 안에서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진리에 대해서 힘써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인내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말씀으로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말씀 앞에 바르게 선 사람은 반드시 바른 분별과 안목과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성경적인 문제 해결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73문. 개혁주의 정체에 관한 답변 


jungyeon9450 님의 질문 


개혁주의를 공부해 나가려던 찰라에 개혁의 첫 시작은 참 좋으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결국 변질로 이어진다는 의견과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신 게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교리와 거듭나야 믿을 수 있다는 교리에 납득하지 않는 견해들로 인해서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게 개혁신앙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먼저 알길 바란다고 한다면 저는 받아들이기 어려울겁니다. 초교파입장에서 개혁주의를 보는 입장이 좋은 것만같지는 않은듯합니다. 제 주위 분들은 초교파이신분들이시구요.


혼란스럽네요.



님의 혼란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소외감을 갖지는 마세요. 


개혁주의를 잘 몰랐거나 잘못된 개혁주의를 알고 있다가 개혁주의의 핵심을 만나는 분이라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인식의 재정립 과정 정도로 받아들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동안 개혁주의와는 상관없는 신앙 생활을 해 오신 분이라면 그 혼란의 깊이와 강도가 더 할 수 있습니다. 


위에 납득할 수 없다고 예로 드신 견해들을 보니, 개혁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신 분같아 보입니다. 저로서는 무슨 연유로 개혁주의를 공부하시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셨는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바른 생각을 하셨다고 격려해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공부가 마찬가지이듯이, 왕도는 없지요. 하지만 진리를 아는 일에 있어서는 제 힘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성령께서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것이므로, 간절함과 소망으로 하시다 보면 반드시 놀라운 깨달음과 굳은 확신을 얻게 되실 겁니다. 


혹자는 개혁주의를 하나의 '~ism"이나 독특한(혹은 유별난) 사상 체계 정도로 폄하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개혁주의와 개혁신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적 기독교 사상의 진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와 개혁신앙은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전승을 가장 바르게 이어받은 사상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술을 가장 정확하게 통찰하고 해석하는 성경적 체계입니다. 


개혁주의와 개혁신앙을 자세하게 연구하다 보면,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에 관한 방대함과 일관성과 적합성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개혁주의와 개혁신앙에 대해서 관심 없는 이에게는 마이동풍과 같은 이야기이겠지요. 


아무튼 관심을 가지고 게시판에 솔직한 마음을 남겨 주셨다는 점만으로도 자격과 격려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바심보다는 진리를 구도하는 마음으로 이 카페에 올려진 자료들을 검토해 보세요. 


특히 1차 세미나(개혁신앙), Q & A 코너에 있는 자료들과 개혁주의와 관련 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어느 정도 개혁주의와 개혁신앙의 핵심과 특징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질문 잠정 중단 기간이라 간단하게 답변드림을 양해^^





74문. '구원은 취소되나요'(딤전 1:19)에 관한 답변 


안녕(kay344) 님의 질문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저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 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디모데전서 말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음을 저버려서 구원이 취소된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간단하게 답변드립니다. 


님께서는 딤전 1:19절을 가지고서 믿음과 구원 혹은 구원의 확신의 상관성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습니다. 본문 구절만 떼어놓고 본다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구원론 분야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개혁 신학적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본문 해석과 관련하여.

본절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특별한 영적 교훈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이미 앞절(1:18)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의 사명을 부여받은 디모데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에게 담대하게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1:19 초두에 언급된 '믿음과 착한 양심'은 성도가 바로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반드시 필요한 영적 도구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구체적으로는 20절에 언급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가리킴)은 이 양심을 버렸고, 이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은 본 서신(딤전)에서만 '믿음과 착한 양심'이라는 표현을 세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는데(1:5, 19; 3:9), 이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 내용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 단어의 원어적 개념을 살펴보면 보다 잘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이란 헬라어로는 '쉬네이데시스'(sunei,dhsij, 헬라어 version을 직접 인용할 수 없음을 양해바람)라는 말인데, 라틴어로는 con-scientia라고 합니다. 영어의 conscience라는 말은 이 라틴어적 표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즉 양심이란 원초적 개념의 의미로 본다면, 인간의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과 함께 하는 공동의 지식(co-knowledge)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착한'(딤전 1:5에서는 '선한'이라고 번역됨)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이 양심이 중생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착한 양심'이란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에 대해 갖게 되는 참된 (공동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특별한 지식은 바른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절의 믿음은 앞절이나 딤후 2:17, 18과 관련지어 본다면 '진리'(truth)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Hendrikson). 이와 같은 점에서 '믿음'(진리)과 '착한 양심'(거듭난 지식)은 의미적으로 상호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싸움을 위한 최고의 영적 무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과 착한 양심 없이 스스로 진리의 선생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에베소의 이단 지도자였던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그 장본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진리와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표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부연 설명하자면, 1:19에서 '파선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사메노이'(avpwsa,menoi)라는 말은 배의 닻을 던져버리게 된 결과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스스로 혹은 고의로 진실을 거부했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have rejected, NIV). 즉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인물은 말로는 율법 선생이라고 저처했지만, 그들은 고의적으로 믿음(진리)와 착한 양심(거듭난 지식)을 거부함으로써 종교적 파선에 이르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참된 구원과는 상관없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절을 근거로 구원받은 자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물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절은 바른 믿음(진리)과 착한 양심(거듭난 지식) 없이는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증거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구원의) 믿음과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실례되는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님의 질문은 앞서 설명드린 것 같이 본문 해석의 미숙함에서 연유한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적인 믿음과 확신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잘 정리되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흔히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사람 편에서 어떠한 행위로 인하여 구원의 조건으로서 믿음을 가지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은 행위의 보상이나 댓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단번에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엡 2:8; 유 1:3). 


즉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위해 믿음을 마음 가운데 주시며,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을 통하여 장성케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관한 모든 약속에 대해서 내적인 확신을 갖게 되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성령께서 구원의 완성까지 인도해 주실 것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갖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구원의 믿음 혹은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이라고는 칭하지만 이와 같은 구원의 믿음(신앙)과는 상관 없는 형태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흔히 역사적 믿음(신앙), 이적적 믿음(신앙), 일시적 믿음(신앙)이라고 구분되는 잘못된 (비성경적인)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에 구사님이 올려주신 자료와 <2주년 말씀 사경회>의 두번째 설교(말씀과 믿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믿음이 다 구원의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특히나 개혁신학에서는 참된 믿음을 위한 3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지적 요소로서의 바른 지식(notitia)과 감정적 요소로서의 동의(assensus)와 의지적 요소로서의 신뢰(fiducia)가 유기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인 혹은 종교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참된 구원의 신앙이라고 단언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확신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물론 바른 믿음은 언제나 참된 구원의 확실성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 신자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거나 약해지거나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은혜의 수단이 바르게 이행되지 못할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러한 경우는 믿음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근원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인간적 약함과 결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자는 여러 가지 계기로 인하여 믿음이 회복하여 시험을 극복하며, 온전한 확신가운데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창시지시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도를 보전하시고 견인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아무튼 확신은 믿음의 열매의 성격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고 자신 편에서의 주관적인 확신을 집착하기 보다는 진리에 합당한 온전한 확신에 이르도록 말씀에 착념하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4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과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부분을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75문.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이 참석했는지요?

그리고 찬성 18, 반대 14로 겨우 삼위일체 신앙이 가결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어거스틴이 381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잘못된 정보입니다. 어거스틴 전기에 따르면, 그는 386년 여름에 밀라노에서 말씀(롬 13:13)에 의해 전격적인 회개를 경험한 후에 이듬해(387년)에 암브로우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95년에서야 비로소 히포의 감독직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 개최된 공의회에 교회 대표로 참석했다는 말은 모순이 됩니다. 


또한 두 번째, 찬성 18, 반대 14로 겨우 삼위일체 신앙이 가결되었다는 내용도 근거 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큽니다. 혹시 역사적 근거 자료가 있다면 모를까... 왜냐하면 이 회의에는 무려 150여명의 교회 대표자들과 많은 주교들(bishops), 그리고 반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무리들의 대표자들(Semi-Arian, Macedonian) 36명도 참석하였습니다. 이 사실만 염두해 보아도 18 vs 14라는 간발의 표차로 삼위일체론이 가결되었다는 주장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76문. 칼빈주의 예정과 속죄에 관한 답변 


아키(akioe) 님의 질문 


안녕하세요.^^

가입인사를 작성하고 처음 이용하게 될 게시판이 Q&A가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운전을 하면서 교회에 오래 다니신 시설의 선생님과 신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신학대학원에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단은 장로교 고신측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그 분 또한 장로교 고신측에 몸을 담고 계시고요, 그 분은 신앙의 기간이 길다면 20년이 되는 것 같고요.


저는 어떻게 보면 급진적인 회심을 통해 신대원의 길을 가게 되어 그 분의 신앙에 비하면 병아리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 나름 진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진리를 바로 전하는 방법이 저는 개혁신앙이라고 생각하기에 평소에도 칼빈을 비롯하여 청교도 등의 서적을 주로 읽어 왔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대화를 나눈 그 분의 오빠 되시는 분은 총신대학원을 졸업하시고 타국에 오랫동안 선교를 하고 있답니다. 제가 약간의 고리타분한 면도 있고, 고지식하고 외골수 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한 번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기는 꺼려합니다. 


그래서 그릇된 은사주의나 거짓 성령운동 등에 대하여... 그리고 현 교회에 대하여... 어쩌면 어리다면 어리지만... 현 교회에 커밍아웃도...^^;

현 교회에 이야기 하면서 그리고 성도분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처음에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금 수 많은 교회가 있고 교단들이 있지만 성도분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교단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저 예배의 자리만 찾는 것 같습니다." 라고 운을 띄웠습니다.

즉, 자신이 속한 교단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다른 교단과 무엇이 다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모르고 있다는 것을 살짝 꼬집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언급을 하였습니다.

"체험신앙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믿는 것과 아는 것이 같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 같이 '교리'에 대해서 성도들은 알아야 하고 정말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어필을 하였습니다.


'교리'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 시작을 하였지요...

그러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개혁신앙을 추구하고 ~주의라고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지만 그래도 제 뼈대를 칼빈의 개혁주의로 세우기로 작정한 만큼 살은 추후에 붙여 나가는 것이겠지요...


앞으로의 세상의 흐름 속에서 기독도 강요를 즉 개혁주의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시대착오적인 것과 시대초월적인 것을 경계하며 어떠한 방향으로 제가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칼빈의 묵직한 5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없지만, 읽었던 책들을 통해서 5대 강령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에 대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함받은 사람들에 대한 제한적 속죄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은 하나님에 의한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성령님의 견인으로  결국 하나님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 또한 칼빈의 5대 강령에 대해서 바로 이해 한 상태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지 지식이 부족하기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저렇게 서술을 하고 나서 제한적 속죄 부분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분과 저와의 견해의 차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를 언급하며 하나님은 그의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셨는 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택하시고,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으며,  선택받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세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제한적 속죄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 뒤, 그 분의 의견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믿고 복음을 받아 드리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다 같은 장로교 안의 같은 교단의 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고, 신앙의 연륜은 그 분이 풍성하며 저는 한 참 어린 성도입니다. 저 또한 아직 칼빈의 5대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인구원이 아닌 즉 일반적 속죄가 아닌 제한적 속죄를 어필하였고... 예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저의 발언이 저 또한 칼빈의 제한적 속죄에 대해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라면 첨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러자 그 선생님께서는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왜 만드셨나?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실 선악과 문제는 일전에 목사님과 나눈 대화 때문에 '계약신학과 그리스도'-팔머 로벗슨의 책을 통해 깨달은 바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제가 만민구원이 아닌 제한적 속죄를 계속 어필하자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카인과 아벨 중 카인은 그럼 하나님께 선택을 받지 않고 유기된 자인가?"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께서는 저에게 한 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옳은 것이지, 칼빈을 통해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한 방법이다"


칼빈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칼빈이 정답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알미니우스가 맞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학자들과 사람들에 의해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라고 말하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신학을 공부하고 그 길을 걷기 위해 제 자신의 신앙의 뿌리와 그 골격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골격과 뿌리를 개혁신앙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제가 선택하기에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 것이 칼빈 선생님과 개혁신앙입니다. 하지만 칼빈 선생님도 그러하였듯이 칼빈 선생님을 신격화 시키지도 않으며 말씀보다 위에 두지는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질문이 길어졌네요.^^;


장로교 안에 있으면서 구원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에, 그리고 저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분이시기에 약간의 충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잘못 칼빈의 제한적 속죄를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질문을 드리자면, 

칼빈의 제한적인 속죄 부분에서 제가 그 분께 언급한 부분의 오류가 있으면 첨삭 부탁드립니다. 배우는 입장이니,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선악과에 대한 팔머 로벗슨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가 아닌 여러 목회자님들께서 해석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는지요?


끝으로, 

제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하였던 카인과 아벨에 대해서 카인은 구원에 비춰보면 그는 어떠한 자입니까? 오늘 하루종일 정신이 멍해져있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누군가에게 어필하거나 날뛰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저 한 주제를 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주제가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이 큰 줄기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교회에서 교리 공부를 해야 한다고 제가 어필을 하다가 낳게 된 문제입니다.


어떠한 가르침도 기쁘고 달게 받겠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답글을 답니다.


아키님과 같은 글을 대할 때마다 한국 교회, 특히 한국 장로교회는 여전히 개혁된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할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도 장로교회라고 하면 다 개혁된 신학과 신앙을 담보한 것인양 착각하고 있으니 개혁의 목적을 생각하면 암담하기까지 합니다. 


개혁주의라는 낱말이 한국 교회에서만큼 다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을 찾기 힘듭니다. 보수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그렇고, 현상적인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이도 다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또 주일 성수, 십일조,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이와 심지어 교히 연합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도 자신들의 사상적 근원이 개혁주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한국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역사적으로 바르게 개혁된 것을 아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무분별하게 오용되고 있는 개혁주의라는 신학 사상을 감싸고 있는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와 혼합주의와 회의주의의 표피를 벗겨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참여하였던 죠지 길레스피가 말한 '가장 좋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한 개인이나 종파적 성경의 특정 세력에 의해서 혹은 사회 문화적 영향에 민감한 개혁주의가 아니라 모든 세대를 통틀어 변함없이 고수되며, 고백되어진 개혁된 신학의 산물로서의 개혁주의의 원형을 드러내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칼빈 신학의 영향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교리가 불변하는 진리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진리 안에 확고히 서 있는 성경적 진술이므로 우리는 이 고백의 성격이 이 시대의 정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로서 판단받는 성도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개혁주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늘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란 진리에 관하여 엄밀한 인식과 통찰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결코 환영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키님의 글 속에 언급된 예정론과 제한 속죄가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일면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예정론과 제한 속죄를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매우 불쾌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은 항상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하며, 전도나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이 주제를 피해 가려거나 모종의 타협을 통해서 절충안을 만들려고 합니다. 아르미니안의 예지예정론이 나오게 된 실제적인 배경도 이와 같습니다.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드러난 아르미니안의 주장을 보면,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인간의 타락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택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종래의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안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타락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주장을 고집함으로써 보편 구원론으로 가는 문의 빗장을 활짝 열어 놓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라는 개념은 수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한 속죄를 거부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도미노적 논리는 진리에 관한 아노미적 현상을 야기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하되, 유기자에 관한 절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말하되, 하나님의 택자만을 죽으시는 것은 사람보다도 사랑이 없는 행위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이율배반적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주권의 권한은 제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 그 은혜 역시 사람 편에서 동의하는 것이어야 인정하겠다는 오만 불손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아르미니안의 발상이 도르트 회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기독교 주류 (구원) 사상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된 교회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진 것인가? 제 생각에는 오늘날 교회와 신학의 관심이 늘 인간론 중심으로 편성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예정론이나 제한 속죄론 뿐 아니라 신학의 거의 모든 테제들을 인간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예정과 택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상을 통하여 누렸던 그 귀한 보화와 같은 진리의 풍성함과 부요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혁자들은 예정론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조차 겸손과 인내를 발휘할 것과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빛을 전달해야 할 것과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향하여 성경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신앙적 근거를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예정론을 교회와 성도의 내적 성숙과 진정한 화해의 밑거름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보편적인 장로교회들은 이러한 진리의 보화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개혁주의에는 관심이 없는 명목뿐인 (자칭) 개혁주의자들에 의해서 진정한 개혁주의가 훼파되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심각하게 되돌아 보지 않는 한, 가장 좋은 개혁주의로의 회귀와 회복은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주께서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조금이나마 답변과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77문. 사도신경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구절에 관한 답변 


한마음(sjleejf) 님의 질문


사도신경 원문에는 우리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문에는 이에 대한 증거구절로 시 18:5-6; 116:3; 마 26:38; 27:46; 히 5:7 를 적어놓았는데, 어떤 구절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음부(즉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명확히 말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오히려 눅 23:43에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좀 햇갈리네요.


성경에 어떤 근거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무식한 청년이 설명을 좀 부탁 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답변드립니다. 여러 분주한 일로 인해 답변이 조금 늦어졌음을 널리 양해 바랍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위시한 전통적인 개혁 교회의 신조는 사도신경에 언급된 지옥강하 교리를 문자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지옥 강하를 표상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칼빈 뿐 아니라 그와 신학적 입장을 같이 하는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설명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러한 배경 이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지옥 강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매우 오래전에 이미 정리된 내용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4문답은 이것을 명시적으로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리서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요리문답의 순서를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승천은 역사 안에서 차례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의 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 지옥 강하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미 44문답 앞에서 위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들이 주는 모든 유익들을 언급한 이후에 이 문제를 별도로 다루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요리문답에서 사도 신경의 지옥 강하에 대해서 언급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이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개인적인 유혹과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주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지옥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즉 이같은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지옥 경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