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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레미제라블 영화에 대해 질문있어요.. 2018-06-20 12: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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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님 질문)


이 영화에 대해 여러의견을 봐왔던거같아요 제 개인적인 결론으론 성도들에게는 유익한영화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여기 사이트에서도 그렇고 제가 아는 장로님의 블로그에도 이 영화에대해 좋게 평을 해서 의아했어요.. 요즘 시대의 문화가 대부분 성경적이지 못한점이 많아 저는 요즘 관심이 많이 없어지고, 안갖으려고 하는 상황인데요 그 장로님의 블로그에서 레미제라블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한부분을 보고 여기 사이트에서 검색하니 역시나 동일하게 감동받았다는 글들이 있어서 놀랬어요 제가 혹시 신앙생활의 본질을 놓치고있는건가하는 회의감이 드는데요 어떻게 생각하는게 도움이 될까요..도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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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제가 이 영화(레미제라블)를 보고서 ‘살며 생각하며’ 코너에 쓴 짤막한 감상글을 보신 것 같네요. 그런데 그 일이 (저의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님의 신앙생활에 회의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재가 되었다면 이제라도 유감을 표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자연에 대한 느낌이 제각각일 수 있듯이 영화에 대한 감상도 다를 수 있기에 존중할만한 의견 차이 정도로 치부하고 슬며시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으나 질문의 의도가 한 영화 자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경적 혹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속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라는 중요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되어 몇 자 적습니다.

 

사실 님의 질문 요지는 개인의 물음이 아닙니다. 지난 이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정말 쉼 없이 물음과 답변을 반복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주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한 관심거리인 반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주제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주제에 대하여 관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은 타락한 세상과 범속한 문화 속에 거룩성을 지닌 존재로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어떤 영적인 부담감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정신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 - 예를 들어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골3:1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에 충실하고자 하는 신앙적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건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와 대중문화 혹은 대중예술 사이에 대립과 긴장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기독교는 대중문화를 적대시하는 종교이어야 한다거나, 모든 형태의 세속 문화를 기독교적인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속문화를 바라볼 때, 두 가지 형태의 위험을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기독교와 세속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입니다. 모든 문화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인 문화 마인드를 읽을 수 있지만, 이 점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세속문화 속에서 기독교와 복음이 가진 고유한 위치와 역할을 혼동하게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어떤 특정 문화나 이념에 기독교를 철저하게 밀착시키고 의존하려 할 때,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은 쉽게 상실하며, 급속도로 타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독교와 세속문화를 배타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이 견해는 세상성으로부터 기독교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감가는 면도 있습니다만, 복음의 근본 정신에 위배되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세상에 대한 주권과 섭리, 교회와 성도에게 주신 신앙적 소명과 문화적 사명을 거부하면서 기독교를 믿음의 합리성보다는 불합리성이 주관하는 허무하고 불안하고 계율적인 종교로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 영지주의, 재세례파, 신비주의적 수도원운동 등에서 나타난 변질된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경향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방식에 대해 중대한 오해와 오류로부터 비롯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상 이 세계가 죄에 물들어 있으며 사탄과 그를 따르는 권세자들이 부단히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의도와 활동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약화시키거나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적인 문화를 세속적인 것으로 쉽게 단정하지만, 창조 질서에 반하지 않는 현세적인 문화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창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은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조차 보편 은혜의 방식으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약 1:17)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거듭남과 상관없는 많은 사람들이 각종 분야에서 탁월한 지식과 천부적인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발휘하여 사회와 인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매우 바람직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끼친 영향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미술, 음악, 문학 등 예술분야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적 실재와 비종교적 실재를 서로 혼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예술적 자유와 가치를 발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무대로 보았으며, 루터의 말대로 예술은 신학에 버금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 운동과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다 현세적인 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신학적, 영적,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입각한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와 과학자와 교육가들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온 세계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선물을 사용하여 세상과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세상가운데 보내신 소명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자신이 이룬 성취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선물 때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베푸신 일반 은총을 통하여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또한 그것들을 통해 온 세상을 섭리하시는 수단으로서 활용하심에 있어서도 전혀 모자름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비중생자에게 부여해 주신 하나님의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서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비록 통치자가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권세가 하나님께로 왔음을 알 때, 그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를 통치하는 대리자로 인정해야 하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지식과 재능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치와 미(美)와 공감을 나타낼 때, 그것이 불신자의 손을 통한 일이라고하여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의 몸짓을 통하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은 범위에서 예술의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예술의 자유를 대하는 성도와 불신자의 태도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는 어리석고 경솔한 욕망에 이끌려 이 자유를 방종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는 그들의 작품 속에서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도 결코 감출 수 없고, 침범될 수 없는 비범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일반 은총의 성격은 구원으로 이끄는 지혜를 선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을 더 찬양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세상의 어느 분야이든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시하는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와 상관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행위자가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간에-세계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독특한 창조의 원리와 문화적 사명이 내재해 있습니다.

 

불신자는 비기독교적 영역 가운데, 즉 세속적인 환경속에서만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찾지만, 성도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곳에서조차 은혜의 영역을 주관하시며, 주권과 섭리로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를 향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환경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러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난 초월적이고 비의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라고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삶의 영역과 차단된 도피적이고 비현실적인 교회를 세우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향해 그러한 환경 가운데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사색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 명령은 세속성이 가득한 문화 속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행동의 규범을 제시해 줍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현세적인 기존 문화에 적응하거나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벗어나는 생각과 행위를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서 창조의 원리와 문화적 사명에 합당한 문화적 행위에 동참하며 산출함으로써 자신과 같이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문화도 완전한 구속을 바라보며 날마다 말씀 안에서 갱신하고 변혁해 가라는 강한 권고가 담겨 있습니다.


답변을 맺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김병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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