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탐방과 후기

제목성경신학회 '바빙크의 밤' 후기2018-06-28 11: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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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경신학회 신앙세미나('바빙크의 밤') 후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과 한국 교회의 신앙'




● 일시 : 2013. 10. 21.(월) 오후 7시~9시


● 장소 : 신반포중앙교회 대예배실






무르익어가는 10월의 가을밤, 아름다운 음율로 적시는 콘서트보다 더 의미 있는 신학의 향연(饗宴)이 벌어졌다. 일명 ‘바빙크의 밤’ 행사가 그것이다. 10월 22일, 2013년 종교개혁기념일을 맞아 한국성격신학에서 주최하는 신앙세미나가 신반포중앙교회 대예배실에서 열렸다.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과 한국 교회의 신앙’이라는 주제로 네 명의 신학자의 발표가 있었다. 사회자는 이들을 가리켜 음악의 마에스트로에 비유하여 신학의 명장(明匠)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한지는 각자가 판단할 소관이지만, 적어도 어느 콘서트에서는 들을 수 없는 깊고 중후한 신학의 선율을 들려주었다는 점에서는 동의할만한 표현이었다. 




이승구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남규 박사(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김병훈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김성봉 박사(대신총회신학교)는 바빙크의 신학에 관한 네 편의 소논문을 발제하였다. 강의 외적인 면에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발제자 모두가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현직 교회 선생들인데다 필자와도 교제를 나누는 분들이라는 점이다(친밀도에 있어서는 약간의 온도차가 있지만).


 


먼저 발제를 맡은 이승구 박사는 ‘헤르만 바빙크의 삼위일체론’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바빙크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을 세 가지 관점- (1) 계시에 유의하는(충실한) 삼위일체론 (2) 가장 균형 잡힌 삼위일체론 (3) 실천적 함의를 제시하는 삼위일체론 -에서 설명하였다. ‘삼위일체의 고백은 기독교의 요약’,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없이는 ‘창조도, 구속도, 성화도 순수하게 견지될 수 없다’는 바빙크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개혁주의 신학자 중에서도 가장 역사적이고 균형 잡힌 삼위일체론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박사는 바빙크는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균형잡힌 개혁신학자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였다. 개혁신학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위안과 확신으로 다가올 표현은 없을 듯하다. 




이 박사에 의하면 바빙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을 사색하는 신학자이다. 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도 삼위일체론에 관한 그의 논거를 신뢰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올 초(2월)에 동 기관 제31차 정기논문 발표회-주제: ‘헤르만 바빙크의 언약 사상’-에서처럼 이번에도 그의 언약사상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유기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삼위일체론의 방식과 특성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삼위일체를 시사하는 증거로서 이해되는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한 바빙크의 다른 견해를 조심스럽게 소개하면서도 그의 삼위일체론은 고전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매우 충실하며 탁월한 설명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는 논조로 부각하였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고전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바빙크의 추체적인 정리와 삼위일체성의 실천성에 대하여 충분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청자들의 이해에 맡긴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대신에 이 박사는 바빙크의 삼위일체 논의의 문제점에 대하여 시간을 할애하여 설명하였다. 자연 가운데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유비와 삼위일체론과 창조론의 관련성과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을 피조된 세 천사들로 보는 방식과 은혜와 자연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다소 의문과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겸손하게(?) 지적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이 박사의 전언대로 바빙크의 큰 기여에 비하며 매우 사소한 것이겠으나 보다 더 개혁적인 신학의 온전함을 희구하는 신학자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바빙크의 신학적 전제에 있어서(특히 신론에서) 계시의 점진성과 유기체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게 될 때, 역사 속에서 계속적이고 다양한 경륜의 방식으로 계시와 언약이 발전되고 진보되고 있다고 봄으로써 신구약의 실체적 통일성에 대하여 반하는 주장을 하는 개혁주의 전통 밖에 있는 자들에게 원치 않게 혐의를 제공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는 우려가 생긴다. 다분히 역사를 전거로 한 계시의 점진성과 유기체성 이론은 계시의 주체와 언약의 주체를 신론적으로보다는 인간론적으로 보는 관점이 우선시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바빙크의 신학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충실하게 변호하며 계승하는 자리에 있다고 할 때, 계시와 언약의 점진성과 유기체성을 언급할 때에 오해가 불거지지 않도록 하는 주의가 더 요구되리라 생각된다.


 



▶ 신앙세미나 강의안




두 번째 시간에는 이남규 박사가 ‘헤르만 바빙크의 타락전/후 선택설의 이해’에 대하여 발제하였다. 이 박사는 우선 주제의 난해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타락전/후 선택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타락전/후 선택설은 영원속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점과 이 이론들은 개혁교회 안에서 둘 다 인정되어 왔다는 점을 분명히 고지하였다. 이 박사에 따르면 바빙크는 이 논제에 관하여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바빙크가 보는 어거스틴과 칼빈에 대한 평가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즉 어거스틴과 칼빈에게서 타락전/후 선택설의 관점이 혼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제와 관점에 있어서 타락전/후 선택설의 입장을 취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두고 그들이 타락전/후 선택설 중 하나를 일방적으로 택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 박사는 이중예정론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 타락전선택설에 관한 강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바빙크가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의 초점은 그들을 타락전선택설자로 규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전/후 선택설의 중심구조와 원리를 드러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바빙크는 타락전/후 선택설 중 어느 것 하나를 더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두 견해의 차이를 본질적인 신학의 차이로 보지 않고 작정의 순서에 대한 이해 차이로 본다. 타락후선택설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순서를 택하는 반면에 타락전선택설은 이상적이고 목적론적인 순서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박사는 이러한 논지를 바탕으로 타락전/후 선택설은 구별없이 개혁파 모두에서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으로 수용될 뿐만 아니라, 선택과 유기와 관련하여 ‘허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결론적으로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면서 바빙크는 이 두 가지 견해는 각자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만하고 풍성한 성경의 진리를 모두 내포하지 못하며, 엄밀한 신학적 사고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 점을 분명히 시사하였다. 그럼에도 바빙크는 타락전/후 선택설은 둘 다 성경에 근거를 두고 주장하였고, 개혁교회 안에서 둘 다 인정되어 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 논의가 주는 유익에 대해 강한 긍정을 보이고 있다. 




이 박사는 바빙크의 입장을 증빙할 목적으로 16세기 개혁신학자들의 견해를 곁들여 설명하였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신학자인 다니엘 토사누스와 도르트 회의를 주도한 고마루스와 같은 타락전예정론자조차도 타락후예정론에 대하여 완전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박사는 타락전/후 선택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함께 바라보며, 시간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내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논제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발제를 마감하였다. 




다만 이러한 이해와 설명은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 바빙크의 신학적 특색을 잘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바빙크의 실제적 의도와 상관없이 마치 그의 신학이 양비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또한 타락전/후 선택설에 관한 엄밀한 탐구를 시도한 신학자들의 수고를 한 순간에 무력화시키는 해설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강의의 내용과 별개로 사족을 붙인다면, 비교적 핵심을 잘 드러낸 강의였음에도 답변하는 태도에 있어서 신학자로서의 경륜과 겸손이 좀 더 묻어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세 번째로 김병훈 박사의 ‘『개혁교회학』에 나타난 헤르만 바빙크의 천주교 은혜-공로론의 정리에 대한 요약’이라는 제목의 발제가 이어졌다. 김 박사는 발제를 시작하기에 앞서 논문 준비가 여의치 못했던 상황에 대하여 양해를 구하면서 주제와 관련하여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제한된 요약적 설명임을 인지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완성도가 높지 않은 논문이었기에 오히려 바빙크의 목소리를 좀 더 생생하게 엿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발제자의 주관적인 이해나 해석보다는 바빙크의 신학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가 이 주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듣는 이들에게 통찰력 있는 흥미를 제공하였다. 김 박사의 관심은 어거스틴의 노력으로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에 의해 펠라기우스주의와 세미펠라기우스주의가 배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주교회의 전통 속에 슬며시 다시 기어들어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다. 첫째, 천주교회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비록 의지가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결코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둘째, 천주교회는 선수조치 은혜, 곧 선행은혜(garatia praveniens)을 어거스틴과 다르게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은혜론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근거로 천주교회의 은혜론에 대한 바빙크의 판단을 열 가지 내용으로 압축적으로 소개하였다. 


(1)죄로 인하여 의지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섭리의 도움을 받아 여전히 자연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다. 


(2) 은혜의 도움이 주어지기 이전에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자연적 능력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게 된다. 


(3)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준비는 선행은혜(자력은혜)의 도움이 있을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이 도움을 받아 주입된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면 선행은혜는 협력은혜가 변한다.


(4) 의롭다함을 받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준비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①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시작하고, ②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③하나님의 긍휼을 소망 중에 바라고, ④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⑤죄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⑥스스로 세례받기를 결심하고, ⑦새 생명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5)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 상태의 능력을 다하고, 선행은혜의 도움을 받아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일곱 단계의 준비를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주입된 은혜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6) 일곱 가지 가운데 믿음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인 동의와 실행의 초보 단계로 아직은 주입된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롭게 하는 믿음은 아니다. 이 믿음은 그 자체로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의 출발점이다.


(7) 이러한 준비 후에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성사 안에서(통해서) 주입된 은혜를 받게 된다. 주입된 은혜는 모든 죄책과 죄의 오염에서 구원하며, 내적으로 새로워지며 신의 성품이 분여되는 은혜이다. 


(8) 이 주입된 은혜에 세 가지 신학적 덕목들(믿음, 소망, 사랑)이 더하여 주어지며,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덕목으로서 성령의 내주와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9) 주입된 은혜와 그것으로 인한 신학적 덕목들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선행을 하게 되며, 이로써 적정공로를 이룰 수 있게 된다.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의롭게 된 사람은 ‘그가 행한 선행으로 진실로 은혜의 증가와 영생을 공로로 이루고, 은혜 안에서 죽는 경우 영생 자체를 얻게 되며, 또한 영광의 증가를 얻는다’고 진술한다. 


(10)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경건에 탁월한 자들이며, 성인들이다. 이들은 의무 이상의 공덕을 행함으로써 넘치는 공로를 획득하며, 이것은 교회가 보기에 적합한대로 나누어 줄 수 있다. 교회는 면죄부라는 방편을 통해서 잉여공로를 가진 자의 공로를 부족한 자들에게 전이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상술한 천주교회의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중생(구원)은 실질적으로 교회의 중재와 인간의 노력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 박사에 따르면, 바빙크가 보는 천주교회의 은혜론은 원리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의 그것과 같은 정신 위에 있다. 김 박사는 결론적으로 천주교회가 우리와 같은 신학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개념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하면서, 종교개혁신학은 오직 성경에 의해 지지를 받아야 하며, 성경에 의해 지지를 받는 한 여전히 존중되며 고백되어야 할 생명의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천주교회의 신학적 문제를 평가할 때, 무조건적이거나 감정적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극히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우선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쟁점이 되는 신학 언어에 담긴 개념을 정밀하게 분석함과 동시에 인내를 갖고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김 박사의 발제는 바빙크 신학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엄밀한 개혁신학의 지향점을 나누고 도전받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발제자의 바람처럼 이 논고가 확장되어 음흉한 천주교회의 신학을 격파할 수 있는 훌륭한 논문으로 재탄생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최근 불고 있는 바빙크 신학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시간에는 김성봉 박사의 ‘바빙크의 성찬론’에 관한 발제가 있었다. 김 박사는 논문 주제와 관련하여 자료의 제한성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글리슨(Gleason)의 아티클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는 것을 먼저 시사하였다. 그렇다하다 보니, 논의 전개에 한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글리슨이 쓴 안경이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는데, 그의 안경으로 바빙크를 보아야 하는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바빙크의 성찬론의 핵심을 무난하게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었다. 




김 박사는 바빙크의 성찬론을 몇 가지 주제(식사로서의 성찬, 말씀과 성례 사이의 관계, 성례가 말씀이 주는 것과는 또다른 은혜를 주는가, 신비적 연합, 성찬에서의 현존의 방식 등)를 중심으로 집중하여 다루었다. 바빙크는 성찬의 기원을 유월절과 관련하여 이해하였으나 이때의 제사로서의 성찬의 성격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 완전히 성취됨으로써 ‘거룩한 만찬’ 또는 ‘주의 만찬’으로서 교체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찬은 더 이상 희생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하며, 그 희생으로 인해 주어지는 유익들을 그리스도의 인격적 교제 속에서 나누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찬상은 로마 교회처럼 제단에서가 아니라 식탁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김 박사는 성례는 말씀 없이는 어떤 새로운 것도 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하면서, 이는 개혁파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인 동시에 바빙크의 일관된 견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성찬에서 강화되는 그리스도의 교제역시 오직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통해서 발생하며, 믿음으로서 말씀으로부터 받은 것을 강화시키고 확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성찬론에 있어서 칼빈의 입장을 충실하게 고수하는 바빙크는 성찬시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긴밀한 연합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좀 더 괄목할만한 진보를 보인다. 김 박사에 따르면 이 연합은 ‘신비로운 연합’인데, 이것은 바빙크가 이해하는 성찬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핵심적 사상이다. 우리는 신비로운 연합에 의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전체(total Christ)와의 항구적인 연합을 경험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보화와 유익을 나누게 된다. 그러면서도 바빙크는 성찬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찬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선물, 그리스도의 유익,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하였다. 또한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방식은 로마교나 루터파와 같이 육체적으로 받는 수동적으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신자들에게 영적인 음식으로 나누어주는 것으로서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영적이며 실재적인 현존이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더불어 성찬의 약속들과 유익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하는 성령의 사역이 반드시 요청된다고 지적하였다. 




결론 부분에서 김 박사는 바빙크의 성찬론은 철저히 칼빈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단순히 칼빈을 노예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특히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현존 방식과 관련하여서는 칼빈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면을 보여주었다고 격찬하면서 발제를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짙게 남는 발제였다. 앞서 언급한 자료의 제한성외에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인해 강의 내용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 제한된 자료와 시간 속에서도 비교적 짜임새 있는 논문을 완성시켰지만 주마간산식 설명될 수밖에 없는-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상황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가는 말


바빙크의 저서를 대할 때마다 거대한 대양 위에 작은 돗단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신학의 지평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만큼, 부족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만큼 넓고 깊다. 그의 광대한 신학적 지식, 진리에 천착하는 연구열, 핵심을 드러내는 논리와 탁월한 설명,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성품,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신앙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신학자와 신학도가 과연 누구겠는가? 그와 같은 경건하고 지식 있는 신학자들이 조국 교회에 소개된 것은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은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중하고 겸손하게 진리의 중심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던 가장 성경적인 교회가 이 땅 곳곳에 현저하게 세워지기를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아름다운 가을밤에 좋은 강연을 들을 기회를 마련해 준 네 분의 발제자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주나그네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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