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탐방과 후기

제목성경신학회 제33차 정기논문 발표회를 다녀와서2018-06-28 11: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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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회 제33차 정기논문 발표회 후기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과 우리”


 


최근 국내 개혁주의권에 불고 있는 화란 개혁신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한국성경신학회는 지난해(2013년 2월) 헤르만 바빙크에 이어 올해(2014년 2월)는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와 시도라고 여겨진다. 친구인 김진옥 교수의 말처럼 성경신학회 논문 발표회는 (청중의 입장에서) 신경 쓸 것 없어서 편하다. 순서도 단출하고 내용도 알차서 꼭 찾게 되는 행사이다. 어림잡아 지난번 바빙크 논문 발표회때 만큼은 아닌 듯 보였지만, 이번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지평 확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논문 발표회 논문집




논문 발표회에서는 네 분 학자의 발제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카이퍼 신학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과 긍정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분위기였다. 최근에 화란에서 학위를 마친 두 분이 발제자로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만한 부분이었다. 저마다 논문 주제가 달랐지만 마치 한 편의 논문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이퍼 신학에 대해 안정감과 신뢰를 부여하려는 발표자들의 일치된 신학적 경향이 고스란히 묻어난 결과이다. 이는 개혁신학의 문외한을 위해서는 매우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설정된 학문적 일관성은 학문 동기의 신선함과 도전 정신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겠다는 (약간의) 우려가 들었다. 전체적으로 카이퍼 신학에 대해 기존의 알려진 내용에서 특별하다고 할 만한 진일보한 탐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인상이 들었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비신학자인 조무성 박사의 견해를 제외하고는 이전에 듣고 알고 있던 내용들의 반복과 확인이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주최측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거나 논문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 학회는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잘 감당하고 있는 것 같다. 상아탑에서의 신학이 아니라 일선 목회 현장에서의 신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첨예화된 신학 논쟁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체계로서의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일인만큼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보다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이해와 적용을 강조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이 학회의 논문 발표회를 기꺼이 찾는 이유이며, 이와 같은 행사들이 이곳저곳에서 더욱 흥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강의 중인 김진수 박사




발표된 네 편의 논문 제목과 발제자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김진수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소고(小考)’ 박태현 박사(총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카이퍼와 공적신학의 영향 : 한국교회의 발전적 적용’ 조무성 박사(고려대학교 행정학)


●‘카이퍼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승구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짧은 논문이지만 주제 의식이 잘 반영되었다.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하고 쉽게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다음호(제33호) ‘교회와 문화’지를 통해 논문 전문이 소개될 예정이니 여기서 구체적인 언급은 삼가도록 하겠다.


 


다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에게 카이퍼는 여전히 암중모색(暗中摸索)의 대상이다. 그의 확고한 신앙과 천재적 사변을 통해 엄청난 통찰과 위로를 얻는다. 동시에 그가 남긴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숙제는 언제나 나에게 버거움과 갈등을 유발한다. 그래서 현재로서 나의 목표는 ‘카이퍼 극복하기’가 아니라 ‘카이퍼 이해하기’에 머물러 있다. 어느 정도 이 목표 지점에 다가가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책읽기와 숙고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내달 SDG 독토 모임에서 그의 명저 ‘칼빈주의 강연’을 소개하고 나누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주나그네


201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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