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G 탐방과 후기

제목2014 서울 퓨리턴 컨퍼런스 후기2018-06-28 11: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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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네 번째 월요일(9. 22), ‘퓨리턴 신학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열린 <2014 서울 퓨리턴 컨퍼런스>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개최되는 행사라는데 처녀 참석이었습니다. 반나절동안 6명의 전문가들의 발제가 숨가쁘게 이어졌습니다.




강의별로 난이도와 관점(수준?)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있게 준비한 컨퍼런스였습니다. 발제자 중 세 분은 구면이었지만 나머지 세 분은 처음 뵙는 분들이었습니다. 낯선 발제자와 색다른 주제를 만나는 것은 항상 묘한 기대감과 긴장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나에겐 이런 곳(컨퍼런스나 세미나)을 찾는 동기이며, 그곳을 즐기는 재미이기도 합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나마 평을 남깁니다. 누가 저에게 논평을 요구하거나 기사를 작성할 요량은 더욱이 아니기에 제가 관심있게 들은 내용을 중심으로만 간단하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원하는 분은 주최측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될 강의를 청취하거나 강의안을 구입하여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발제1: 개혁주의 청교도 고전들과 나의 사역(서문 강 교수)


청교도고전들과 나의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구분하자면, 후자에 방점을 찍은 강의였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개인 간증을 방불케한 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일전에 발제자를 직접 인터뷰하여 소상히 들었던 저로서는 다른 강의에 비해 매리트가 없는 강의일 수도 있었으나, 은혜받는(?) 분들의 입장을 배려하여 처음 듣는 자세로 애써 임하였습니다. 제가 진행한 인터뷰에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있으니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로이드 존스를 향해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마다하지 않는 발제자의 모습 속에서 개혁주의를 향한 도전과 한계라는 모순을 이번에도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청교도 고전을 많이 읽고, 열심히 번역하자'는 한 줄 평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발제2 : 청교도 신학 지도 그리기와 한국 교회(서창원 교수)


청교도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들의 신학적 특징을 쉽고 간결하게 쓴 논문입니다. 아카데믹한 논문은 아니지만 청교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일반 성도라면 도움이 될만한 자료가 아닐까 싶습니다. 강연 초두에서 발제자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언젠가부터 청교도라는 용어에 늘 익숙해 왔지만 사실상 청교도들을 욕되게 하는 삶은 아닌지를 곰곰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나 저를 포함하여 개혁주의를 신학적 원리로 표방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발제자는 강의 말미의 한국의 개혁파 교회를 위한 제언이라는 제하의 글에 대한 설명에서 이 부분을 힘있게 설파하였습니다.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논문 발표가 아니라 설교나 강연이라고 하였다면 더 좋을법하였습니다. 어떤 대상에게 향한 강의인가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맹점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 감정을 고조시키는 언법과 제스쳐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논문발표라면 보다 정연한 논리와 차분한 화법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회 개혁이란 목소리를 높이고 공감을 이끌어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프로그램에 동참하자도 해서 개혁이 현실화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개혁을 위해 나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조금이라도 개혁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약간 식상한 결론과 교훈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제였습니다.


 


발제3.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이승구 교수)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청교도와 청교도주의에 대해 부쩍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청교도라는 단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 발제자는 서론에서 ‘단 하나의 청교도 사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표현으로 정확하게 짚어내었습니다. 청교도주의는 분면 칼빈주의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지만, 역사적 칼빈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청교도주의 안에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사상과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발제자에 따르면, 청교도주의가 갖는 다양성 속에서 역사적 칼빈주의와 일치하는 내용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우리(개혁주의자)가 가야할 노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 논문이 작성되었습니다. 




발제자는 모든 청교도의 공통분모가 되는 다섯 가지 특징을 매우 긍정적 시각에서 다루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주제였던 ‘청교도의 가장 큰 기여: 성경 번역과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라는 항목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언급된 내용을 조직신학적으로 다룬 것은 이 논문의 백미였습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설이 타락후 예정설 입장을 온건히 표현하였다고 정리한 것은 좀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두 번째 장에서 예배개혁과 관련된 청교도들의 적극적 노력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발제자는 청교도들이 말하는 예배 모범과 장로교에서 말하는 예배에 관한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를 일반적 관점에서 유사성을 언급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과연 모든 청교도가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듭니다. 청교도 안에 다양한 교파적 입장이 있었던만큼 예배에 관한 이해와 적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본 논문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개혁파적 청교도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와 청교도를 흠모하는 이라면 강추합니다.


 


발제4: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조현진 교수)


발제4~6까지는 청교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관련된 논문입니다. 발제자는 논문 초록에서 이 논문은 에드워즈가 17세기 뉴잉글랜드에 일어났던 율법폐기론 논쟁과 18세기 급진적 이단(새빛파)적 주장에 대해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어떻게 변호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 교훈을 한국 교회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역사신학 전공자답게 율법페계론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교회사적 고찰한 후에 17, 18세기의 율법폐기론 논쟁을 중심으로 주제를 이어갔습니다.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의 율법폐기론 논쟁의 중심에 존 코튼이 있었다는 것을 새로운 배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코튼과 헛친슨의 관계나 에드워즈와 새빛파의 논쟁을 소개하는 대목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교회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는 교훈을 새삼 곱씹는 시간이었습니다. 발제가가 논문 말미에서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이 부분을 언급하기는 하였습니다만, 언급에드워즈에 의해 부정(否定)되었던 율법폐기론과 급진적 새빛파의 그림자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더 짙게 드리워져 있는 형국을 생각하면 안타깝지 그지없습니다. 그럼에도 논문에 관해 한 가지 아쉬움을 전하면, 제목으로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에 대한 논문처럼 보이나 주로 율법폐기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반박에 역점을 둔 서술이었다는 점에서 논문 제목에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짧지만 알찬 정보가 있는 논문이어서 후한 점수를 매깁니다.


 


발제5: 퓨리턴과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과 한국교회(정성욱 교수)


개인적으로 이번 컨퍼런스중에서 흥미와 논란이 가장 컸던 논문이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성경 해석을 모형론적 성경 해석적 관점에서 분석한 점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안다면 모형론적 해석이 주는 유익에 대해 부정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성경 스토리를 말해 줄 때, 이 해석 방법을 차용하여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형론적 성경해석이야말로 가장 성경적이다라는 주장이나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신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결론짓는 부분에 있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좀 지나친 주관과 확신에 의한 결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발제자는 성경적인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위해서는 균형잡힌 조직신학과 교리에 대한 철저하고 면밀한 지식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자의적이고 무책임한 해석 시도의 우려를 전달하기는 하였으나, 정작 에드워즈가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어떻게 적용하였는지에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지 않음으로 인해 논문에 대한 안심성과 신뢰성에 약점을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이 좀 더 보강된다면, 보다 좋은 논문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봅니다.


 


발제6: 다성학적 에드워즈 연구와 수용론을 향하여:현대 에드워즈 연구의 지도그리기 및 한국의 수용론(심현찬 교수)


다성학적? 심오한(?) 논문 제목만큼이나 여섯 편의 발제 가운데 가장 깊고 잘 숙성된 아케데믹한 논문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발제자는 에드워즈에 관한 국제적인 연구 동향을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교회의 수용론적 측면에서 에드워즈의 신학 지도를 제시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그린 지도는 평면적 세계전도가 아니라, 세밀한 측량도구를 사용한 실측도와 지형도였습니다. 내용과 각주만 보더라도 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발제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덕분에 에드워즈에 대해 잘 몰랐던 영역에 대해 좋은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발제자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시종 진정성있게 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발제를 마친 후에 다소 다른 관점에서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표출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성의 있는 태도로 답변하는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형태의 논문이 일반 목사나 성도를 대상으로 하는 자리에서 굳이 발표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고, 논문의 성격 자체가 너무 학문적 관심에 매몰된 것이 아니냐는 항의를 받을 만한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 연구 결과를 교회 앞에 겸손히 내어놓는 것은 교회의 선생으로서 마땅한 역할과 사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정답지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본 논문에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 이토록 에드워즈에 대해 밀도있는 연구가 시급한지에 대해 나로서는 아직 충분하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개혁주의 내에서도 에드워즈는 찬반과 공과에 대한 의견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일각에서 에드워즈를 모든 것의 정답인 것처럼 조장(?)하는듯한 현상을 볼 때마다 에드워즈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과연 조국의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과 보탬이 될지 확신보다는 우려가 앞서는 게 사실입니다. 학자에게는 탁월한 지성과 창조적 열정과 끝없는 호기심이 필요하지만,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는 무엇을 공부하고 밝히든지간에 하나님의 대한 경외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성도를 섬기고자 하는 진심으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암튼 본 논문 덕분에 에드워즈에 대해 좀 더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는 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나그네


201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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