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원 목사 인터뷰

 

l 주나그네 목사
서 ㅣ 서창원 목사

: 반갑습니다. SDG개혁신앙연구회 인터뷰에서는 한국 개혁주의와 청교도 신학 운동에 있어서 견인차 역할을 하고 계신 서창원 목사님을 뵙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특별히 의미 있게 생각되는 것은 올해로 종교개혁 496주년을 맞이하는데, 종교개혁과 관련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시기에 오늘 인터뷰가 더욱 기대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우리 연구회에 참여하는 분들 중에 목사님을 알고 계시거나 목사님 사역에 대해서 익히 들어본 바 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인터뷰를 요청한 분들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하신데요.

서: 아이고… 주여…(웃음) 부족한 사람을 인터뷰에 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제가 그런 자격이 되나 하고 굉장히 망설이긴 했지만,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후배들에게 좀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람과 무엇보다도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는 겸손한 마음에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런 방식의 인터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좀 미안한 생각이 앞서네요.

: 무슨 말씀을요. 저희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지요. 어떤 계기로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었나요?

서: 저는 전주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어렸을 때 전주시 호성동에 있는 호성제일교회를 몇 번 나갔어요. 그때 기억나는 것은 누가 내 신발을 훔쳐가지 않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배시간에 눈 뜨고 신발장에 있는 신발이 제대로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열심히 쳐다봤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저같이 전후(6.25전쟁 후)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당시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에 교회에서 주는 특별한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서 주로 교회를 가지 않았나 생각돼요. 그런데 우리 집안은 전통적으로 불교 집안이어서 사실상 교회에 가는 것은 금지사항이었어요. 그래서 교회에 간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야말로 놀이 삼아서 간 것이지 하나님을 믿고자 해서 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 그랬나요?(웃음) 초등학교 때 일이지요?

서: 예.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갔어요. 그때 마침 왕십리 교회 근처에서 살았었는데 중학교에 가면서 같은 반이 된 친구가 그 교회를 다녔어요. 그 친구가 “교회 가지 않을래?” 그래서 “교회가면 예쁜 여학생들이 많냐?”고 물었어요. 당시 10대 아이들의 관심이 그거였으니까.(웃음) 친구가 교회가 가면 예쁜 여학생이 많다고 해서, 사실은 예쁜 여학생 만나러 교회를 간 거죠.

: 이성에 빨리 눈을 뜨셨네요.(웃음)

서: (웃음)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회심을 경험했어요. 하나님께서 로마서 6장 23절 말씀(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으로 내게 구원의 확신을 보여 주셨어요. 그때 이후로 고등학교 3년 동안 꼬마목사라는 별명으로 통했어요. 그때 나는 목사가 되는 게 뭔지도 몰랐었는데, 나중에 생활기록부를 보니까 고등학교 전 학년 선생님들이 한결같이 저의 장래희망란에 목사라고 적어 놓으셨더라고요. 저한테 물어보고 하신 게 아니라 저의 생활을 보시고서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해서 아이들이 오기 전에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었어요.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다시 교회로 가서 기도한 후에 집에 돌아갔어요.

: 불교 집안이라고 하셨는데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어요?

서: 제가 집안의 장손인데 예수 믿는다고 엄청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님이 9남매 장손이신데 저를 마흔 한 살에 늦게 낳으셨기 때문에 옥이야 금이야 곱게 키우셨죠. 그런데 신앙 문제로 갈들을 빚게 되니 얻어맞기도 많이 맞고, 때론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어요. 고등학교 3년 내내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그 덕에 부모님을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굉장히 많이 체험했어요. 그중에 기억나는 것이 설교에요. 사실 설교를 맨 처음 시작한 게 고등학교 3학년 때에요.

: 주일학교 아이들에게요?

서: 아니요. 고등학생들한테.(웃음)

: 고등학생이 고등부 학생을 대상으로요?

서: 한번은 학교의 기독학생회에서 미사리로 수련회를 갔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날 저녁에 목사님과 담당 선생님이 못 오셨어요. 그때 고3 선배가 저 하나뿐이고 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설교를 하게 되었죠. 무슨 설교를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어쨌든 정말 하나님 은혜로 수련회 첫날 저녁 집회가 잘 마무리되었어요. 사실 고3때 수련회를 참석하게 된 것도 부모님께는 거짓말을 하고 간 거예요. 집에다가는 학교에 간다고 하고서는 수련회에 몰래 참석하게 되었던 거죠. 어쩌면 퇴학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큰 문제없이 일이 마무되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던 것 같아요.

: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그럴만한 믿음을 가질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열정적인 신앙을 가졌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서: 회심의 결과인 것 같아요. 그리고 교회에서도 가르침을 잘 받았어요. 저는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는 일이 너무 좋았어요. 그 당시 SCE라고 ‘기독학생면려회’라는 학생 연합 모임이 있었어요. 전국 기독학생면려회 수련회에 참석하여 만난 대구에 사는 어느 여학생과 펜팔을 시작했는데, 그 자매와 나눈 편지 내용을 보면 대부분 성경과 신앙 이야기였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참 신앙적인 내용들을 나누었어요. 어머니가 저의 결혼 전에 그 편지들을 다 불태워 버리셨지만 말이에요.(웃음) 이런 것이 다 교회에서 잘 배운 덕분이었죠. 제가 다니던 왕십리 교회가 개혁주의 신학에 서 있었는데 목사님도 성경 중심의 설교만 늘 하시던 분이어서 거기서 잘 배웠죠. 그래서 고등학생일 때 자연스럽게 개혁주의 신앙을 접한 거예요. B. B. 워필드가 쓴 ‘구원의 계획’도 그 때 읽었어요. 아무튼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3년 동안 핍박 속에서도 정말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 그러니까 고등학생때부터 목사에 대한 소명이 있으셨던 거군요.

서: 아니에요. 그때는 목사가 되는 게 뭔지도, 신학교가 있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저 목사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안 형편이 안 좋으니까 육사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탈락이 된 거예요. 그래서 재수해서 육사를 다시 갈 생각으로 합천 해인사 근처에 있는 외갓집에 가서 공부를 했죠. 그때 외삼촌이 대구 달성 지역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저를 보고 거기만 있지 말고 교회에 와서 봉사하라고 하셔서 시골 교회에 가서 종치기를 했어요. 근데 얼마쯤 지내자 삼촌 목사님이 저에게 “내가 보기에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 같다. 무슨 사관학교냐, 신학교에 가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가 목사님이 자꾸 그러시니까 “그럼 하나님께 기도해 보겠습니다” 했어요. 거기서도 기도를 많이 했죠.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종치고 새벽예배 참석하고, 밤에는 철야기도 하고, “하나님, 제가 정말 신학교 가는 게 하나님 뜻입니까?”라고 묻기도 하면서 참 기도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응답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목사님께 아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시험에 한 번 더 떨어지면 그때 가서 신학교 가는 거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시험 치르기 한 열흘쯤 남겨 두고 목사님이 나더러 주일 학교 설교를 하라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31절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잘 아는 어린이가 되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설교하다가 도중에 고꾸라졌어요. 마음속에 이런 울림이 있었어요. ’아이들한테는 예수님 잘 믿으라고 하면서 너는 무엇을 하느냐’(울먹거리심) 하나님의 음성과 같았어요. 그래서 육사 시험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갔죠.

: 특별한 경험이셨군요. 하나님께서 그 일(설교)을 정말 은혜의 방편으로 삼으셨군요. 그래서 총신대학교에 들어가시게 된 건가요?

서: 아니요. 삼촌 목사님이 대구에 계셔서 대구 신학교로 갔어요. 그런데 그때 무슨 일인지 학교가 엄청 시끄러웠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큰 사람이 되려면 서울 가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 해 가지고 총신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어머니가 “나도 너 따라 교회 가겠다” 하시면서 교회를 다니게 되셨고, 이후에 아버님과 형제들도 다 예수 믿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복을 많이 주셨어요.

: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가정 구원의 불쏘시개로 쓰셨군요. 축하드립니다.(웃음) 신학교에 다니면서 더 활활 타오르셨나요?

서: 총신을 다니면서 ‘해마루’라는 기독교 문학회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느라 바빴어요. 우리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칼빈대, 서울대, 숭실대, 숙대 등의 대학생들과 문학회 활동을 했어요.

: 아, 그러세요?

서: 그런데 말이 기독교 문학이지 사실은 일반 문학회였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기독교 문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설이나 문학을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을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이 일에 관심을 더 많이 가졌어요. 그때 제가 4년 내내 모임 회장을 맡았어요.

: 의외입니다.

서: 당시에 이청춘씨나 조세희씨 같이 굉장히 인기 있던 소설가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셔서 강의도 듣고 책도 나누었어요. 총신대에서 1회 신춘문예 모집할 때 소설을 써서 냈는데, 당선작은 없었지만 가작으로 상을 받기도 했어요. 총신에서 신춘문예 1호 당선자는 아마 저일 겁니다.(웃음)

: 새로운 소식인데요. 소설가가 되실 뻔 하셨네요.(웃음)

서: 그 당시에는 소설을 쓴다고 4년 동안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었어요. 하나님께서 훗날에 설교자로서 훈련을 시키신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평신도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안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에 유학에 대해서 생각을 조금 하게 되었어요.

: 그렇잖아도 영국으로 유학을 하시게 된 과정에 대해서 여쭈려고 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서: 제가 대학 졸업하면서 총신에서 합신이 갈라져 나왔어요. 고민하다가 교수님을 따라서 합신에 갔는데 한 달 가량 다니다가 수업이 진행되지 못할 불편한 일이 있어서 더 이상 못 다니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총신신대원에 입학하였는데, 그곳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무엇보다 교수님들이 없으니까 배울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1년 정도 다니다가 포기하고 유학을 가게 된 거죠.

: 신대원 과정(M.Div)을 다 마치기 전에 유학을 가신 거네요?

서: 예. 제대로 가르칠 교수가 없으니 공부를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차라리 유학을 가자고 생각한 건데, 영국으로 가게 된 이유는 제가 줄곧 해 왔던 고민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평신도들을 어떻게 훈련을 시킬 것인가‘는 물음을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기독교 역사가 긴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영국에 가서 청교도를 만난 거죠.

: 원래는 청교도를 공부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서: 예. 런던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청교도를 접하게 되었어요. 청교도를 공부해 보니까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평신도 훈련 프로그램이 있었던 게 아니라 설교가 가장 중점적인 그들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설교자로 부르셨는데, 나는 엉뚱한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반성하면서 설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공부를 마치고나니 왕십리 교회에서 기왕이면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권면을 받아서 알아보던 중에 프리 처치 칼리지(Free Church College)를 소개 받았어요. 런던 신학에서의 2년 과정을 마치고 프리 처치 칼리지에서 3년간 공부했어요. 런던 신학교에서는 청교도를, 프리 처치 칼리지에서는 장로교신학의 진수를 맛 본 거죠. 원래는 구약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학위 과정에서 요구하는 책 리스트를 보니까 쓰레기 같은 책들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로 무슨 교회를 살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공을 역사신학으로 돌렸죠.

: 당시 학교에 다른 한국인 유학생도 있었나요?

서: 실은 두 학교 모두 제가 최초의 한국 학생입니다. 그 다음에 공부한 에딘버러 칼리지도 합동측 출신으로서는 제가 1호에요. 통합측이나 기장측에서는 많이 다녀갔어도 합동측에는 없었거든요.(웃음)

: 개인적으로 뿌듯하시겠네요.(웃음) 그래도 처음이셨던 만큼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 유학생활은 어떠셨나요?

서: 늘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어요. 저의 신앙생활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고등학교 3년 기간이라고 한다면, 저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은혜스러웠던 때는 유학생활이었어요. 굉장히 가난하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한 시간이었어요. 당시 영국은 물가도 비싸고 학비도 엄청 비쌌어요. 유학 떠날 때, 전셋값과 교회에서 준 돈을 합쳐서 200만원을 들고 갔는데, 랭귀지 스쿨 가서 한 학기 공부하고 나니까 120만원인가 나가고 없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감사하게도 왕십리 교회에서 매달 후원금을 보내주기로 결정해서, 하나님이 그 후원금을 통해 제가 아르바이트 하나 안 하고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죠. 그리고 방학 때면 시골 교회에 가서 설교 봉사를 하였어요. 학교 게시판에 시골의 목사님 안 계신 교회에서 봉사할 사람을 구한다고 광고가 나온 것을 보고 영어도 잘 안되던 제가 학장님을 찾아가 부탁을 하였어요. 유학생이 백인들 모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겠다고 하니 처음엔 학장님이 웃으시더라고요. 그러면 본인이 그 교회에 연락해서 알아보겠다고 하시더니 1주일 후에 그 교회에 와도 된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학장님 도움으로 에딘버러에서 예닐곱 시간 정도 운전해서 가야 하는 시골 교회에 가서 방학 동안 목회를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한 교회가 더 나와서 매년 방학 때마다 두 교회를 번갈아 가면서 사역했어요. 그렇게 받은 사례비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죠.

: 목사님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 성도들에게도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네요.

서: 그렇지요. 모두가 백인들이었지만 인종차별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어요. 정말 모두가 사랑으로 대해주셨어요.

: 큰 힘이 되셨겠습니다.

이제 유학 이후 이야기를 좀 나누보죠. 한국에 언제 들어오셨죠?

서: 에딘버러 신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90년 초에 귀국을 했어요.

: 좀 전에 유학 시절에 설교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셨다고 하셨는데, 한국에 돌아오신 후에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당시 한국 교회 설교 풍토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의견을 갖고 계신 게 있었나요?

서: 그 이야기를 하려면, 에딘버러에 있을 때 한 가지 경험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은 총신에서 설교학을 가르치시던 박희천 목사님이 방문하신 적이 있었어요. 제가 목사님에게 한국교회 강단의 실상이 어떤가 하고 여쭙자, 그때 그분이 그러셨어요. “한국교회 강단의 96%가 성경을 전하지 않는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다면 거의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데 과연 정말 그럴까하고 의아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89년 말인가, 90년 초에 귀국해서 총신신대원에 편입해서 못 다한 공부를 마치고 그 이듬해부터 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어요. 방배동에 있는 신학교에서 전임 교회사 교수를 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전에 박 목사님께 들었던 바가 사실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 줬어요. 교파를 초월해서 당신들이 좋아하는 목사님들 세 사람을 선정해서 그분들의 설교를 성경적, 신학적, 실천적인 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를 분석해서 내라는 숙제였어요. 학생들을 통해 한국 교회 설교 현장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지요. 1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과제물을 싸 들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꼬박 1주일 동안 꼼꼼히 읽고 내린 결론은 박희천 목사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이었어요.

: 당시 교회 현장에 있는 신학생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한국 교회의 설교 풍토를 이해하신 거군요.

서: 예. 아주 충격을 받았어요.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어요. 신학도 없고, 성경을 제대로 풀어 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주제 설교나 윤리 설교나, 아니면 주관적인 성경 해석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당시 같은 학교에 강사로 오셨던 한제호 목사님과 함께 설교연구원을 세우게 된 거예요.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하나님께서 서문강 목사님도 만나게 해 주셨어요. 두 분 모두 개혁주의 신학과 관련해서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계셔서 한국 교회의 설교 갱신을 위해 함께 뜻을 모으기로 했어요. 그 결과물이 92년도 9월에 첫 선을 보인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이라는 모임입니다.

: 영국에서도 그와 같은 모임이 있나요?

서: 진리의 깃발사(Banner of Truth)에서 매년 4월에 주최하는 래스터 컨퍼런스라는 것이 있어요. 일종에 개혁주의 목회자 컨퍼런스죠. 원래 이름은 배너 오브 트루스 컨퍼런스인데, 래스터 대학 강단에서 모이다 보니 그런 이름을 가졌어요. 그 모임은 제가 런던신학교 다닐 때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모임을 가서 놀란 것이 약 60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여서 컨퍼런스에 참여하는데 내용이 순수한 개혁주의인 거예요.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교파에 속한 목회자들이 참석했는데도 컨퍼런스에서는 시편찬송만 불렀고, 강의 내용은 전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토대로 진행되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국에 가서 이런 모임을 시도해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죠. 그것이 모태가 돼서 개혁주의설교연구원으로 발전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황폐화된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교제 속에서 한국 교회에 개혁주의를 확산시키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설교연구원 사역을 시작하게 된 거죠.

: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이 설립된 지 올해로 21년이 지났는데, 원하시는 만큼의 성과가 있으셨나요?

서: 처음에 열 댓 명이 모여서 시작한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수백 명 참석하는 다른 목회자 컨퍼런스에 비하면 숫자적으로 여전히 열악하다고 보아집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목회자들이 개혁주의에 관심이 없는 흐름하고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요. 또 앞에서 이끄는 저의 능력부재라고도 생각돼요. 그럼에도 21년 동안 이 모임을 유지해 온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뜻 깊은 것은 돈이 있거나 대형교회의 지원을 받고서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관심 있는 분들의 후원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감사한 것은 제가 이 일을 시작하던 당시만 해도 청교도에 관해 출판된 서적이 몇 권 없었어요. 그때 아주 유명 출판사에 가서 청교도 관련 책을 내 줄 수 있느냐고 하니까, 출판 담당하는 사람이 “요즘 누가 그런 책을 읽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거절하더군요. 그래도 강의하는 학교마다 청교도 신학을 가르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청교도를 소개하고 했더니 그 과정 속에서 청교도 전문 출판사들도 탄생하였고, 요즘에는 여러 출판사에서 청교도 서적을 내고 있어요. 20여 년 동안 이 사역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이 모체가 돼서 좋은 청교도 책들이 많이 나왔어요. 문서적으로 보면, 약 200여 종이나 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저는 청교도 신앙의 저변 확대를 이루는 일에 하나님께서 설교연구원을 귀하게 쓰셨다고 생각해요.

: 공감합니다. 청교도 신학, 개혁주의 신학이 낯설게 여겨지던 때에 이것을 확산시키는 운동을 20여 년 간 꾸준히 활동해 오신다는 것은 유무형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자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몇 해 동안 설교연구원 활동을 보니까 다른 기관과 좀 다른 점이 눈에 띄던데요. 기념세미나 때마다 외국 강사 분을 초청하시던데 어떤 의도가 있으신지요? 또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강사분이나 주제가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서: 초창기 때는 세미나를 한 해 세 번 했어요. 설교연구원이기 때문에 강의보다는 설교 실습에 중점을 두었지요. 그래서 한제호 목사님, 서문강 목사님, 윤두혁 목사님과 함께 지난 주일 설교를 다시 하고 서로 평가를 해 주는 그런 기회를 가졌어요. 경험을 하신 분들은 좋아하셨어요. 왜냐면 누구도 자기 설교를 평가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실제로 서로 평가를 받아보니까 굉장히 도움이 되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너무 부담스러운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가 공개적으로 요리(?)되니까요. 설교를 교정 받을 수 있어서 좋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게 아닌가 염려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여하튼 갈수록 참여자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거예요.

: 그래서 강의의 형태로 변화된 거군요.

서: 예. 한 3년 지나고서부터 강의를 늘려가면서 외국인 강사를 모시자고 의견이 모아졌어요. 영국 진리의 깃발 출판사에서는 매년 영국, 미국, 호주에서 목회자 컨퍼런스를 진행하는데 아시아권에서는 모임이 없으니까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이 아시아에서 이 역할을 감당해보자’고 하였던 거지요. 첫 강사를 진리의 깃발지 공동 설립자 중 한 분인 이안 머리 목사님을 모셨어요. 그 때 한국에 오셔서 ‘참된 부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하셨는데, 그게 아마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요. 또 그 강의에 대한 선물로 이안 목사님의 ’성경적 부흥관 바로 알기‘라는 책을 제가 번역해서 냈어요. 그 후로도 주로 진리의 깃발사 컨퍼런스에 오는 강사님들을 모셨어요. 청교도와 개혁주의에 관해서 강의해 줄 수 있는 분들이 주로 오신 거죠. 그 전까지만 해도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강의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개혁주의설교연구원이 모태가 돼서 다른 데서도 외국 강사를 초청하는 일들이 벌어졌어요.

: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대담한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설교연구원을 통해서 좋은 외국 강사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내용에 있어서 우리보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현장에 계신 분들이 직접 와서 증거해 준다는 것은 어떤 분들에게는 굉장히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봐요.

서: 사실은 외국 분들 모시게 된 게 두 가지 이유였었는데, 하나는 진리의 깃발 컨퍼런스를 아시아권에서 진행하고자 했던 것이에요. 우리 설교연구원이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활동이 한국에만 머물지 않고 극동지역, 그러니까 일본, 중국, 싱가폴, 대만, 홍콩, 필리핀 지역에까지 확장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그곳에 있는 순수한 개혁주의 지도자들간의 협의체 구성을 위한 발판이 되기를 원하고요. 그런 기대에서 일본 목사님도 강사로 초청한 적이 있어요. 둘째로는 한국의 개혁주의자들끼리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개혁주의 목회자들의 흐름이 어떠하며, 그 가운데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으로 외국인 강사를 초대하게 되었던 거죠. 한국 교회가 거품이 많아서 외국 강사를 초청하면 비용을 많이 지출하는데 비해 우리는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서 진행하였고 또한 강사분들도 우리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셔서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었어요. 이안 머리 목사님의 경우에는 나중에 드린 강사비도 다 도로 내놓고 가셨어요.(웃음) 이렇게 해서 함께 개혁주의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그런 울타리가 되자고 하는 측면이 많았었죠.

: 그러셨군요. 앞으로도 뜻하신 대로 더 잘 진행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에서도 진리의 깃발지를 보급하고 계신데, 영국 진리의 깃발지사와 어떤 계약 관계에서 진행하고 계신가요?

서: 영국 진리의 깃발사는 원래 출판사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책들을 한국에 보급하는 일을 해 주길 바랬어요.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는 손을 뻗칠만한 역량이 못 됐어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출판사 경영 마인드 같은 은사는 허락하시질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요청하기를 “우리가 한국판 진리의 깃발을 만들겠다” 고 했죠. 진리의 깃발은 영미권 개혁주의 계통에 있는 분들의 동향 뿐 아니라 신학적 흐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한국적인 상황에 맞게 만들어서 보급하려고 했던 거지요. 그때 아마 직접 출판 사역까지 감당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커졌을 거예요. 하지만 저도 역량이 부족했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어요. 그때는 말이죠.

: 어떤 식으로 한국판 진리의 깃발지를 내게 되었나요?

서: 영국 진리의 깃발사와 잡지만 계약을 맺어서 7:3으로 나눠서, 70%는 번역하여 싣고, 30%는 한국 사람의 글을 싣기로 했어요. 그 대신에 로열티는 줄 수 없다고 했어요.

: 저작권에 관한 사용료 지불 없이 잡지 글을 받아 오셨다는 말씀인가요?

서: 예. 무료로 하자고 해서 시작했어요. 처음에 이안 머리 목사님이 3년 동안 매년 4천 파운드씩을 도와줬어요. 2년간 8천 파운드를 받고 3년째는 4천 파운드 값어치의 원서들을 제공받았죠. 물론 이것도 무료였어요. 그래서 그 책들을 판 수입으로 설교연구원을 운영하였어요. 그 당시 환율에 의하면 4000파운드가 약 800만원 정도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3년 동안 무려 2400만원이나 지원해 준 거죠.

: 우와, 대단합니다. 어머어마한 지원이네요.

서: 예. 그렇게 지원을 해 줬어요.

: 그렇게 해서 한국판 진리의 깃발지가 나온 지도 꽤 되었죠?

서: 20년 됐어요. 92년도에 설교연구원 하면서 93년도 6월부터 격월로 나왔으니까요. 영국 진리의 깃발지는 매달 나오지만 우리는 그렇게 출간할 여력이 없어서 두 달에 한 번씩 묶어서 내고 있어요.

: 진리의 깃발지의 탄생 비화를 들으니 더 정감이 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요. 제 생각에 한국 개혁주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런 형태의 잡지를 20여 년간 꾸준히 소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런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을 해 오셨는데, 진리의 깃발을 한국 교회에 소개하시면서 가지셨던 소망이 좀 실현되었나요?

서: 영국에서는 일반 성도들도 진리의 깃발지와 같은 글들을 많이 읽어요. 그래서 처음에 그 잡지를 낼 때는 목회자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그런 글들을 많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였는데 진짜 반응이 없었어요. 심지어 내가 시무하던 교회 장로님들에게 나눠 줘도 도통 관심이 없었어요. 교회에 지원을 바라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그러다가 그 교회를 떠나서 삼양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제 생각엔 아마 하나님께서 설교연구원과 진리의 깃발지 사역을 하라고 그곳으로 보내주셨던 것 같아요. 삼양교회로 가기 전에 하남시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했는데, 그 교회에 부임했을 때 80명 정도 모이던 숫자가 3년 2개월간 약 250명으로 늘었어요. 아마 거기를 안 떠나고 지금까지 계속 있었다면 그 시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개혁교회로 자랐을 것 같은데, 설교연구원과 진리의 깃발지 사역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무척 힘들었어요. 심지어 목회자들도 “너무 어려워서 못 읽겠다“, “이런 것으로 교회가 부흥하겠느냐“ 하면서 손사래 치니까 거의 포기 상태까지 갔어요. 그러던 중에 여수에 있는 어느 목사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일면식이 없는 분인데 진리의 깃발 발행해 줘서 너무너무 감사하다면서 여수에 있는 몇 분 목사님들이 이것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분의 전화 한 통화가 굉장히 격려가 됐어요. ‘하나님께서 이 사역을 계속 하라고 그러시는가 보다’ 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고는 삼양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삼양교회 장로님들은 설교연구원 사역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 주셨어요. 교회에서 매달 70만원씩 선교비로 설교연구원을 지원해 주었는데 그게 큰 힘이 되었어요. 그것이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해 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거죠.

: 그런 감동적인 사연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지금은 발행 부수가 얼마나 됩니까?

서: 20주년 하면서 2천명의 독자 달라고 하나님 앞에 떼를 많이 썼는데 과반수가 채 안 돼요. 여전히 “너무 어렵다”, “딱딱하다” 는 반응이 있지만 계속 읽는 분들은 너무 좋다는 반응이 많아요. 2천명 정도의 독자만 확보 되면 문서 활동은 자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직은….. 지난 20년간 이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목사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거예요.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성도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도 하여간 5천원, 3천원씩 후원해 주시는 분들도 있고, 그런 분들의 푼돈들이 모아져서 지금까지 빚은 안 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웃음)

: 아무래도 이런 사역에는 자발적 헌신자들이 있어야 하겠고, 그러한 일은 한국 개혁주의의 성숙도와 맞물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제 주변만 보더라도 많은 분들이 이 잡지를 알고 있고, 여기에 실린 글과 내용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오신 진리의 깃발 발행 사역이 끼친 선한 영향력을 느끼게 됩니다. 개혁신앙과 관련하여 무형의 자산이라는 측면도 있고요.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도 더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서: 예. 그런 날이 온다면 하나님께 감사한 거죠.(웃음)

: 이번에는 좀 신학적인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영국에서 청교도와 장로교회를 공부하고 경험하셨는데, 목사님은 청교도와 개혁주의와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서: 거의 동의어로 봐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목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종교개혁으로 개혁주의가 태동된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사상은 이전부터 내려온 거지요. 개혁주의라는 말은 루터주의에 반하는 용어로 칼빈과 그 가르침을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면, 특별히 칼빈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청교도는 17세기에 와서 칼빈주의 신앙을 꽃피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는 개혁주의와 청교도 신학의 근본 원리 자체가 성경 제일주의적인 사고를 둔다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 두어야 된다고 봅니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라고 하면 칼빈주의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우리 전 인생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그것을 성경적 원리에 적용시켜 갈 것이냐 하는데 많은 관심을 두는 반면에, 청교도 사상은, 초창기에는 조금 달랐어도,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이전, 그러니까 17세기 초반부터는 순수한 목회신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봐요.

: 청교도 신학에 대한 평가가 새롭네요.

서: 저는 청교도 신학을 순수한 목회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취임하는 1603년 이후부터 청교도주의는 거의 목회신학으로 굳어졌어요. 그리고 그 결과물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로 나타났어요. 초기 청교도 운동은 장로회주의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전후로 교회 정치 부분에서는 장로교회를 비롯해서 독립교단, 침례교단, 퀘이커 교도들, 영국 성공회 등으로 사분오열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 즉 언약도들이 청교도 사상을 끝까지 고수하고 가장 잘 이어받았다고 볼 때, 청교도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도 특별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에서 모든 영역을 다룬다면, 청교도의 주안점은 목회신학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물론 청교도 안에는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청교도는 목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지요.

: 말씀하신 대로 청교도 신학 안에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고, 세대별로 청교도의 강조점이 좀 다를 수 있다면 모든 세대를 통틀어 청교도 신학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서: 성경관이라고 봐져요. ‘성경을 어떻게 이해를 하느냐‘라고 하는 것인데, 청교도 신학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규정하는 대로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거지요. 이런 기반에서 청교도들은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목회 신학을 열정적으로 추구했어요.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 청교도들은 바른 가정 세우기를 무척 강조했어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부분에 가정이 핵심이 된 거죠. 어떤 점에서 개혁주의는 신학자들의 전유물로 많이 부각된 측면이 있지만, 청교도 신학은 일반 성도들에게 더 많이 어필되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설교연구원이나 진리의 깃발지에서 다루는 주제도 사회 전반적 이슈들보다는 주로 목회와 관련된 내용들이에요. 즉 성도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해 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지혜를 얻어서 그들이 사회 영역에 나가서 제대로 활동할거라 생각해요. 청교도 신학의 또 다른 특성이 있다면 경건한 가정 구현이에요. 이게 사실은 굉장히 핵심이에요. 그리고 안식일(주일)을 성수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가 청교도 신학의 특성이라고 보아지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특히 경건한 가정 세우기가 너무 빈약해요. 실제로 개혁주의 사상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어른들 세대에서는 가정을 굉장히 소홀히 여겼거든요. 목사나 직분자 가정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그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못하는 일이 많았어요. 하지만 청교도들은 가정을 바로 세우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들은 가정을 기독교 교육의 센터(핵심)으로 생각한 거죠. 저는 청교도들이 이 땅에 성경적인 사람들로서 나타날 수 있었던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봐요. 물론 그 원동력은 강단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강단에서 전해진 말씀이 반드시 가정과 사회에서 꽃을 피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거죠. 우리는 가정 예배라든가, 자녀 신앙 교육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빈약한 게 사실이거든요. 흔히 개혁교회에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강조할 때, 교회 중심이란 교회당 중심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개념을 착각해요. 교회당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교회가 그저 많은 사람들을 교회당으로 끌어 모으는 데만 관심을 가져요. 그러다보니 성도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시간이 없어요. 청교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역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들을 가지도록 한 거죠. 저는 이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요.

: 매우 타당한 지적이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은 가시적인 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데도, 한국교회는 보여 지는 건물과 모이는 사람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가정과 사회에서 신앙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덜 강조되는 느낌이고요. 특히 성도의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설교연구원에서 하고자 했던 사역 중 하나가 개혁주의 성도들이 안심하고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할 수 있는 QT지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막상 시도하려니까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주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QT를 통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경을 강론한 것과 우리의 좋은 신앙 선배들이 남긴 글들을 나눌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여력이 좀 안 돼요. 진리의 깃발지 내는 것만도 힘들어요. 하지만 구독자가 2천 명만 넘어간다면 직원을 둬서라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에요. 그래서 성경적으로 건전한 가정을 세우는 일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아무튼 이렇게 성경과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청교도 신학은 우리 시대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청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사님들도 진리 안에서 협력해서 공동의 선을 이루어가는 일에 관심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 많은 분들이 공감할만한 내용인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열매가 있으리라 봅니다. 주님의 보편교회를 더욱 튼튼히 하고 확산시킨다는 의미에라도 교회들이 물자를 나누고 인력도 나누고 또 달란트도 나누는 그런 일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말이지요.

서: SDG개혁신앙연구회에서부터 그런 일을 같이 펼쳐갈 수 있는 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예. 노력하겠습니다. 기왕에 한국 교회와 관련된 말씀을 하시니 장로교회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책에 보니까 한국 장로교회를 ‘한국식 순복음 장로교회다‘ 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던데요.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시나요? 한국에 이토록 많은 장로교회들이 있음에도 왜 장로교 신앙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장로교회를 찾기 힘든가요? 이유는 뭘까요?

서: 가장 주된 이유는 장로회주의가 뭔지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배우지 못 했으니까 가르치지 못 하고, 가르치지 않으니까 몰라서 못 하는 것이지요. 한국 장로교회는 장로회주의라고 하는 틀은 받았지만, 실제로 그 속에 있는 내용들을 깊이 숙지하고 장로회주의에 걸맞는 교회들을 세워 가는 일을 못한 거예요. 장로회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순교한 언약도들의 정신은 전혀 알지도 못 하고, 어떻게든 외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사고가 일반화되다 보니까 장로교회에서 순복음식 목회 형태들이 분별없이 그냥 수용돼 버리는 거죠. 장로회주의의 역사적 신앙 형태와 장로교 목회의 실제 같은 부분을 제대로 습득하고 가르쳐 주는 데가 너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설교연구원이 최근에 집중적으로 소개하려는 부분들이 그런 부분들이에요. 작년에 20주년 행사를 하면서 조셉 파이파 목사님을 모시고 장로회주의에 대해서 듣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그리고 내년 2월 모임에서도 ‘장로회주의와 장로교 목회 실제’ 라는 주제로 이안 캠벨 목사님을 모시고 세미나를 준비 중이에요. 아무튼 저의 남은 3기 사역의 중심 과제로 삼는 것이 정통 장로교주의를 보급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정통 개혁 장로교 신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봐요.

: 어떤 분들은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 역사를 언급하면서 최초로 성경을 전달 받은 것이나 복음을 소개한 일이나 1907년에 독노회를 형성한 것을 다른 교파와의 차별성으로 보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해 왔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장로교회의 역사가 130년이나 지났음에도 작금의 한국 장로교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서: 처음에는 우리가 좋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파생된 장로회주의의 본류보다는 미국식 장로교를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미국식 장로교와 스코틀랜드 장로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국식 장로교는 회중적 장로교회 형태를 띤다는 점이에요. 미국은 거대한 땅덩어리잖아요. 그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우리나라 북한 땅덩어리 정도밖에 안돼요. 자동차가 없었던 시대에도 마차를 타고 한 2-3일이면 노회에 참석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은 워낙에 영토가 넓다 보니 지역성을 강조한 노회로 모이기가 수월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스코틀랜드처럼 장로회주의적 장로교회보다는 개교회와 회중의 권한이 더 강화된 형태의 장로교회가 발전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접목이 돼서 노회 중심의 교회 정치보다는 개교회 중심의 교회 정치가 강조되다 되다 보니까, 지금에 와서 장로회주의의 이탈이 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면서 한국교회에 교회성장론이 소개되니까 장로회주의 이탈이 더 가속화된 것 같아요. 피터 와그너의 교회 성장론에 빠진 사람들은 교회와 목회의 성공 여부를 크기와 부피로 따지고 있어요. 그러한 것들을 성공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장로회주의를 지키려고 하는 노력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이죠.

: 목사님이 쓰신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이란 책에서 장로교회 역사와 관련해서 마틴 부처가 장로 제도를 이룩했다면 존 칼빈은 장로제도의 이론을 체계화 시켰고, 존 낙스는 장로교 제도를 구체화 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대목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장로교의 구체적인 열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말씀하시는 장로회주의적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란 어떤 교회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서: 예를 들어, 교회 개척과 관련해서 말하면 회중적 장로교회에서는 그것을 목사 개인의 역량으로 봐요. 즉 노회의 허락 여부와 상관없이 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노회가 허락해야만 교회가 개척될 수 있어요. 노회가 그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개교회가 실하게 설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는 뜻입니다. 노회가 중심이 되어 보편적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해요. 그런데 한국은 전혀 그게 안 되죠. 노회가 세우는 게 아니라 목사 개개인이 마치 자영업자가 가게를 내듯이 교회를 세우고 그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곤 해요. 그러니까 교회가 성장하고 견고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노회의 역할은 하나도 없어요. 그저 행정적인 지침 외에는 한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노회가 협력하고 지원하는 부분이 너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편적 교회가 되지 못하고, 아무개의 교회, 그 목사의 교회, 이렇게 나누어지는 거예요. 이런 점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가장 큰 차이가 있죠.

: 그렇다면 엄밀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교회 장로교회 제도는 변질하고 타락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 그럼요. 많이 변질이 된 거죠. 안타까운 것은 장로회주의 원리를 다룰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책인 제1치리서나 제2치리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회의 때 정치 제도에 대한 장로회의 특권과 권리를 다룬 부분, 그러니까 사무엘 루터포드나 조지 길레스피가 당시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토론하고 나눴던 그런 책들이 한국 교회에 전혀 소개가 안 됐어요. 또 부카난이 쓴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라고 하는 교회와 관련된 중요한 책들과 찰스 핫지의 정치 조례 원리를 다루고 있는 기본적인 텍스트들이 아직 소개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장로교회의 본질과 역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어요. 장로교회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은 앞으로 순수한 장로교회를 세우는 일에 정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부분인데, 신학교회에서 장로교회사가 필수로 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요.

: 말씀하신대로 목회자나 신학생조차 장로교회에 대한 정체성과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니 장로교회를 다니는 일반 성도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자신이 왜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왜 장로교인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성도를 만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서: 전혀 없다고 봐야죠. 그냥 아무 교회나 가는 것이죠.

: 이것은 성도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가르치는 자의 문제가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서: 맞습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잘 가르쳐줘야 되는데 현재 한국 장로회에서는 처치맨이 없어요. 이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입니다. 미국의 찰스 핫지 같은 분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데, 정치투쟁으로서의 장로교는 말해도 정말 순수하게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한 원리들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처치맨이 너무 없어요. 실천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언약도들은 장로회주의때문에 목숨까지 내놨는데 우리는 장로교회면 어떻고, 감리교회면 어떻고, 순복음교회면 어떻고 해요. 그저 가까운 곳, 혹은 편리한 곳이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교회정치뿐 아니라 예배와 시편 찬송과 같은 장로교회적 유산들을 회복하고 좀 더 순수한 장로회주의, 혹은 개혁파 장로회주의를 열망하는 교회들 간에 어떤 연합과 협의가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해요. 이 부분은 설교연구원이 앞으로 하고 싶은 사역이기도 합니다.

: 기대됩니다. 순수한 장로교회라고 하면 아무래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던 당시, 그 회에는 다양한 교파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참석하였지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몇 분의 총대들이 참관자(observer) 신분이었음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서: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 루터포드를 비롯해서 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베일리, 조지 길레스피, 이렇게 네 분의 목사님과 두 분의 장로님이 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 네 분의 목사님들은 정말 탁월한 인물들이었다고 봐요. 이 분들은 초청돼서 왔기 때문에 발언권만 주어졌을 뿐, 결의권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이 발언한 내용들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압도적으로 주도했다는 것은 놀라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제 책에도 약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신론 같은 경우에는 회의 전에 어느 분이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 트위스 의장의 제안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론으로 채택되었어요. 누가 기도했는지 이름은 안 나와 있지만 내 생각에는 사무엘 루터포드 아니면 알렉산더 헨더슨 두 분 중에 한분이 기도했으리라고 봅니다. 그 정도였으니 그분들의 영성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겠는가 짐작하고도 남지 않습니까? 교회 정치 문제를 다룰 때도 먼저 감독정치를 강조한 어느 분의 강의를 듣고 그것이 성경적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을 하려 했을 때,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님이 가장 젊은 조지 길레스피 목사한테 ”아무래도 자네가 나가서 왜 장로회주의가 성경적인지 이야기 좀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동안 장로회주의가 왜 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강의하게 되었어요. 그 내용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1646)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되었어요. 아무튼 그 강의를 듣고 감독주의가 옳다고 주장했던 어느 교수가 조지 길레스피한테 무릎을 꿇고 ”내가 지난 10여년 이상 연구해서 발표한 내용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게 됐다. 내가 졌다“고 하면서 퇴장하였어요.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장로회주의를 성경적인 정치제도로 채택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이 조지 길레스피한테 도대체 무엇을 보고 강연했는지 보여 달라고 하면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쪽지 한 장에 대해서 궁금해 했는데, 그 쪽지에는 아무 원고 없이 그냥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한 구절이 쓰여 있었대요. 저도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다 읽어보지 못했지만, 정말 대단한 내용인 것 같아요. 이렇게 스코틀랜드에서 온 네 분의 목사님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어요. 그중에서도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님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보아지는데, 이분들의 신앙이 고백서에 그대로 반영된 거예요. 그리고 1648년에 글라스고 총회 때 1560년에 존 낙스가 만든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폐기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장로회 신앙고백으로 받게 된 거예요.

: 혹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여러 교파의 연합의 산물이라고 하면서 신학적인 타협의 최저선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만.

서: 그래도 전체적으로 성경적인 지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 신조로 채택한 것은 정말 역사적인 사건인 거죠.

: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봐도 되겠지요.

서: 그럼요. 왜냐하면 존 낙스를 빼고는 스코틀랜드를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교회가 그가 만든 신앙고백서 대신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대체했다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봐야 해요.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열린 5년 8개월 동안 그곳에서는 정말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죠.

: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국에서 작성된 것이고 영국 연방 신학자들의 영향이 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영국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영향은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를 어떻게 보십니까?

서: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요. 1643년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세 나라 사이에 엄숙동맹(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체결됩니다. 이것은 시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세 나라가 장로회주의를 국교로 한다고 약속한 동맹이거든요. 그런데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 이후 장로회주의는 크게 반발을 사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장로회주의자들이 잘못한 한 가지로 봅니다. 자신들은 교회와 신앙의 자유와 독립성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장로교를 택해야 한다고 강요를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 거지요. 거기다가 영국은 앵글로 색슨족이고 스코틀랜드는 캘트족 후예인데, 서로 민족적 성향도 달랐어요. 더구나 잉글랜드는 규모면에서도 스코틀랜드보다 훨씬 큰데 스코틀랜드에서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는 상황이 정치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이 교묘히 섞여서 결국에 잉글랜드에는 장로회주의가 쇠퇴하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스코틀랜드는 비록 작은 무리들이었지만 세계 장로교회의 본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장로회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건 언약도들의 순교의 피의 열매라고 할 수 있어요.

: 말씀을 들어 보니 장로교회의 뿌리를 말할 때에는 항상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군요.

서: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 영향을 깊숙이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선교 초기에 한국에 영향을 주었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들은 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들이잖아요. 이분들은 주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셨어요. 우리나라에는 직접 들어와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그 자리를 미국 선교사들이 채우다 보니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특징이 한국 교회에 반영되는 일이 좀 많이 억제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 성공회가 영국 국교라면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의 위상이 어떠한가요?

서: 내가 공부하던 89년대만 해도 대단했어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Church of Scotland)는 국교이기 때문에 총회는 거의 국가적인 행사였어요. BBC나 Scottish BBC에서 그 상황을 TV로 생중계할 정도였으니까요. 시민들이 나팔을 불면서 기마병들과 함께 시내를 행진을 해요. 그리고 장로교 총회가 시작되면 여왕이 오든지, 여왕이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특사를 보내서 총회 행사를 축하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 교단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통합측과 같은 교단이에요.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는 국가교회이고, 국가교회로부터 자유를 외치면서 나온 교회가 프리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Free Church Of Scotland)인데, 이 교단도 동일한 주간에 총회를 합니다. 도로 하나를 중심으로 이쪽에는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 총회가, 저쪽에는 프리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 총회가 진행돼요. 그러면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 총회에 참석한 여왕이나 특사가 프리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 총회에도 와서 축사를 해요. 그때만 해도 두 교단 모두 스코틀랜드에서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프리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는 아주 철저한 개혁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반면,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는 자유화와 동성연애 문제 등으로 인해 심한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즉 현재 존 낙스의 신학과 언약도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곳은 프리 처치 오브 스코틀랜드와 프리 프레스비테리안 처지(Free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 같은 교단들이라고 할 수 있죠.

: 그렇군요. 어느 나라나 그와 비슷한 양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로교회의 본산으로서 그나마 바른 장로교주의 신학을 계승하는 교회들이 있다니 다행스럽습니다.

장로교 정치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국 개혁주의권에서 치리 장로와 관련하여 종신직이냐, 임시직이냐 하는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장로의 역할은 목사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직임자로 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직분을 평신도와 성직자로 나누어서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장로교 제도 자체가 성경에 기초해 있지 않은 것이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장로란 치리장로로서 잘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장로로 선출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는 계급적이 되었어요. 서리 집사 되었다가, 좀 신앙생활 잘 하면 안수집사 되고, 안수집사 잘 하면 장로가 되는 식으로요. 성경적으로 보면 장로직과 집사직은 분명한 구분이 있어서 어떤 사람이 집사면 평생 집사고, 어떤 사람은 평생 장로인데 한국 교회에서는 그런 구분은 사라지고 계급적 구조로 되어 있어요. 아무리 당회가 치리회라고 하지만 삼권을 다 쥐고 있어서는 안 돼요. 그것은 장로회 정신이 아닌 거예요. 집사회가 하는 일까지 당회에 종속되어 있어서 당회가 결정하면 뭐든 따라야 하는 방식은 비정상적인 장로교 정치에요. 장로는 일반 성도들 중에서 잘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선출해야 하고, 목사는 잘 다스리는 은사와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 말로 목사와 장로가 팀 사역을 하는 것이 장로회 정치 제도에요. 장로는 목사에 대해 야당 노릇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데 함께 협력자이고, 동역자인 거예요.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그런 정신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어요. 장로 선출 자체가 계급식이고, 장로가 되면 교회의 주인 노릇하고, 목사도 자기들 마음대로 고용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거죠. 이것은 한국 교회가 반드시 개혁해야 할 주제라고 봅니다.

: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직분간의 평등성과 은사에 따른 사역에 대한 존중이 장로교 정치의 기본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질문의 요지는 근래 들어 유럽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은 분들 중에는 장로직을 한정적으로 적용해서 몇 년간 직분을 맡은 후에 다시 평신도로 돌아갔다가 다시 회중의 투표에 의해 직분을 맡는 제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목사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서: 직분에 있어서 항존직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직임을 갖고 있다는 의미보다는 교회가 있는 한 항상 있는 직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와 장로에게 공히 안식년 제도를 적용할 필요가 있어요. 실제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그리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전혀 그런 인식이 없다 보니까 끝까지 횡포를 부리는 부작용도 나타나곤 하는 것 같아요. 화란 개혁교회에서 장로직을 몇 년 동안 하고 또 몇 년을 쉬게 하는 것은 죄성을 따르는, 어떤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막기 위해 마련한 제도라고 생각되고요. 하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는 그런 제도는 없어요. 다만 안식년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목사도 은퇴하면 교회 장로로 봉사를 합니다.

: 저도 외국에서 그런 모습의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참 보기 힘든 현상이지요.

서: 우리는 꿈도 못 꾸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목사가 은퇴하고 장로로 섬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장로회 정치 자체가 올바르게 습득과 정착이 안 됐기 때문이에요. 직분을 성경에 있는 대로 역할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계급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튼 목사와 장로가 다 같이 안식년을 갖게 하는 제도가 필요해요. 그리고 안식년이 끝나면 사역을 그만 두라고 할 것 아니라, 돌아올 때 교인들에게 신임을 묻는 투표를 한다든지 그런 방법은 도입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 개혁자들이 종교개혁 운동을 할 때, 왜 교회 정치 개혁에 그만큼 열의와 관심을 보였는지 이 시대 교회들이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국 장로교회의 현 정치 체제는 종교개혁의 대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서: 그렇습니다. 정말 뼈를 깎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 한국에 규모면에서 세계 10대 교회 안에 드는 교회들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장로교회들도 있는데요. 실제로 지교회로서 어떤 교회가 노회나 총회를 능가하는 권력과 영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데요.

서: 그런 교회는 장로교회라고 말할 수 없어요.

: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 후보생들이 크고 이름난 교회들을 자신의 목회 모델로 삼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서: 장로교회의 교회관에 입각해서 그들에게 확고한 장로회 신학과 정치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신학교와 교사가 없어요. 신학교에서도 별 관심이 없고요.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그래서 질문 드리면, 일반적인 한국 장로교회가 처한 열악한 현실에 대한 자책과 반성의 일환으로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운 모임을 규합해 가려는 시도나 현상이 예측되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서: 지금 교파간에 벽이 다 허물어 진 상황이잖아요, 장로교라는 간판만 이름으로 갖고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럴 때, 정말 같은 신학과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헤쳐 모여서 전통적인 장로회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교회와 교단을 새로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제가 앞장서 깃발을 꽂으면 그 깃발 아래 모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장로회 정치 안에서 함께 한 보편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무슨 일이든 개교회가 독자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총회적으로나 노회적인 차원에서 주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헌금도 개교회가 사용할 경상비만 빼고 모든 헌금이 다 총회로 갑니다. 그래서 교육자 사례부터 선교정책, 교육정책, 대사회적인 프로그램들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들이 있어서 그들이 마련해 놓은 로드맵을 따라 정책이 시행됩니다. 총회장이나 임원들은 그러한 정책을 시행하는 행정적인 역할을 맡은 것이지, 한국 교회에서처럼 결코 권력자가 아니에요.

: 장로교 정치의 올바른 적용에 대해서 강조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성경에 충실한 보다 건전하고 바른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연대와 모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안에서부터의 개혁도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귀국하기 전에 스코틀랜드에 남아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이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한국교회를 위해 섬기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했기에 돌아올 수 있었어요. 총신에 남아 있는 것도 ’여기에 속해서 목소리를 내보자‘하는 뜻이 있어서입니다. 교단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지금까지 해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안에 있으니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고 무언가를 바꾸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시편찬송가를 만들어 보급한 일이에요. 아마 교단 바깥에서 했다면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안에서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이 현재로선 틀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것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의 차이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영국 교회로부터 나와서 좋은 펠로우십은 구성했지만 영국 자체를 개혁하는 일에는 역부족이었어요. 반면에 존 스토트는 영국 교회에 남아서 개혁해 보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여전히 역부족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기는 참 어렵지만 지금 심정에서는 신학적으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건전한 교단을 만드는 것도 한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

: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볼 때, 성경적인 장로교회와 교단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동감하신다는 말씀이군요.

서: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개혁주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주었다면, 지금은 개혁주의 원리에 철저하게 입각한 좋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교회를 세운다면 미적거리고 있는 사람들도 더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보고요.

: 아무튼 우리 시대에 교회의 교회됨을 잘 드러내는 교회나 교단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부담스러운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교회를 사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랫동안 동고동락하신 교회인데 다소 갑작스러운 사임 소식을 듣게 되어서 놀란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감회를 여쭙고 싶습니다.

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큰 아픔이었죠. 비열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목사를 음해하는 일에 대해서 나도 똑같이 법적대응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다툼과 투쟁은 성경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옳은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상대의 불의로 인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내게 허물이 있으니까 발생한 일이라고 봐요. 그래서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성찰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사임 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봐지고요. 지금은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고 있어요. 설교연구원과 학교 강의는 여전히 계속하고 있고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시는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 목사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교회 사역 가운데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목회자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요.

서: 사역하는 동안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얼마큼 그것을 잘 받아서 순종하고 따르는가 하는 것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목사는 그저 성경대로 가르치는 일에 충성할 뿐이지요. 설령 성도들이 돌변해서 다른 반응을 보이더라도 “내가 이렇게 가르쳤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고 사랑하며, 바르게 지침을 주는 과정에서 교회가 잘 세워지는 일에 감사해야 해요.

: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존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님들을 위한 제언을 부탁드립니다.

서: 간혹 개혁주의를 사랑하는 성도라고 해도 자기 취향을 더 많이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 하는 그런 인식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자신이 종교적으로 위안을 받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지 주님의 교회를 위한 피나는 헌신이 많이 부족해 보여요. 특히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분들에게 이런 부족한 점이 많아요. 개혁주의 성도라면 내가 목사로부터 무엇을 받는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내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툭하면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는 분들이 있는데, 목사가 기본적으로 성경에 충실하게 말씀을 전한다면 교회를 떠나기 보다는 그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받아먹는가도 중요하지만, 교회를 세우는 데 자신이 어떻게 기여하며, 헌신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공감합니다. 큰 교회도 필요하지만 작고 알찬 지역교회들이 많이 생겨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모든 성도가 주님의 교회를 잘 이해하고 주님께 충성하듯 헌신하는 모습이 필요하겠지요. 곳곳에 작지만 알찬 개혁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래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전력해서 하시고 싶은 사역이나 특별한 마음으로 계획하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서: 개혁파 장로교 신학연구소와 같이 장로교주의의 본질을 규명하고, 장로교회가 함께 나가야 될 부분들을 공유할 수 있는 연구센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개혁교회 지도자들을 섬기고, 개혁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그것이 저의 마지막 남은 텀(term) 가운데 해야 할 궁극적인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뭐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겠지만, 은퇴 이후에 다른 나라에 가서 개혁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사역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일 년의 반은 선교지에 가서 가르치고 나머지 반은 국내에서 책 쓰고, 번역하고 하는 일을 하려 해요. 실은 조기은퇴 이후에 하고자 한 일들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한 7~8년 빨리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설교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이 일에 전념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교회 사역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구요. 그리고 아시아 극동 지역에 있는 개혁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모임을 형성해서 실제적으로 돕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쪽 지역에 있는 교회들의 상황은 아주 열악하거든요.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갖고 투자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제가 구상하고 있는 것들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실지는 기다려 봐야 하겠지요.(웃음)

: 목사님의 소원이 주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귀한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사역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열매가 더하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SDG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2013.10.24. 수유동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사무실에서

※ 인터뷰 녹음 파일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 본 인터뷰의 권리는 SDG개혁신앙연구회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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